닥터 프랑켄슈타인 116화
12. Like Dr. Ramsey(5)
며칠 후 하산병원 옥상.
밤의 옥상에 올라온 건우가 팔짱을 끼고 한심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병원 옥상 끝에 매달려 양팔을 번쩍 들고 미친놈처럼 웃고 자빠진 중곤이 있다.
“으하하, 으하하하!!!”
중곤의 옆에서 폴짝폴짝 뛰며 만세를 부르는 혜선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꺄하하, 꺄하하!!”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오밤중에 옥상에 올라와서 저게 뭐 하는 짓들이냐?
건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뭔 짓이냐?”
주먹을 꽉 쥐고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던 중곤이 몸을 휙 돌리며 외쳤다.
“미국입니다, 미국! 그것도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에 삼 개월 파견 근무라니! 이건 제 인생 최대의 기회라고요!”
혜선이 계속 깡총깡총 뛰며 주먹을 흔든다.
“세계 병원 순위 3위 병원에 파견 근무라니! 미쳤어요, 정말! 나한테 이런 기회가 오다니!”
하산병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다. 하지만 세계 병원 순위는 고작 37위.
물론 대단히 높은 순위이긴 하지만 상위권 병원에서 일해볼 기회를 얻는 건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고, 엄청난 커리어가 될 것이다.
혜선이 쪼르르 달려와 건우 팔에 매달린다.
“이것도 다 선생님 덕분이죠? 선생님이 우리 꼭 데려가야 된다고 말씀해 주신 거죠?”
“…….”
중곤이 달려와 90도로 허리를 꺾는다.
“선생님은 이 김중곤의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평생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난 가기 싫다고 했다고, 이것들아.’
건우는 박승환 원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실 미국 이야기가 나왔을 때 건우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행을 다니다 시간이 나면 잠시 들러볼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박승환 원장은 건우가 단기 파견 근무를 거절하자 이렇게 말했다.
‘이거 정말 아쉽네요. 모 선생 혼자 보내기가 좀 그래서 밑에 김중곤 선생과 정혜선 선생도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두 분께는 정말 큰 기회가 될 것인데…… 모건우 선생이 가지 않겠다면 굳이 추진할 필요가 없지요. 덕분에 휘하 의사분들은 큰 기회를 잃게 되겠군요, 허허. 아쉽군요, 아쉬워.’
망할 너구리 같은 영감. 내가 거절하면 애들도 다 못 간다고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점점 자신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약한 부분을 찔러 들어오는 것 같다.
팔에 매달려 깡총깡총 뛰는 혜선과 연신 허리를 굽혀대는 중곤을 보니 만약 자신이 거절해서 세트로 못 가게 되는 상황을 알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녀석들이 많이 실망했을 거다.
“젠장, 그래. 가자, 가.”
혜선과 중곤이 동시에 만세를 부른다.
“모건우 선생님 만세! 만세!”
진짜 미치겠군, 아 귀찮아.
* * *
몇 주 뒤, 미국 보스턴.
자기 몸만 한 여행 가방을 두 개나 질질 끌며 땀을 흘리면서도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혜선.
“와와!”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Logan International Airport)에서 택시를 타고 웨스트엔드(West End)에서 내렸지만 중곤이 지도를 잘못 보고 같은 이름의 다른 호텔에서 내리는 바람에 한참을 걷게 되었음에도 혜선은 아까부터 저 상태다.
“흐, 흑인이다!”
놀랄 걸 보고 놀라라. 미국 건물이나 관광지도 아니고 고작 흑인을 보고 놀라면 어쩌냐? 이번에도 달랑 등에 메는 가방 하나 들고 미국을 찾은 건우가 한심한 얼굴로 말했다.
“미국 처음 오냐?”
“네! 처음 오는데요!”
그게 뭔 자랑이라고 그렇게 당당하냐? 음, 하긴 나도 처음이긴 하지. 양손이 자유로워 팔짱을 끼고 걷던 건우가 옆이 허전해 뒤를 돌아보니 잘 따라오던 중곤이 감격한 얼굴로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뭐 해, 인마.”
중곤이 손가락을 들며 말했다.
“저기.”
눈물까지 글썽이는 중곤이 가리키는 곳에 밀러스 강이 보인다.
“저기 뭐? 강 처음 봐?”
“저 강을 건너면 하버드 대학이 나옵니다…… 큭, 꿈에라도 가 보고 싶었는데.”
