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19화 (19/230)

#제 19 화. ER의 화타(華佗) (7)

응급실에 새로운 암묵적 규칙이 생겼다.

모건우는 응급실에서 임시근무 중이지만 그에게 맡겨지는 고정업무는 없다. 그러므로 환자가 와도 모건우가 담당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 담당 레지던트는 문진, 시진, 촉진, 타진, 청진을 끝내고 필요한 검사를 한 후, 매우 파악하기 쉬운 환자는 그대로 처치를 하거나, 혹은 담당 과로 시프트 한다.

하지만 애매한 경우, 병세 자체를 파악하기 어려워 검사를 여러 개 돌려야 할 때나, 혹은 합병증이나 육안으로 보여지는 증세가 두 개 이상의 병증이 복합되어 있을 때는 반드시 모건우를 찾는다. 이것은 건우가 응급실 임시근무를 시작한지 단 나흘 만에 생긴 규칙이다.

레지던트들은 나름 건우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자기들끼리 논의하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건우를 찾았다. 물론 건우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배려였다. 처음에는 볼 수 있는 환자들이 많았지만 점점 하루에 한 두 환자만 겨우 자신에게 돌아오는 날이 많아진 건우는 응급실에서 할일 없이 멍 때리다 답답함을 느끼곤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병원 밖 전경을 바라보는 건우.

예전에는 잠시 이 병원 건물을 벗어나는 것만으로 그렇게 신나고 기뻤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인턴 때는 마치 이곳이 지옥 같았다. 병원 밖으로 나갈 때는 마치 불 타는 지옥에서 빠져 나가 시원한 공기를 쐬고 이제 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갈 생각을 하면 다시 암담해지듯 그때도 편히 쉬질 못했었다.

레지던트 때는 또 달랐다.

가끔 오프인 날에 병원 밖으로 나가면 생각나는 건 단 하나. 달콤한 소주 한잔도 아니고, 맛있는 먹거리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보다 더 생각나는 그것. 바로 잠이었다. 편안한 집 침대에 쓰러져 열 시간이고 스무 시간이고 자고 싶기만 했었다.

지금의 여유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일이었는데. 펠로우가 된 후엔 편해졌냐고? 전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쳐대는 레지던트, 인턴들 때문에 교수에게 끌려가 혼이 나고, 그들이 싼 똥을 치워야 하는 하루하루. 게다가 교수회진 준비에 수술 보조도 뛰어야 하고, 틈틈이 논문까지 써야 한다.

전문의 시험을 보고 나면 좀 편해질 줄 알았는데. 몸은 상대적으로 편해졌는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더욱 힘들었다. 그만큼 대학병원 임용의 문은 좁디 좁으니까.

“진즉 이렇게 포기했으면 편할 것을.”

터벅터벅 걸어 병동을 돌아 맨 끝에 있는 야외 벤치에 앉은 건우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

응급실 레지던트들은 자신을 무슨 전설의 화타보듯 본다. 하지만 건우 스스로는 안다. 자신은 반쪽 짜리 의사다. 외과 의사면서 수술을 할 수 없는 의사. 아니 정확히는 수술할 자신이 없는 의사다. 이 손이 언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건우가 손을 들어 왼쪽 눈을 만졌다.

‘이 눈 역시 한계가 명확하다.’

며칠에 걸친 테스트로 확실히 알았다. 이 눈에 보이는 핏빛 구름은 심각한 외상을 가리킨다. 하지만 내과적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게는 그로 인해 발생한 외과적 치료가 필요한 부분만 보였다. 바이러스나, 염증의 원인은 밝히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이 능력으로 IM(Internal Medicine, 내과)에 가봐야 별 쓸모 없다는 뜻인데. 하…….”

이놈의 손이 문제다. 손만 제대로 움직여 줄 거란 확신만 있으면 되는데. 환자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할 순 없다. 그건 의사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주먹을 말아 쥔 건우가 한숨을 쉰다.

“기본적인 술기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GS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기본. 그건 기본 처치법과 외과술기들이다. 레지던트 시절 천을 사다가 전체가 새카매질 때까지 Suture technique(술기) 연습을 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수술에 들어간 후부터는 천보다는 돼지 내장을 구입해 연습했었다. 그토록 수십, 수백, 수만 번의 연습을 했던 술기인데, 이젠 그 기본적인 것마저 해낼 자신이 없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개를 숙인 건우가 실소를 지었다.

‘사람이 참 간사하네. 삼 개월 홍보 모델하고 돈 챙겨서 엄마랑 카페 하려고 마음 먹었었는데. 그새 희망 하나 얻었다고 딴 생각을 하고, 그게 안 된다고 또 이렇게 절망하다니.’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보다. 그때 건우가 앉은 벤치 밑으로 기척이 느껴지며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냐오오…’

건우가 허리를 숙여 아래를 보자, 지난 번에 봤던 그 작은 고양이가 보인다. 도대체 이 병원 관리인은 하는 일이 뭘까? 라는 생각과 다시 이 녀석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혼재된 건우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또 왔냐?”

