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프랑켄슈타인 79화
8. 암흑과 침묵의 바다(3)
건우의 지시로 간호사 스테이션에 들러 안과에 연락을 하고 병실로 돌아오는 복도를 걷고 있는 중곤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문다.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된 조직은 치료를 통해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안과 전문의가 아니더라도 이건 상식이다. 의사가 아닌 일반인도 알고 있는 내용.
건우는 안과에 연락을 하라고만 했지, 시신경을 살릴 수 있단 이야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이유가 아닌 이상 갑자기 안과를 콜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병실 앞에 서서 약 15분가량을 기다리자, 안과 교수가 부교수와 레지던트들을 대동하고 입원실로 오는 것이 보인다.
얼른 가서 허리를 숙인 중곤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EM(응급의학과) 레지던트 김중곤입니다.”
안과 교수답게 자기 시력 관리를 잘하는지, 중년에도 안경을 쓰지 않은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EM? 응급실 연락이 아니었는데.”
교수가 확인해 보라는 듯 부교수에게 눈짓하자, 중곤이 만류한다.
“입원 병동에서 연락드린 것이 맞습니다. 보여드릴 환자가 있어서 모건우 부교수 지시로 연락드린 겁니다.”
교수가 눈썹을 꿈틀한다.
“모건우 부교수라면 이번에 영입했다던 그 의사 말이군요.”
“예, 교수님.”
“잘됐네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의사라고 해서 한번 보고 싶었는데. 갑시다.”
중곤이 안내를 해 도착한 입원실.
안과 교수를 중심으로 열 명이 넘는 의사들이 들어오자, 환자들이 놀란 얼굴을 한다. 회진 시간도 아닌데 대규모 의사 부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희의 손을 잡고 있던 건우가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우를 물끄러미 본 교수가 악수를 청한다.
“나 OPH(안과) 김용희 교수요.”
“모건우입니다.”
김용희 교수가 누워 있는 연희를 눈짓하며 말했다.
“이 환잡니까?”
“예, 교수님.”
“어디 좀 봅시다.”
김용희 교수가 연희의 침대에 앉으며 말했다.
“자, 환자분? 잠깐 눈 좀 보겠습니다.”
김용희가 연희의 얼굴에 손을 뻗으려는 찰나, 건우가 재빨리 말했다.
“다중 장애 환잡니다. hearing defect(청각장애), visual disturbance(시각장애), language disorder(언어장애)가 있습니다.”
연희의 턱을 잡으려 하던 김용희 교수가 멈칫한다. 환자가 진료 중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함부로 몸에 손을 대면 놀랄 수 있기 때문이다.
“에…… 내가 수화는 할 줄 아는데…….”
연희도 선천적인 청각장애가 있었으니 수화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수화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건우가 연희의 손바닥에 다시 글을 쓴다.
‘연희야, 안과 교수님이 오셨어. 잠깐 눈 좀 보여줄래?’
연희가 멈칫하다 허공을 보며 수화를 한다.
‘왜요? 저 이제 눈 안 보인다고 했어요. 영원히 못 볼 거라고 했는데.’
건우가 손바닥에 글을 쓴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는 것뿐이야, 놀라지 말라고 미리 말해주는 거고.’
연희가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건우가 물러나며 말했다.
“이제 보시죠.”
김용희는 건우가 연희와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씩 웃었다.
“멋진 선생이로구먼. 장진규 내과 과장님이 칭찬할 만해.“
김용희가 연희의 턱을 살짝 붙잡고 눈을 본다. 부교수가 넘겨준 플래시를 비춰본 김용희가 말했다.
“모건우 부교수.”
“예, 교수님.”
“시신경이 뭐라고 생각하나?”
“시신경은 빛을 감지하는 각막의 신경세포에서 얻은 시각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눈의 ‘데이터 케이블’이라고 배웠습니다.”
“음, 제대로 배웠군.”