혜선이 낑낑거리며 가방을 밀어 중곤의 옆에 선 후 까치발을 든다.
“여기선 안 보이네요?”
보이겠냐? 강 건너서 한참 더 들어가야 되는데 이놈들아. 하, 촌놈들 데리고 다니기 창피해 죽겠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건우가 얼른 말했다.
“그만 하고 빨리 와, 이 자식들아. 늦었다, 호텔이고 뭐고 병원부터 가자.”
중곤은 여전히 감상에 젖어 중얼거린다.
“하버드 근처도 못 가 본 내가 하버드에서 만든 병원에서 일을 하게 되다니…….”
혜선이 손을 마주 잡고 몸을 배배 꼰다.
“얼마나 멋진 병원일까요, 진짜 기대돼요. 그렇죠?”
“응!”
건우가 버럭 고함을 지른다.
“당장 안 튀어와, 이 새끼들아!”
중곤과 혜선이 깜짝 놀라 뛰어간다.
“갑니다!”
“지금 갑니다~~~”
화가 난 표정의 건우를 보고 얼른 뛰어가고 있지만 어쩐지 두 사람의 발걸음은 신이 나 있다.
건우가 씩씩거리며 먼저 걷고 있는 와중에도 평소 같으면 허리를 잔뜩 숙이고 주눅이 들어 따라올 녀석들이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에 열을 올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건우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마침내 도착한 병원.
세계 초일류 병원답게 엄청난 규모의 병원 건물 앞에 선 중곤과 혜선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 하산병원 규모도 엄청난데 여긴 정말…….”
“하하…… 우리 병원 다섯 개쯤 합쳐놓은 것 같네…….”
티는 안 내고 있지만 건우도 무척 놀라고 있다. 이게 병원이야, 백화점이야? 변두리도 아니고 시내 한가운데 이만한 규모의 병원을 지으려면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 걸까? 땅값만 해도 천문학적일 것 같다.
그때 병원 문이 열리며 지난번 하산병원에서 봤던 금발 머리 50대 의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온다.
“Dr. Morgan! 정말 와주셨군요!”
젠장, 이 새끼야 내 이름은 모건이 아니라 모건우라고. 멀리서부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고 오는 의사가 건우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말했다.
“저 Dr. 브랜든 데스트(Brenden Dest)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예.”
“하하! 초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혜선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곤에게 속삭였다.
“하산병원에서 요청해서 파견 온 게 아니라, 이쪽 요청이었어요?”
중곤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런 것 같지? 캬, 역시 모건우 선생님이셔. MGH에서 먼저 초청을 하다니.”
브랜든이 중곤과 혜선에게도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나눈다.
“그럼 킴, 정도 같이 들어가시죠. 병원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브랜든의 안내를 받으며 구경하는 병원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엄청났다.
브랜든이 웃으며 병원을 소개한다.
“연간 입원 환자 4만 5,359명, 899개의 병상, 3,065명의 의사, 3,409명의 간호사가 있습니다. 연간 3만 4,952건의 수술을 하는 병원이 바로 MGH입니다.”
혜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우에게 얼른 가자는 듯 재촉하는 브랜든의 눈치를 본 혜선이 중곤에게 말했다.
“병원 규모에 비해 병상이 너무 적지 않아요? 하산병원 병상이 얼마였죠?”
“음, 2,715개.”
“뭐야, 우리 병원이 세 배는 더 많아요? 게다가 수술 실적도 좀 이상한데. 우리 병원 작년 수술 실적이 6만 건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작년에 66,838건이었어.”
“음, 우리 병원 외래진료 건수가 연간 80만이 넘는데. 여긴 왜 이럴까요?”
“미국과 한국의 의료 체계는 달라. 선진 의료를 시행하긴 하지만 의료보험은 한국이 훨씬 앞서 있거든. 비싼 진료비도 문제지만, 진료를 받기 위해 예약을 하면 몇 개월 기다리는 건 기본이야.”
“음, 한국이 더 좋네요, 그건.”
“일장일단이 있지.”
“어떤 면이요?”
중곤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단 미국 의사들은 약 처방에 아주 인색해. 웬만해선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처방을 내주질 않지.”
“많이 아파도요?”
“약을 먹어야 낫는 병에만 처방해. 해열제 같은 간단한 게 아니면 처방받기 힘들어.”
“그래도 돼요?”
“그편이 나아. 아픈 환자 입장에선 답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약은 내성이 생기니까. 최대한 먹지 않는 편이 좋거든.”
