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닥터 프랑켄슈타인-17화 (17/230)

#제 17 화. ER의 화타(華佗) (5)

응급의료센터 휴게실.

예전에는 의국이나, 의사들의 휴게공간에 간식과 음료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이야기. 몇 개 없는 하얀 테이블들 위가 휑하다. 구석에는 물을 거의 소진한 정수기 위에 그나마 일회용 커피 몇 개가 종이컵에 담겨 있을 뿐이다.

의국은 인턴 및 레지던트들의 공간으로, 예비고객의 마음을 얻기 위해 대학병원 담당 제약사 영업사원들이 경쟁적으로 공을 들이던 장소였다. 교수와의 한끼 식사 값이면 십 수명 의국원들의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는 만큼 저비용으로 예비고객의 마음을 얻는 의국 마케팅은 대학병원의 중요한 공략법 중 하나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은 잦은 야간당직과 격무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들 인턴, 레지던트를 위해 간식과 음료수를 지원해 왔다.

하지만 리베이트 쌍벌제 시행 이후 확산되고 있는 제약사들의 마케팅 긴축 재정이 대학병원 의국과 휴게실에 영향을 미쳐, 이제는 과자 한 봉지도 들어오는 것이 없다.

응급의료센터에서 일하는 의사들 네 명이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있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그들은 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몸을 살짝 움찔했다가, 마침내 문이 열리자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간다.

“매점에 메론 빵 남았디?”

“내 소시지는?”

“페스트리 이거 말고 하얀 거, 설탕 뿌려진 거 사오라니까, 아오.”

“야 배고파 죽겠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네 명의 남자 의사들이 둘러싼 작은 인영. 아직 의사가운이 어색해 보이는 앳된 인상의 여성 인턴이다.

“죄, 죄송합니다.”

남자 의사 중 한 명이 으르렁거린다.

“야, 우리 시간 많아 보이냐? 네 덕에 우리 휴게 시간 십 오분 남았거든? 선배들 심부름 빨리 하는 것도 능력이다, 어?”

또 다른 남자 의사가 어깨로 으르렁거리는 의사를 툭 밀치며 말했다.

“왜 그래, 심부름 시킨 것도 미안한데. 요즘이 쌍팔년도 시대도 아니고.”

“지랄, 자기도 심부름 시켰으면서 착한 척 하기냐?”

“아니, 뭐 너희들 시킨다니까 어차피 갈 거 숟가락 얹은 거지.”

“그럼 입 다물고 먹기나 해, 인마. 시간 없어.”

의사들이 자기들 몫을 챙겨 테이블에 앉으며 멀뚱히 서 있는 인턴에게 말했다.

“뭐해? 넌 안 앉아?”

움찔 놀란 인턴이 말을 더듬거린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선생님.”

“두 번 안 권한다?”

“네…….”

감히 선배들 사이에 앉지 못한 인턴이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지자, 레지던트들끼리의 대화가 시작된다.

“오늘도 김중곤이 한 건 했다며?”

“어, 나도 들었어. hemorrhagic septicemia(출혈 패혈증) 환자였다며?”

이야길 듣지 못한 레지던트가 물었다.

“그게 왜? 심각했어?”

말하기 좋아하게 촉새처럼 생긴 의사가 손을 휘휘 저었다.

“공사판에서 바늘에 찔린 후에 HS가 왔는데, 문진해 보니 바늘에 찔린 게 무려 한 달 전이었던 거야.”

“헉, 어디였는데?”

“우측 무릎 위.”

“치료 안 하고?”

“약국 가서 약 사다가 disinfection(소독)하고, 며칠 후 통증이 생겨서 진통제 먹으면서 지냈대. 그런데 보름 전부터 주위가 부어 오르고 통증이 심해졌다고 하더라.”

“아니, 그 지경인데 왜 병원에 안 오고?”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여간 edema(부종)도 심해지고 부위도 넓어지면서 통증이 너무 심했나 봐. 병원에 왔을 땐 chill(오한)이랑 fervescence(발열)까지 있었어.”

