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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프랑켄슈타인-89화 (89/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89화

9. 상식이 상실된 시대(2)

굳이 오지선까지 불러 마취할 환자는 아니었기에 AN(마취과)에 연락해 척추마취를 진행 중인 수술실.

조금 떨어진 모니터링 회의실에 서서 좀 전에 진행한 초음파 검사 결과를 건우와 함께 바라보고 있던 중곤이 필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ultrasonic(초음파) 검사를 보면 우측 gluteal(둔부) hypoderm(피하조직)에 abscess(농양)가 있는 sihlouette(음영)가 보입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고통스러웠겠네요. hamsring(넓적다리 뒤 근육)까지 영향을 줬을 것 같습니다.”

건우는 말없이 필름을 바라보기만 한다. 중곤이 다시 필름의 여기저기 하얀 부분으로 표기된 선들을 가리켰다.

“이게 다 절개한 흉터 같은데 적어도 6회 이상 같은 수술을 받은 모양입니다.”

상당히 괴로웠을 것이다. 화농성 한선염, 또는 화농 땀샘염은 피부 아래 자리 잡은 작고 아픈 종양을 의미하는 만성 피부질환이다.

‘전위 여드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사실 여드름은 아니다.

화농성 한선염은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엉덩이, 유방 아래 등 피부와 피부가 만나는 곳에서 주로 발생하며 심한 재발성 종양과 결절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완치될 수 없는 질환이기도 하다.

중곤이 턱을 쓸며 말했다.

“일반적인 원인은 staphylococcal infection(포도상구균감염)인데. 아무래도 절개 후에 exudate(삼출물) 배양검사 해야겠죠?”

건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glandula thyroidea(갑상선)도 검사 예약해 놔.”

“예, 선생님. 수술 후에 진행하겠습니다.”

건우가 필름을 노려보다 다시 으르렁거린다.

“생 양아치 새끼들.”

중곤이 움찔 놀란다.

“예?”

“중곤아.”

“예, 선생님.”

“너 연성대학병원 레지던트 시절에 이런 환자들 내원하면 입원시켰냐?”

“…….”

“했어?”

“예…… 상부 지시라.”

“무슨 지시였는데?”

“1일 1회 이상, 3일 이상 드레싱해야 하는 환자는 입원시키라는 지시였습니다.”

“미친.”

“…….”

“아주 환자들 등골 뽑아 먹으려고 작정을 했지, 아주 그냥.”

“죄송합니다.”

“너 말고 인마.”

“…….”

중곤이 뭘 알겠는가? 고작 레지던트 2년 차가 병원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했겠지.

필름을 노려보던 건우가 몸을 돌려 수술실로 향했다. 뒤따르는 중곤을 힐끔 본 건우가 말했다.

“가서 갑상선 검사 예약해. 간단한 수술이라 보조 필요 없어.”

“예…….”

괜히 눈치를 보는 중곤이 뒷걸음질을 쳐 사라지자, 폐부에서 나오는 한숨을 내쉬는 건우.

수술실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자 오빠를 기다리는 민서가 수술실 입구 벤치에 앉아 있다 발딱 일어나 달려온다.

“선생님, 오래 걸릴까요?”

“아니.”

“몇 시간이나 걸려요?”

“10분.”

“예? 그렇게 짧아요?”

“그러게. 그렇게 짧은데 왜 입원을 했냐, 미련하게.”

“…….”

“마취 풀리는 시간이랑 검사 시간까지 다 해도 저녁 먹기 전에 집에 보내준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굳건한 어투로 말하는 건우. 뭔지 모를 믿음이 생긴 민서가 살짝 웃음 짓는다.

건우가 그런 민서를 스쳐 지나가며 수술실 문 버튼을 발로 누른다.

“내려가서 밥이나 먹고 있어. 그래도 마취 깨는 데까진 시간 좀 걸리니까. 두 시간 후쯤 오면 돼.”

“여기로요?”

“아니, 응급실로.”

“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 * *

10분 후 수술실 문이 열리고 수술복 차림으로 나오는 건우. 너무나 간단한 수술이었기에 은비나 지선을 부르지 않은 건우는 절개 후 농양을 배출, 소독까지 5분가량이 걸렸다.

혹시 농이 계속 배출될 수 있어 봉합하지 않고 절개 부위를 열어두고 나왔기에 더 빨리 수술을 마친 건우가 마스크를 벗어 쓰레기통에 넣고 있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건다.

“저…….”

뭐냐, 또. 건우가 돌아보자 특유의 무신경하고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남자가 움찔 놀란다. 어라, 어디서 본 사람인데. 요즘 기억력이 왜 이러지?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가 보인다.