“오, 그런 면도 있군요.”
“그것뿐이 아니야. 한국의 외래진료 시스템을 보면 의사가 한 환자에게 할애하는 시간은 평균 2분 내외야. 너도 어릴 때 병원 가 봐서 알겠지만 의사를 기다렸다 만나면 간단히 몇 가지 사항을 묻고, 청진이나 해본 후에 약 줄 테니 가라고 하잖아.”
“보통 그렇죠?”
“하지만 미국은 아냐. 의사 만나기가 힘들긴 하지만 의사가 외래진료를 온 환자에게 할당하는 시간은 평균 33분이래.”
“헐, 그렇게 길게 봐요?”
“만나기 어려운 대신 꼼꼼하게 봐주는 거지.”
“와…… 그래서 진료 수가 적구나.”
“그래, 그러니 단순히 단점으로만 봐서 될 일이 아니란 거야.”
“대단하네요.”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는 두 사람의 고막을 때리는 한국어 외침.
“야 이놈들아! 놀러 왔어?”
건우의 고함에 놀란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뛰어간다. 수평적 사회에서 자란 브랜든은 동료 의사에게 고함을 지르는 건우에게 살짝 놀랐지만 동양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지 그저 웃는다.
“자, 여긴 입원 병동입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중곤과 혜선을 째려본 건우가 입원실 내부를 본다.
확실히 한국과 다르다. 물론 6인실부터 있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저 하얀 페인트를 칠하고 병상마다 커튼 정도가 있는 한국의 입원실에 비해 따뜻한 우드 톤의 인테리어와 편한 병상 매트리스 등은 배워야 할 점으로 보인다.
물론 저것도 다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참 병실을 돌아보던 혜선이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보인다. 또 뭐냐? 건우가 물끄러미 보자, 혜선이 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서, 선생님.”
“뭐.”
“저기.”
“빨리 말해.”
“화장실 좀.”
하, 가지가지 한다. 그래, 요즘 군대 훈련소에서 화장실 가는 것도 제한한다고 말이 많던데 나까지 그럴 순 없지.
중곤이 이때가 기회라는 듯 끼어든다.
“저기, 저도. 비행기에서 커피를 하도 많이 마셔서요.”
브랜든에게 화장실 위치를 물어본 건우가 고갯짓한다.
“다녀와.”
“죄송합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바람처럼 달려가는 것을 지켜보던 건우가 다시 입원실을 돌아보다 1인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음, 1인실은 하산병원 쪽이 좋다. 하산병원 1인실은 한쪽 벽이 거대한 통유리 창문이다. 그곳을 통해 탁 트인 한강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 병원은 그렇지 못하다. 단지 환자의 자유도가 보장될 뿐 6인실에 비해 넓어 보이지도 않는다.
하산병원과 MGH를 비교해 가며 입원실을 둘러보던 건우가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브랜든이 갑자기 멈춘 건우를 뒤늦게 발견하고 다시 돌아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Dr. Morgan?”
가만히 입원실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건우. 브랜든은 그가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다 멈칫한다. 건우의 표정과 태도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왼쪽 가슴을 만지는 건우.
브랜든이 건우의 이상행동을 살피며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Dr. Morgan? 혹시 지병이 있으십니까?”
“…….”
말없이 급히 주머니를 뒤져 막대사탕을 꺼내 입에 무는 건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건우를 관찰하던 브랜든이 그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입원실을 확인한다.
아까부터 떨어지지 않는 건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1인실.
환자 외엔 보호자도 없는 외로워 보이는 병실에 20대 초반의 금발 여성이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그저 수많은 환자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이런 걸까?
가슴이 너무 아파온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왔는데. 저 여잔 혼자 있어서? 아니다, 그런 환자들도 몇 봤다. 하지만 심장이 저린 느낌은 없었다.
‘혜영 이모. 갑자기 왜 이래요?’
금발 여성 환자를 바라보던 건우가 입원실 앞에 쓰여 있는 환자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눈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굳어 있는 건우를 바라본 브랜든이 낮은 어조로 말했다.
“20세 환자, 로즈 램지(Rose Ramsey)입니다.”
브랜든이 환자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닥터 레인홀드 램지(Reinhold Ramsey)의 딸입니다.”
건우의 심장이 찢어질 듯 빠르게 뛴다. 어느새 축축하게 젖은 주먹을 편 건우가 잘게 떨리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