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21화 (21/230)

#제 21 화. 불의(不義)? 불의(不醫) (1)

며칠 후, 응급의료센터.

김중곤이 조금 전 응급으로 들어온 40대 여성 환자를 살피다 옆에서 그의 처치를 보고 배우는 인턴, 정혜선에게 말했다.

“자 이거 봐. 겸자 잡을 때는 엄지와 약지를 링에 넣는 거야. 손가락을 너무 깊게 넣으면 힘은 더 줄 수 있을진 몰라도, 움직임이 불편해, 보이지?”

겸자에 손가락을 깊게 집어 넣고 활동범위가 좁아지는 시범을 보이는 중곤. 정혜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어깨와 팔꿈치를 가리킨다.

“어깨랑 팔꿈치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쥔다, 맞죠?”

중곤이 빙긋 웃었다.

“모 선생님께 배웠구나?”

혜선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네.”

중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환자 처치를 하며 말했다.

“또 뭘 배웠어?”

정혜선이 필기해둔 노트를 펼치며 말했다.

“어젠 I&D(incision & drainage, 절개와 배농)를 배웠어요.”

중곤이 처치 준비를 하다 눈을 깜빡이며, 환자를 바라보았다. 우연일까? 이 환자는 극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항생제 투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피부 농양 때문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 내원한 환자다. I&D OP(수술) 중에는 매우 난이도가 높은 수술이라 반드시 OR(수술실) OP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환자는 그리 심하지 않아 응급실 병상에서 바로 처치 예정이다.

가만히 환자와 혜선을 번갈아 보던 중곤이 고갯짓했다.

“해볼래?

인턴에게 기회를 준다. 후배 입장에선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김중곤은 레지던트 2년 차지만 수술이라곤 아빼 밖에 못해봤다. 후배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황당하다. 정혜선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김중곤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

정혜선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마음은 너무 감사하게 받겠습니다, 선생님.”

중곤이 환자를 눈짓하며 말했다.

“진짜 안 해? 이거 단순 봉합이나 드레싱 아냐. 나중엔 자주 해보게 되겠지만 레지던트 1년 차에도 잘 안 주는 기횐데.”

혜선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모 선생님 지시라서요.”

중곤이 의문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모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혜선은 자신이 인턴임을 눈치채고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여성 환자를 보았다. 자신의 어머니뻘 되는 환자는 고통 때문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혜선이 다시 중곤을 보며 말했다.

“환자의 몸은 잘못 쓰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되는 노트가 아니다. 더 많은 환자를 살리겠다고 눈 앞의 환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의사가 아니다. 스스로 확신이 있을 때까지 누가 기회를 준다 해도 함부로 환자의 몸을 실험대에 올리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중곤이 말을 잃었다.

“…………………….”

다시 환자를 보는 중곤의 눈이 커진다. 방금 까지도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꼭 쥐고 있던 아주머니가 몸에 힘을 풀고 안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혜선 역시 그 모습을 보곤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모 선생님이.”

메스를 든 중곤이 슬쩍 미소를 짓는다.

“좋아, 그럼 옆에서 지켜 봐. 배우긴 배웠지? 뭐가 필요한진 다 알아?”

“네, I&D(농양 절개 배농술)의 기본 준비는 syringe(주사기), mes, Betadine(소독약), lidocaine(국소 마취제), 구멍포, 소독장갑입니다.”

“좋아, 간호사님들께 준비 요청해.”

“네, 선생님.”

쪼르르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가는 혜선의 뒷모습은 어쩐지 신이 나 보인다. 꼭 주인에게 칭찬 받은 강아지 같이 폴짝폴짝 뛰어가는 혜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멋진 사람이다.’

건우에 대해 생각하는 중곤. 갑자기 나타나 병원 관계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더니 출근 열흘도 안 되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리도 많이 생산해낸 이상한 의사. 절개할 부분을 소독하기 시작하는 중곤이 건우를 생각하다,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 선생님이 직접 처치하시는 건 한번도 못 봤네?’