플래시를 비춰보던 김용희가 연희 턱을 놓으며 말했다.
“시신경은 전선 다발과 같이 각각의 각막 신경절 세포에서 뻗어 나오는 약 100만 개 이상의 axon(축삭돌기)으로 구성돼 있네. glaucoma(녹내장)와 같은 여러 시각 질환들은 이들 axon을 파괴하거나 손상시켜 시력 손상을 일으키는 것이지.”
김용희가 중곤의 옆에 서 있는 연희 어머니를 힐끔 본 후 일어났다.
“잠깐 밖에서 이야기하지.”
보호자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주거나, 필요 이상의 실망을 주는 건 옳지 않다. 이런 이야긴 밖에서 하는 것이 옳다.
건우를 데리고 나간 김용희가 복도에서 물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성인들은 axon(축삭돌기)이 스스로 재생되지 않아. 시각 질환으로 인한 시력 상실은 통상 영구적인 것으로 간주돼. 모르지 않겠지?”
“예, 교수님.”
“환자 나이가 18세라고 해도 재생은 어려울 정도로 glaucoma(녹내장)가 번졌네. 저런 상태면 어려워.”
김용희가 안과 부교수에게 눈짓하자, 그가 나서며 말했다.
“미리 환자 기록을 확인했습니다만, 1차 진료 병원인 연성대학병원에서 점안 마취제 및 플루오레신 염색약을 이용한 골드만 압평안압(정밀안압)을 측정, 치료 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확인을 마쳤습니다.”
김용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들었나?”
하지만 건우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SS-OCT(파장가변 빛 간섭단층촬영)를 해보고 싶습니다.”
김용희가 살짝 인상을 쓴다. 잠시 건우를 바라보던 그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장진규 내과 과장님은 내 은사님이시네. 그분이 칭찬하셨던 자네에게 난 호의를 가지고 있지. 지금부터 하는 말은 호의에 비롯한 말이니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듣게.”
“예, 교수님.”
“자네, 안과 전문의인가?”
“아닙니다.”
“그럼 무얼 근거로 그 비싼 검사를 돌리자고 하는 건가?”
“…….”
“보호자 허락은 받았나? 해보겠다고 하던가?”
“…….”
“검사 비용은 보호자가 부담해야 해. 우리 병원은 필요하지 않은 검사를 돌려 환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병원이 아니네.”
망할,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제 왼쪽 눈깔은 사람 질병을 꿰뚫어 봅니다’라고 했다간 정신병동으로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자신의 눈엔 분명히 보이니까. 가만히 고민하는 건우의 태도를 반성으로 받아들인 김용희 교수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최소한 보호자 허락이라도 받고 다시 이야기하세.”
안과 소속 의사들이 김용희 교수를 따라 발길을 돌리자, 숨도 못 쉬고 있던 중곤이 마른 숨을 토해낸다.
“후, 오줌 마려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건우가 중곤을 째려본다. 나도 네놈처럼 아는 게 없었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다, 이놈아. 중곤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괜한 희망을 가지실지도 모릅니다.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나중에 원망을 받을 수도 있고, 검사 비용을 못 내겠다고 할 수도 있는데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건우가 자신의 왼쪽 눈을 만졌다. 감은 눈 위로 느껴지는 동공의 움직임. 무릉도원 병원에서 겪었던 이 눈의 힘은 아직까지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다.
건우가 천천히 손을 내리며 병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어머니를 설득한다.”
중곤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건우 뒤를 따라간다.
“서, 선생님! 오자마자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한 시간 후, 장진규 내과 과장의 방.
오랜만에 방문한 친한 후배인 김용희와 차를 나누며 건우 이야길 듣고 있던 장진규가 미소를 짓는다.
“그런 일이 있었나?”
“예, 선배님.”
“음, 그 친구가 헛소릴 할 사람은 아닌데.”
“저도 선배님께 하도 귀에 못이 박히게 칭찬을 들어 그런지 평소와 달리 친절하게 설명하게 되더군요.”