“예, 무슨 일이십니까?”

“아…… 혹시 저 기억 안 나십니까? 연희 맞은편에 있던 환자인데.”

“아.”

기억났다. 연희와 놀아주러 갈 때마다 뭔가 변태같이 흐뭇한 눈길로 한참 바라보던 그 아저씨. 꽤 오래 안 보이길래 퇴원한 줄 알았는데.

“안과 찾으십니까? 외래는 이쪽 아닌데요.”

박창욱 기자가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아, 외래는 이미 봤습니다. 이거 제 명함입니다.”

뭐야, 명함은 왜 주고 그래? 일단 주니까 받긴 한 건우가 명함을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제게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하하, 성격 참 급하시네요.”

“예, 급한 편이니 빨리 이야기하시죠.”

연희를 대할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건우. 하지만 박창욱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건우가 얼마나 연희를 지극정성으로 대했는지 보았기에 호감을 거두지 않고 말했다.

“혹시 제 기사 보셨습니까?”

기사? 설마, 이 자식이 사람 얼굴에 금칠을 한 그 창피한 기사를 썼던 기자란 말인가?

얼른 주머니에서 명함을 다시 꺼내본 건우가 인상을 썼다.

“한국일보 박창욱 기자?”

“예, 맞습니다.”

확 명함을 구겨 버릴 뻔했다. 그것 때문에 말년 할머니에게도 한참 놀림을 당했었으니까.

건우가 박창욱을 째려보며 다시 명함을 주머니에 넣는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기사를 쓰시죠, 그런 거 누가 궁금해한다고.”

박창욱이 무슨 말이냐는 듯 핸드폰을 보여준다.

“기사 제대로 안 보셨군요? 이것 보세요. 조회수가 100만이 넘었습니다. Like도 50만이 넘고 코멘트에 선생님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십니까.”

건우의 얼굴이 붉어진다. 젠장, 그러니까 난 이런 거 알리고 싶지가 않다니까 이 아저씨가. 그따위 기사를 100만 명이나 보다니. 볼 기사가 그렇게 없었냐?

“별로 관심 없습니다. 인터뷰 같은 건 안 하니까 헛수고하지 마시고 볼일 다 보셨으면 그만 가시죠.”

건우가 몸을 돌리자, 뒤에 있던 박창욱이 나직하게 말했다.

“연성대학병원에서 제게 약을 쳤습니다.”

걸어가던 건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박창욱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웃는다.

“이제 관심이 좀 가십니까?”

건우가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돌아본다.

“뭐라고요?”

박창욱이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말했다.

“이거, 이거 준다고 하더라고요.”

이 새끼가 지금 뇌물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 거야, 뭐야? 확 녹음했다가 다른 기자한테 넘겨 버린다?

건우의 얼굴이 흉악해지자 박창욱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말했다.

“오해는 마세요. 약을 줬다고 받아먹은 건 아니니까.”

건우의 표정이 기이해진다. 뭐 하자는 거야, 이거?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십니까?”

“연성대학병원 출신이시죠?”

“뒷조사하셨습니까?”

“부인은 하지 않죠, 이게 제 직업이라.”

“…….”

“잠깐 조용히 이야기 좀 하시죠.”

솔직히 시간 내기 싫다. 기자란 족속들과 엮이면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박창욱은 내키지 않아 하는 건우의 얼굴을 살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선생님 띄워주기 할 생각도 없고요.”

“그럼요?”

박창욱이 수첩을 꺼내며 말했다.

“이번 일 때문에 조사를 좀 했더니 연성대학병원 비리가 심각하더군요. 한번 파보려고 합니다.”

음? 갑자기 귀찮은 똥파리가 사람처럼 보이는 건 착각일까? 역시 세상에 나쁜 의사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자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돈도 안 받았다잖아?

건우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본 박창욱이 실소를 지었다.

“참 기분 파악이 쉬운 분이군요. 표정 관리 못 하신다는 이야기 많이 들으시죠?”

“뭐…… 많이 듣긴 합니다.”

“하하, 시간 많이 안 뺏겠습니다. 연성대학병원 시절도 좋고, 이 병원에서 겪은 일도 좋습니다. 병원 비리나 환자를 위한 의료 서비스가 아닌 부조리한 행위들을 알고 계시다면 말씀 좀 부탁드리죠.”

에…… 뭐가 있더라? 그래, 연성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이야기. 힘줄도 끊어지지 않은 환자를 굳이 수술실로 데려가 치료받게 하고 치료비를 몇 배로 뻥튀기해 뜯어낸 그 이야기랑…… 아, 민서 오빠 이야기도 하면 되겠다.

