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86화 (86/230)

닥터 프랑켄슈타인 86화

8. 암흑과 침묵의 바다(10)

며칠 후 수술실.

수술복을 입고 대기 중인 연희가 자신 곁으로 온 안경 쓴 여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 그녀가 수화를 해온다.

‘안녕?’

‘안녕하세요.’

‘난 마취과 의사 오지선이야.’

‘아, 최고 능력자 팀?’

‘응?’

‘모건우 선생님이 그랬어요.’

살짝 놀라다 어느새 무척 기분이 좋아진 얼굴이 된 지선이 수화를 한다.

‘진짜? 모건우 선생님이 그런 말을 했어?’

옆에서 수술 도구 준비를 하던 간호사가 얼굴을 내민다. 이 사람도 수화를 할 줄 아는지 말을 걸어온다.

‘모건우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데, 정말이야?’

‘수술 간호사 언니인가요?’

‘응, 맞아. 이은비야.’

‘아! 언니도 이야기했어요. 최고의 수술 간호사라고 했어요.’

은비의 얼굴이 확 밝아지며 지선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활짝 웃는 은비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수술실 정비 중인 지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혹시 저 언니 이야긴 안 했어?’

‘누군데요?’

‘회복 간호사야. 원래는 응급실 소속이고.’

‘아! 했어요. 최강의 회복 간호사!’

지선과 은비가 밝게 웃으며 멀리 떨어진 지수에게 말을 전하자,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인다. 모두 다 좋은 사람들인가 보다.

오지선이 수화로 말했다.

‘연희는 전신마취가 아니라 척추마취라서 하반신에만 감각이 없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

‘기절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응, 감각은 없지만 수술 중에 의식이 있을 거야.’

잠시 생각해 보다 얼굴을 붉힌 연희가 조심스럽게 수화를 한다.

‘그, 그럼 모건우 선생님이 제 엉덩이 보는 걸 제가 다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

지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은비도 재미있는지 깔깔 웃다가 수화를 한다.

‘모건우 선생님은 의사야. 연희는 환자잖아. 부끄러워하면 안 돼, 알았지?’

‘네…….’

지선이 주사기를 준비하며 수화를 한다.

‘자, 그럼 이제 마취할게. 척추마취는 연희가 도와줘야 해, 그래 줄 거지?’

뭘 도와야 하는지 모르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연희. 지선이 연희의 팔을 잡고 끌어 올리며 수화를 한다.

‘자, 새우등 자세 알지? 옆으로 누워서 등을 좀 구부려 줄래?’

시키는 대로 자세를 취하자, 몇 번 자세를 바꿔주는 지선. 잠시 후 허리 부근에 약간 차가운 느낌이 난다.

허리뿐 아니라 등 전체에 소독약을 골고루 바른 지선이 연희의 앞으로 돌아와 수화를 한다.

‘이제 마취 들어갈 건데. 척추마취는 조금 아프거든? 그래도 걱정 마, 언니가 우리 연희 안 아프게 국소마취부터 좀 할게. 아주 살짝 따끔할 거니 놀라지 말고.’

약간 긴장했지만 지선의 말처럼 벌레에 물린 정도의 따끔함이 느껴지고, 조금 얼얼한 감각이 든다. 몇 분을 기다린 후 연희의 허리를 쿡쿡 찌른 지선이 수화를 한다.

‘느껴져?’

‘뭐가 누른다는 느낌은 드는데 얼얼해요.’

‘응, 됐어. 아주 좋아. 그럼 마취 시작할게~’

친절한 선생님이다. 하나하나 과정을 알려주고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해준다. 이래서 최고의 마취 의사라고 했었구나.

척추마취라는 이름도 무서운 주사가 들어왔지만 국소마취 덕분에 전혀 고통이 없다.

차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하반신이 없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쯤 지선과 은비가 연희를 엎드리게 한 뒤, 골반 아래와 발목에 쿠션을 끼워 넣었다.

허리 부근에 커튼을 설치한 오지선이 모니터를 끌고 와 연희의 얼굴 앞에 앉아서 수화를 건다.

‘연희는 이제부터 움직이면 안 되니까 수화는 하지 말고. 언니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 테니 지켜만 봐 줄래? 연희 모건우 선생님 이야기 좋아하지? 건우 쌤이 시골 병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말이지…….’

그때 연희의 뒤쪽에서 수술실 문이 열리며 건우와 중곤이 수술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연희와 눈을 마주치던 지선이 슬쩍 눈빛을 주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얼른 건우에게 붙는다.