“허허, 그건 고맙군그래.”
김용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최연희 환자. 참 안타깝더군요. 어린 나이에 세 가지나 장애를 짊어지고 살다니. 하늘이 무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진규도 안타까운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래, 나도 성연호 센터장이 모 선생 부탁으로 받은 환자라고 하길래 가서 보고 놀랐네. hemorrhoid(치핵)야 큰 질병이라 볼 수 없으니 간단한 수술만 하면 치료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예후 관리야. 의사 표현이 어렵다는 건 환자 본인에게도 괴롭고, 치료를 하는 의료진들도 괴로운 일이니까.”
김용희가 짧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환자 상태가 하도 딱해서 저도 측은지심이 드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검사를 돌릴 순 없었습니다.”
“이해하네. 그래서 이제 어쩔 건가?”
“하하, 혹시 모 선생이 보호자를 설득한다면 해봐야죠. 다른 병원이 포기했다고 해서 우리도 미리 포기할 순 없지 않습니까?”
장진규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자네 말이야.”
“예?”
“만약 최연희 환자가 안과 외래진료로 왔다면 어쨌을 건가? 연성대학병원에서 검사한 기록을 가지고 왔다고 가정한다면.”
김용희가 잠시 생각해 본 후 배시시 웃는다.
“다시 검사해 보겠지요.”
장진규가 소파 팔걸이를 치며 웃는다.
“허허, 이 사람. 이제 보니 모 선생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이구먼?”
김용희가 웃으며 말을 받는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시진을 해본 결과 녹내장으로 인한 central visual acuity(중심 시력) 상실이 진행되었습니다. 1차 병원 진단 결과도 있다 보니 저라고 해도 머뭇거리게 될 환자였습니다.”
“음.”
“선배님이 그리 칭찬하시는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아주 약간이지만 질투하는 마음도 좀 있습니다.”
장진규가 웃음을 터뜨린다.
“자네 남성 취향이었나? 이거 미안하군, 난 내 아내밖에 모르는 사람이라서. 하하!”
“짓궂으십니다, 선배님. 하하.”
한참 농을 주고받던 장진규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모건우 선생 말이네.”
“예, 선배님.”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사람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장진규가 무릉도원 병원에 대한 조사 중에 밝혀진 사항들을 설명한다.
말년 할머니의 크론병을 밝혀낸 것이나, 시진만으로 직장암을 의심해 검사를 돌려 환자를 살려냈다는 이야기들.
사실 장진규도 이 부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부분이다. 그저 어쩌다 보니 그랬겠거니 생각했기에 설명하는 말투도 크게 놀라운 일로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 수술을 직접 보았다.
“정말 빨랐네. 뛰어난 외과의사야. 하지만 단지 그뿐이 아니었네. 나중에 성연호 센터장과 수술 영상을 처음부터 다시 봤지. 그런데 말이네…….”
장영호의 출혈 부위를 단숨에 찾아낸 이야기를 들은 김용희가 놀라며 말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췌두부 후면에 있는 출혈 부위를 보지도 않고 손가락으로 눌러 한 번에 찾아냈단 말씀입니까?”
장진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성 센터장도 크게 놀랐었지.”
김용희는 장진규를 안다. 그는 과장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남에게 친절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퍼주는 부류도 아니다. 이런 사람이 하는 말은 신뢰할 수 있다.
김용희가 다시 건우의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독수리의 눈.”
장진규가 씩 웃으며 말했다.
“독수리의 눈, 섬세한 여성의 손, 사자의 심장. 의사에게 필요한 세 가지지. 어쩌면 그 친구는 독수리의 눈을 가진 의사일지도 모르겠어. 아니, 섬세한 여성의 손도 가졌다 볼 수 있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수술을 할 수 없었을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김용희를 바라본 장진규가 쿠키를 권하며 말했다.
“그러니 그 친구를 한번 믿어보는 것도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