가만, 근데 이 새끼는 뭔데 손도 안 대고 코 풀려는 거야? 가만 앉아서 남의 이야기 듣고 그대로 기사 쓰겠다는 거잖아? 날강도네, 이거?

또다시 바뀌는 건우의 표정을 관찰하며 웃음이 터진 박창욱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기자면 자기가 알아낼 것이지 왜 나한테 고자질시키냐는 생각 하셨죠?”

움찔 놀라는 건우. 뭐냐, 이 새끼는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가? 박창욱이 다시 웃음 짓는다.

“표정 관리 좀 하시라니까 그러시네, 하하. 이야기해 주긴 싫으신 모양입니다? 그럼 제가 알아내죠. 방금 선생님 표정에서 뭔가 많은 일이 있다는 건 눈치챘거든요. 그 정도도 제겐 충분히 큰 수확입니다.”

박창욱이 자신의 명함이 들어간 건우의 주머니를 눈짓하며 말했다.

“언론의 도움이 필요하실 순간이 있을 겁니다. 명함 버리지 마시고 그때 제게 연락 주세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날 왜 돕냐고? 울 엄마가 무턱대고 도와준다는 인간들 태반이 사기꾼이라고 했어. 언제 봤다고 도와준다는 거냐?

건우의 미심쩍은 표정에 실소를 지은 박창욱이 수첩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상식이 상실된 시대에 진짜 의사가 있다는 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드는 게 생기면 지키고 싶어지는 법이죠. 그럼 실례 많았습니다, 선생님.”

허리를 꾸벅 숙인 박창욱이 자기 갈 길을 가자 물끄러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건우. 방금 뭐가 지나간 거냐, 도대체. 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버리네.

멀뚱히 멀어지는 박창욱을 바라보고 있는 건우의 등을 누군가가 툭 건드렸다.

건우가 뒤를 돌아보자 민서와 함께 무릉도원 병원에 왔던 여고생이 특유의 발랄한 웃음을 잔뜩 머금고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선생님!”

건우가 인상을 구겼다.

“넌 왜 왔냐, 또 어디 아프냐?”

“하하, 아뇨. 민서가 오빠 병원 데리고 왔다고 하길래 저도 오빠 보려고 오는 길이었는데 여기 선생님 계시단 소리 듣고 뛰어왔죠. 저 기억하시는구나, 다솔이! 기억하죠?”

네 이름을 굳이 머리에 넣고 싶진 않아. 답을 하지 않은 건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민서 아까 밥 먹으러 갔다.”

“알아요.”

“아픈 곳 없으면 같이 밥 먹고 와. 정민준 환자 마취 깨려면 좀 걸려.”

“같이 안 드실래요?”

“싫어.”

“왜요?”

“밥해줄 거야?”

“아뇨? 여기 식당 있잖아요?”

“돈 주고 사 먹는데 왜 남이랑 먹어야 되냐, 귀찮게. 얻어먹으면 할 수 없지만.”

“…….”

황당한 대화법에 말을 잃은 다솔이 어느 순간 웃음을 터뜨린다.

“하하!! 여전하시네요, 선생님.”

“사람은 원래 여전한 게 좋은 거다.”

“히히, 그건 맞아요. 근데 선생님. 민준 오빠 진짜 입원 안 해도 돼요?”

“어.”

“왜 다른 병원에선 맨날 입원하라고 했을까요?”

“도둑놈들이니까.”

“에? 큰 병원이었는데요?”

건우가 인상을 구겼다.

“척추마취 끝나면 보행 가능하다. 뭣 하러 입원을 시켜?”

다솔이 이상하다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민준 오빠 원래 수술 끝나면 입원해서 링거도 맞고 그랬는데.”

건우가 더욱 인상을 구긴다.

“링거까지 맞았냐?”

“네.”

“금식이 필요 없는 환자인데 밥 잘 처먹으면 됐지, 링거는 왜 맞히는 거야, 미친 새끼들.”

욕을 하며 머리를 벅벅 긁은 건우가 얼른 민서나 만나러 가라는 듯 손짓하며 걸어가자,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솔이 혀를 빼물며 웃는다.

“하여간 재미있는 선생님이라니까, 히히.”

그만 민서에게로 가려던 다솔이 몸을 돌렸다가 자신의 바로 뒤에 있는 낯선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세요?”

다솔의 뒤에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던 남자가 명함을 내밀며 씩 웃는다.

“한국일보 박창욱 기자라고 합니다. 방금 그 이야기 자세히 좀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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