지수가 차트를 넘겨주며 말했다.

“thrombotic(혈전성) hemorrhoid(치핵)이고, 현재 탈출된 상태라고 해요, 선생님.”

은비가 수술 장갑을 끼워주자, 건우가 지선 쪽을 보며 말했다.

“10분만 끌어줘요.”

지선이 답을 하지 않고 슬쩍 고개만 끄덕인다. 연희는 지금 수술 진행 중이란 걸 모르기 때문이다.

연희의 질병은 1~2기일 경우 30분가량의 간단한 수술로 끝낼 수 있는 단순 질환이다.

그런데 건우는 10분을 언급했다. 하지만 수술실에 있는 누구도 의문을 제시하지 않는다. 건우의 손이 얼마나 빠른지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비가 PA를 보고 있으므로 수술 시간은 더 단축될 것이다.

건우가 시간을 힐끔 보고 말했다.

“시간 기록해 주세요. 지금부터 18세, 최연희 환자의 hemorrhoidectomy(치핵제거술)를 시작합니다. 환자 애프터 라이프를 위해 신체적인 배려보단 정신적인 배려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최대한 빨리 끝냅시다.”

건우가 손을 내밀자, 바로 수처 시저(suture scissors)를 넘겨주는 은비. 중곤도 치핵 겸자를 받아 옆에 붙자, 건우가 말했다.

“forceps(겸자)로 hemorrhoid(치핵) 잡아. 바로 제거한다.”

한편 지선이 해주는 건우의 이야기에 웃고 있는 연희. 지선의 수화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무척 재미있다.

‘건우 쌤이 고양이 좋아하는 거 알아? 웃긴 건 본인이 그걸 숨기고 싶어 한단 거야.’

‘고양이한테 먹이 주다 걸리면 체조하는 척하는 거 얼마나 웃긴 줄 알아?’

‘건우 쌤이 먹는 사탕은 청심환 사탕인데 무지 맛없어. 하나 준다고 하면 거절해.’

‘선생님은 찐빵을 좋아해.’

‘할머니, 할아버지들한테 사족을 못 써. 이상하게 노인에게 약하거든.’

‘의사들 사이에선 악마로 통해. 무지무지 무섭게 굴어. 응급실에선 건우 쌤 얼굴만 봐도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단 의사들도 많아.’

‘환자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천사로 변신하는 사람이야. 보통 때는 맨날 무표정한 얼굴이야. 아마 부끄러워하는 게 아닐까?’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세심한 배려를 해준 모건우 선생님.

연희는 건우와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고 있기에 관심이 간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괴짜라는 생각이 들어 눈웃음이 쉬질 않는다.

그런데 수술은 언제 시작하는 걸까? 마취를 하고 30분은 더 지난 것 같은데. 아, 부끄럽다. 좀 있으면 모건우 선생님이 들어와서 자기 엉덩이를 보며 수술을 하겠지? 얼굴이 너무 빨개질 것 같다.

하도 진지하게 말해서 허락했지만 막상 수술실에 들어오니 긴장된다. 그리고 마취를 했는데 왜 자꾸 엉덩이 쪽이 간질간질하는 걸까? 은비 언니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아까부터 뒤쪽에서 뭔가 바닥에 놓이는 느낌도 나고, 간질간질한 느낌도 난다. 마취가 제대로 된 걸까? 물어보고 싶지만 수화를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얌전히 있는 연희.

그때 한참 수화를 보내던 지선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고개를 숙인다. 연희의 눈에 그녀의 입 모양이 보인다.

“수고하셨습니다, Captain(선장).”

응? 갑자기 언니가 왜 선장이란 말을 하지? 고개를 갸웃거린 연희의 앞에 다시 앉은 지선이 수화를 한다.

‘자, 이제 회복실로 갈 거야. 마취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실로 가면 돼.’

은비와 힘을 합쳐 연희를 바로 눕혀주는 지선. 연희가 의문 섞인 눈빛을 보내다 조심스럽게 수화를 한다.

‘이제 수화해도 돼요?’

‘응, 돼.’

‘수술은 안 해요? 뭐 문제 있어요?’

지선과 은비의 눈이 초승달을 그린다.

‘이미 끝났는데?’

‘에?’

연희가 급히 주변을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건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놀란 연희가 수화를 한다.

‘누가 수술했어요? 모건우 선생님?’

지선이 빙긋 웃으며 수화를 한다.

‘글쎄? 처음 보는 선생님이라 잘 모르겠네.’

연희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차라리 잘됐다. 건우가 수술했다면 엄청 부끄러웠을 것 같다.