건우는 환자를 살피고, 필요한 검사와 타 과로의 시프트 지시만 한다. 단 한번도 간단한 절개나, 드레싱을 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생각에 잠겨 소독을 하던 중곤이 실소를 지었다.

‘그런 실력인 분이 처치 실력이 없을 리 없잖아? 너무 하찮은 일이니 우리한테만 맡기신 거겠지.’

혜선이 지수에게 부탁을 했는지 두 사람이 함께 온다. 필요한 물건들을 트레이에 올려 가져온 지수가 cotton ball(솜 뭉치)과 saline(식염수)를 tourniquet(지혈대) 위에 올리며 말했다.

“이게 빠졌더군요.”

중곤이 눈웃음을 지으며 답한다.

“지수 쌤이 어련히 챙겨주실 거라 믿었죠, 하하.”

혜선은 둘의 대화를 듣고 자신이 빠뜨린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 혜선이 귀엽다는 듯 물끄러미 보던 중곤이 지수에게 물었다.

“모 선생님은요?”

지수가 처치준비를 하며 말을 받는다.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Off 래요?”

“아뇨, 오늘 홍보실에서 요청한 TV프로그램 녹화하러 간다고 하셨어요.”

“오, 모 선생님 TV에 나오시는 겁니까?”

“듣기론 프로그램 몇 개쯤 하시는 모양이에요.”

“하하, 지금도 외래 쪽에서 현수막에 그려진 선생님이 진료해주시면 안 되냐고 묻는 환자들 많다던데. 더 심해지겠네요.”

“그러게요, 하하.”

“자, 그럼 시작하시죠. 혜선이는 옆에서 잘 보고. 메스는 11번을 쓰는 거야, lidocaine(국소 마취제) 주입할 땐 절대 농양 안으로 주입해선 안 되니까 주의하고.”

중곤의 시범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혜선이다.

**

오후 여섯 시.

택시에서 말끔한 검은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가 내리자, 지나던 환자와 보호자들이 힐끔 본다. 잘 생긴 외모에 메이크업까지 한 것으로 보아 혹시 연예인인가 해서 봤지만, 만약 그랬다면 저렇게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을 짓고 있진 않을 것이다.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촬영을 마치고 병원으로 복귀한 건우다.

“젠장, 이게 뭔 광대 짓이냐고. 하…….”

시리아에서 포로로 잡힌 후에도 의사로서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치료에 매진했다는 식의 띄워주기 방송. 사실 띄워주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지만 이건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의사는 닥터 카터였다. 자신은 2년 내내 누워 있거나, 혹은 재활 치료만 했다.

하지도 않은 의료행위에 대해 말하는 사회자에게 나는 그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옳다.

그러나 녹화 중에 사회자의 말에 반박하자,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PD를 보는 사회자. 결국 녹화는 중단되었고, 홍보팀장은 자신을 촬영장 뒤로 데려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아니, 모 선생님. 이거 다 약속된 거라니까요? 미리 대본 보여드렸잖아요.”

“대본이요? 아, 아까 그거. 대기실에서 라면 끓여 먹을 때 받침으로 썼는데 국물 흘려서 같이 버렸는데요.”

“하? 그럼 안 읽어 보신 겁니까?”

“어차피 가만 앉아서 질문에 답만 하면 되는 건데 뭘 대본까지 봅니까?”

“하… 잘 들으세요. 모 선생님은 시리아에서 포로로 잡힌 후 거기서 의료활동을 한 겁니다, 아셨습니까?”

“뭘 알아요? 저 그런 거 안 했다니까요?”

“아니, 그걸 누가 압니까?”

“……예?”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거기서 귀환하신 건 선생님 혼자시잖아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압니까?”

“…………….”