고양이는 건우를 알아보고 접근한 것인지 가만히 올려다 보다가 다리에 몸을 비비기 시작한다.

“야야, 바지에 털 묻어 이 자식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은 웃을락말락 하는 이상한 표정이 되어 있는 건우.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빌 때 말려 올라간 바지와 양말 사이의 맨 살에 털이 닿는 느낌이 무척 부드럽다.

“간지러워, 인마. 알았어, 알았어. 또 배고파?”

고양이가 건우를 올려다 보며 냐옹 하는 소리를 내자, 건우가 실소를 짓는다.

“이놈 이거, 사람 말 알아듣는 거 아냐? 하하, 기다려.”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편의점 방향으로 향하다가 문득 돌아본다. 고양이는 벤치 아래에 얌전히 앉아 건우를 바라보고 있다.

“어디 가지 말고, 거기서 기다려. 그럼 지난 번에 먹었던 맛있는 거 기억하지? 야들야들하고 짭짤한 그거. 그거 사다 줄게, 알았지? 어디 가면 안 된다.”

빠르게 걸어 편의점에 들른 건우가 소시지 두 개를 집었다가 멈칫했다.

‘좀 더 사둘까?’

주머니를 채워뒀다가 그 녀석을 만날 때마다 바로 주면 이리 마음 급하게 편의점에 들르지 않아도 되겠지? 건우가 소시지를 왕창 집어 카운터로 가자, 직원이 계산을 하며 말했다.

“오늘 의국에 소시지 한 턱 쏘시나 봅니다, 선생님. 무슨 소시지를 스무 개나 사시고, 하하.”

이 자식은 뭔데 친한 척을 하지? 처음 보는 놈인데. 직원은 의사가운을 입고 있는 건우에게 친한 척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넌 도대체 뭐야? 하는 차가운 눈빛이라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얼른 봉투에 소시지를 담아 주려 했다.

“2만 원입니다, 선생님.”

“봉투는 됐어요.”

셈을 치른 건우가 의사 가운에 소시지 스무 개를 쑤셔 박는 걸 본 편의점 직원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건우는 누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 이건 고양이에게 소시지를 주는 창피한 모습은 아니니까. 급한 마음에 달리다시피 벤치로 돌아온 건우. 그런데 벤치에 불청객이 와 있다.

벤치 위에 두 다리를 올리고 팔로 무릎을 감고 있는 작은 인영.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서 본 여자인데. 작은 여의사가 살며시 손을 내리자, 벤치 아래에 있던 고양이가 킁킁 손 냄새를 맡는다. 희미하게 웃은 여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너보단 낫네. 배 많이 고파?”

‘냐앙.’

“하하, 지금은 언니한테 먹을 게 없네. 미안하지만 너한테 먹이 주다 걸리면 선배들한테 진짜 혼 날지도 모르거든. 퇴근할 때 꼭 들를게. 계속 여기 있을 거야?”

‘냐앙.’

건우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중얼거렸다.

“빨리 비켜, 이 자식아. 거기서 밤 샐 거냐? 고양이 배 고프다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 배고플 고양이 생각 때문에 이런 거다. 제기랄 저 여자가 비켜야 빨리 먹이 주고 이 아픔에서 벗어날 텐데 벤치 위가 침대 위인마냥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여자는 갈 생각을 안 한다. 멀리서 고양이의 울음이 들릴 때마다 심장이 저리는 느낌이 든 건우가 인상을 쓰며 몸을 움직인다.

‘안 가면 쫓아내면 될 일이지.’

자신은 병원에 돌아온 지 얼마 안됐다. 그 동안 안면을 튼 사람들은 다 자신보다 후배다. 얼굴이 낯익다는 건 분명 후배란 뜻. 게다가 무척 앳되어 보이니 확률은 더 무게를 더한다. 건우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걸어가자, 고개를 숙이고 고양이를 보고 있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든다.

건우를 발견하곤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이는 여자.

“안녕하십니까!”

“…………………….”

인사를 받아주기엔 심장이 너무 아프다. 건우가 말 없이 벤치로 오자 게걸음으로 비켜주는 여자. 벤치에 털썩 주저 앉은 건우가 여자를 보았다. 자신에게 뭔가 말을 걸거라 생각했는지 차려 자세로 기다리는 여자.

“뭐?”

이상한 물음이 돌아오자 잔뜩 당황한 여자가 말을 더듬는다.

“에, 예?”

“뭐냐고.”

“그, 그게! ER에서 인턴으로 수련 중인 정혜선입니다!”