자기가 수술할 것처럼 끝까지 놀리더니 뭐야, 결국 다른 선생님이 했네, 뭐.

약간 불만스럽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연희가 회복실로 이송되자, 정리를 하기 위해 남은 은비, 지수, 지선이 서로를 보며 빙긋 웃었다.

두 시간 후, 입원 병동.

회복실에서 돌아온 연희 곁에 있던 어머니가 지수를 보며 물었다.

“수술 잘됐나요?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은데.”

지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깨끗하게 제거했어요. 이제 잘 아물기만 하면 됩니다. 진통제 투여할게요.”

“모건우 선생님이 수술해 주신 거죠?”

지수가 자신의 입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를 힐끔 본 후 슬쩍 입을 가리고 말했다.

“그럼요, 근데 연희한테는 비밀이래요.”

갑자기 입을 가리는 지수 때문에 인상을 쓰고 엄마를 바라보는 연희. 엄마는 그런 딸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잠시 후 중곤과 건우가 입원실로 들어오자, 연희가 괜히 삐친 척을 하며 수화를 한다.

‘뭐야, 선생님이 수술한다고 해놓고.’

중곤은 뭔가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돌리고, 무표정한 건우가 침대로 다가와 수화를 한다.

‘미안, 응급실에 긴급수술이 떨어져서.’

‘긴급수술? 급한 수술이었어요?’

‘어, 심장이 멈춘 환자가 있었어.’

‘헉? 정말이요? 그래서, 그래서?’

건우가 팔에 근육을 불끈 보여주며 수화를 한다.

‘당연히 살렸지. 벌써 퇴원했어.’

‘우와!’

놀라던 연희가 문득 인상을 쓴다.

‘좀 전에 심장이 멈춘 환자가 어떻게 벌써 퇴원해요?’

‘난 슈퍼맨이니까.’

‘거짓말쟁이.’

연희가 놀리지 말라는 눈빛으로 수화를 한다.

‘처음부터 선생님이 수술할 거 아니었으면서 나 놀린 거죠? 나 핸드폰으로 검색해 봤는데 내 질환은 원래 외과의사들이 수술한다고 했어요. 선생님은 응급실 의사잖아.’

‘나 원래 외과의사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의사는 전공대로 환자 받는다고 분명히 써 있었는데.’

‘나 더블보드야.’

‘그게 뭔데요?’

‘전문의 자격증이 두 개라고. 응급의학이랑 일반외과의학.’

‘그런 것도 있어요?’

‘어, 진짜야.’

멀뚱히 서 있는 중곤을 본 연희가 그에게 수화를 한다.

‘진짜 그런 게 있어요?’

중곤이 건우의 눈치를 본 후 더듬더듬 수화를 한다.

‘어, 맞아.’

‘선생님도 더블보드예요?’

‘아니.’

‘선생님은 왜 아닌데요?’

‘한 개 따기도 엄청 어렵거든.’

그제야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건우를 바라보는 연희. 눈빛에 뭔지 모를 존경심까지 떠올라 있다.

‘진짜 심장 멈춘 환자 있었어요?’

‘당연하지.’

거짓말은 아니다. 응급실에 그런 환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들어오니까. 확인은 안 해봤지만 오늘도 왔을 거다. 물론 자신이 맡진 않았지만. 연희는 그런 환자가 있었냐고 물었으니 거짓말한 건 아니지.

건우의 눈빛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한 연희가 콧방귀를 뀌며 수화를 한다.

‘알았어요, 사람 목숨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 이번은 내가 봐줄게요. 근데 또 거짓말하면 안 돼요.’

옆에 서 있던 지수와 눈빛을 교환하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던 어머니의 핸드폰이 울린다. 어머니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웃음을 참다가 얼른 핸드폰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여보세요?”

-아, 어머니. 저 한국일보 박창욱입니다, 기억하시죠? 맞은편에 있던 환자.

“아, 네! 안녕하세요. 기사 잘 봤어요, 기자님.”

-하하, 그게 진실이었는데요, 뭘.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아, 연희 상태가 좀 어떤가 해서요. 후속 기사를 궁금해하는 분들도 많고요.

어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연희! 시력이 돌아왔어요! 본래 입원했던 치핵 수술도 오늘 잘 끝났고요.”

-오! 잘됐네요, 연희 소식 기다리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알려야겠네요. 축하드립니다, 어머니!

“호호, 고마워요.”

-수술할 때 특이 사항은 없었고요?

병실을 돌아본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죠, 모건우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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