“이건 병원 홍보를 위해 하는 겁니다. 거짓말 늘어놓으란 말까진 안 할 테니까, 그냥 사회자가 그렇게 말하면 고개만 끄덕이세요.”

홍보팀장이 부하직원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본 다시 가져와.”

부하직원이 여유 대본을 가져다 주자, 자신에게 넘겨주는 홍보팀장.

“여기 보면 시리아 반정부군 포로 중에 14세 여아를 치료해 주고 우정을 쌓았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시 녹화 시작하면 그 부분부터 녹화할 테니 미리 봐두세요.”

머리 끝까지 성질이 난 건우가 대본을 그의 얼굴에 집어 던져 버리려는 찰나,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대본과 함께 2억원이 든 통장이 날아가 불 타는 환상이 보인다.

‘씨발…’

2억, 그래 2억. 큰 돈이다. 거짓말?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은 아니다. 14세 소녀? 반정부군 진영에 있는 14세 소녀는 기관총을 들고 다닌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세뇌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12세만 넘어도 총을 들고 전쟁하러 가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 아이와 우정을 나눠? 너희들이 제 정신이야?

대본을 열어 보지 않고 내려다 보기만 하는 건우를 위아래로 본 홍보팀장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했다.

“원장님, 이사장님과 약속하신 거 아닙니까?”

“…………………….”

“모종의 대가도 받으시는 걸로 이야기 된 것으로 아는데.”

“…………………….”

“돈 값 하셔야죠, 병원 홍보실은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건우가 살짝 충혈된 눈으로 홍보팀장을 노려보았다. 건우가 무척 싸가지 없다는 소문을 들어 숙지하고 있던 실장이 움찔 놀랐지만 감히 교수도 아닌 녀석이 자신에게 뭐 어쩔 것인가?

“뭡니까?”

건우가 대본이 구겨질 정도로 꽉 잡고 들어올렸다.

“의료행위? 그래요,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14세 여아? 그런 거짓말은 못합니다.”

홍보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왜요?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이건 하고, 저건 못하고. 도대체 무슨 기준입니까?”

건우가 대본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튼 14세 여아 이야기는 빼죠. 나머진 확인해 보고 대강 협조할 테니까.”

“하.”

홍보팀장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거 하나만 빼는 겁니다?”

“혹시 14세 남아 이야기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검토해 보죠.”

속이 뒤집어지기 직전이라는 표정의 홍보팀장.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건우의 속도 뒤집어지기 직전이다. 일일이 왜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는지, 그런 이야기가 방송으로 나가면 시리아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바보 취급을 받게 될는지 설명해 주기도 귀찮다.

짜증난다는 표정의 홍보팀장을 일별하고 대기실로 돌아와 빨간 펜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쭉쭉 그어 버린 후 사회자에게 가 통보하듯 대본을 툭 던져준다.

“거기 빨간 펜으로 그은 부분 질문은 하지 말기로 합시다.”

“……………….”

사회자가 황당한 눈으로 PD에게 도움을 청한다. PD는 대본을 보고 인상을 쓰곤 홍보팀장에게 짜증을 낸다. 뭐 짜증을 내던 굽실거리던 알아서들 해라, 난 그 이상은 못한다.

결국 대본을 수정해 다시 촬영 날짜를 잡기로 하고 촬영중단. 홍보팀장과 함께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또 차 안에서 잔소리 폭격을 들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린 건우는 홀로 택시를 잡아 타고 병원에 돌아온 것이다.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버린 건우가 응급실로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아주 피에로 분장을 시키지 그랬어, 개새끼들이.”

2억은 받는다. 하라는 건 딱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한다. 하지만 2억을 주기에는 아깝고, 안 주기는 명분이 없는 딱 그 정도만 할 것이다. 어차피 그만 두지 않으면 분원 돌다 잘릴 텐데 뭐 하러 더 열심히 하겠는가?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상의를 벗어 어깨에 걸친 건우가 성큼성큼 응급실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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