“누가 이름 물어봤냐?”

“………………….”

속으로는 아, 이 녀석 이름이 정혜선이구나 인턴이고. 하는 정보를 기억하는 건우. 고양이가 슬금슬금 다리를 비비려고 하는 것이 발목을 통해 느껴진다. 움찔움찔 하는 손이 당장에라도 저 귀여운 생명체를 만지고 싶다 난리를 친다.

“안 바쁘냐?”

혜선이 화들짝 놀랐다.

“에, 지, 지금은 휴식 시간이라서요.”

“오, 요즘 인턴은 휴식 시간도 따로 있어? 나 때는 없었는데.”

“죄, 죄송합니다.”

“계속 서 있을 거냐?”

할 말 없으면 꺼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 인턴 녀석이 눈치를 밥 말아 먹었는지 그 소리가 앉으란 소리로 들렸나 보다. 잽싸게 옆에 앉아 허리를 펴고 정자세로 앉는 혜선. 속으로 한숨을 쉰 건우의 다리에 고양이의 촉감이 느껴진다.

‘으, 부드러워. 넌 도대체 뭔데 이렇게 부드러운 거냐?’

가만, 혜선이 오른쪽 옆에 앉아 있으니 왼쪽은 안 보일 거 아냐? 옳지, 가만 있어봐. 손을 주머니에 넣어 꼼지락 대며 한 손으로 소시지 껍질을 까려 노력하는 건우. 하지만 두 손으로 해도 쉽지 않은 껍질 벗기기가 한 손으로 가능할 리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한참 꼼지락 댔지만 결국 소시지 껍질 까기에 실패한 건우는 다른 계획을 세워야 했다.

‘자연스럽게 껍질을 깔 방법이 필요하다.’

슬쩍 오른쪽을 보니 여전히 허리를 쭉 펴고 군인처럼 앉아 자신에게 하달될 말을 기다리는 정혜선이 보인다. 주머니 속 소시지를 만지작거리던 건우가 소시지 두 개를 꺼내 한 개를 내밀었다.

“먹을래?”

“……………….”

“어이.”

정혜선이 획 돌아보며 경직된 어투로 말했다.

“괘, 괜찮습니다!”

“나 혼자 먹는 거 싫어한다.”

“네!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정혜선이 소시지 한 개를 재빨리 채 가는 걸 본 건우가 자연스레 자신 몫을 가장한 소시지 껍데기를 까며 말했다.

“편하게 먹어.”

“………예.”

소시지 껍데기를 까 일부러 정혜선 쪽을 보며 한 입 먹는 건우. 그녀는 경직된 자세로 앞만 보고 있다. 입에 있는 걸 몰래 뱉어서 왼손으로 옮긴 후 슬쩍 아래로 내미는 건우. 고양이의 까칠한 혓바닥 감촉이 손 끝으로 느껴진다.

‘흐흐, 고양이 혓바닥은 이런 느낌이구나. 뭔가 까칠한데 귀엽네.’

아주 좋은 흐름이다. 계속 이런 흐름을 가져가야 들키지 않고 미션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려면 지나치게 침묵이 길어선 안 된다. 뭐 딱히 할말은 없지만 일단 말을 걸자.

“인턴 생활은 할만 하고?”

소시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혜선이 다시 허리를 편다.

“네! 좋습니다.”

“좋기는. 인턴 생활이 좋다는 건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건데?”

“…………………….”

“아까 보니까 풀 죽어 있던데. 무슨 일 있었어?”

또 자연스럽게 소시지 한 입을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는 척을 하다 잽싸게 손에 뱉는 건우. 이 사실을 모르는 정혜선은 고개를 푹 숙인다.

“아닙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뭐야, 이 여자는. 그럼 표정이 왜 그런데. 아 뭐. 너한테 무슨 일 있든 나랑 뭔 상관이냐? 난 고양이 소시지나 챙겨주고 심장 아픈 거만 나으면 될 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소시지 하나를 다 줄 때쯤 되자 따끔거리는 심장이 가라앉는다. 지랄 맞은 병이긴 하지만 낫는 방법이 확실하니 이 정도면 할만 하다.

나중에 또 만나면 줄 소시지도 잔뜩 챙겨놨으니 이 정도면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겠지. 볼일을 마친 건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래? 그럼 뭐. 난 그만 들어간……?”

건우가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 고개 숙인 혜선의 턱 선을 흐르고 있는 눈물 줄기가 보인다. 그래, 인턴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혼이 나서 울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뭐….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한참 어린 정혜선의 눈물을 보는 순간 건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살짝 떨리는 손을 심장으로 가져간 건우가 눈썹을 일그러뜨린다.

‘제기랄, 고양이한테만 반응하는 게 아니었지, 참.’

진짜 지랄 맞은 병에 걸렸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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