“으아, 그 사람 amputation(절단) 안 해도 된데? 그 정도면 해야 될 수도 있을 텐데.”

구석에 있던 인턴도 귀를 기울였다. 의사 면허는 있지만 사실 저들이 말하는 실전 대화의 70%정도만 겨우 알아듣고 있는 그녀는 뭔진 몰라도 김중곤 선생님이 꽤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겠거니 하며 귀를 쫑긋거린다. 바로 그때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 보인 인턴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 김중곤 선생님…….”

중곤이 문 뒤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인턴을 보고 물었다.

“어? 너 거기서 뭐해?”

“아…….”

“저기 의자 많은데 왜 거기 그러고 있냐?”

“그, 그냥.”

머뭇거리는 인턴의 얼굴을 보며 순간 간호사 스테이션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 있던 자신이 생각나 얼굴이 붉어진 중곤이 검지로 미간을 긁으며 하얀 편의점 봉투를 들어 보였다.

“빵 좀 먹을래?”

“제, 제 것도 있나요?”

“어, 이거 몇 개 샀어. 같이 먹자, 혜선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중곤이 등장할 때부터 빤히 그를 보고 있던 의사들이 손을 든다.

“어이.”

중곤이 휴게실을 둘러 보았다. 중앙 테이블에 앉은 네 명의 레지던트들은 다 자신들보다 선배. 중곤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들.”

의사 중 한 명이 의자를 끌어 자리를 내어준다.

“여기 앉아.”

중곤이 인턴 혜선을 힐끔 본 후 비어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는 혜선이랑 여기서 먹으려고 했는데요.”

“물어볼 게 있으니 그러지. 인턴도 앉으라고 하면 되잖아.”

순간 옆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인턴이 아니라 정혜선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올랐지만 위계질서가 강한 대학병원에서 그런 소릴 했다간 뼈도 못 추릴 것이다.

“예, 그럼. 혜선아. 넌 그냥 저쪽에 앉아서 이거 먹고 있어라. 내 건 하나만 남겨주면 돼.”

“아… 네.”

혜선이 선배들을 불편해 하기에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다. 물론 네 명의 레지던트들은 인턴 따위가 어디 있든 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실습이 끝나면 다른 과로 지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ER의 의사들은 체력 좋은 남자 의사들을 원하는 성향이 강하다. 보통 인턴이 오면 자기 과로 오라고 이 말 저 말을 하며 꼬시지만 여성 인턴이 올 땐 무시해 버리는 레지던트들이 많다. 어차피 공을 들여 봐야 다른 과로 홀랑 가버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중곤이 자리에 앉자, 의사들이 앞다투어 물어 온다.

“야, 아까 최용 쌤 말 들어보니까 너 hemorrhagic septicemia 환자 덕에 또 교수님께 칭찬 받았다며?”

“그 이야기 좀 해줘 봐.”

“처음 상태가 어땠어?”

중곤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그건 제가 한…

레지던트 한 명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처음 입원할 때 상태가 어땠어?”

“………………….”

남의 말을 듣기는커녕 자기들 할 말만 하는 선배들. 잠시 입맛을 다신 중곤이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일단 얼굴에도 edema(부종)가 있어 보였고, complexion(안색)이 창백했습니다. body temperature(체온)은 40도였고, blood pressure(혈압) 91/50mmHg에, genu(무릎)부터 gluteal(둔부)까지 edema(부종)가 퍼져 있었습니다.”

레지던트들이 볼펜을 손 안에서 굴리며 말했다.

“CT랑 echography(초음파) 결과는?”

“posterior region of thigh(후 대퇴부) 외측에 넓게 피하 수액이 번져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레지던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자는 괴로웠겠지만 응급에서 처치할 만한 내용은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항생제 처방 했고?”

“아닙니다.”

“응? 그럼?”

“외과에 긴급수술 요청했습니다.”

“뭐? 왜? 항생제 처방하고 관찰한 후에 검사 더 하고 넘겨야지.”

김중곤이 잠시 침을 꿀꺽 삼킨 후 말했다.

“necrotizing fasciitis(괴사성 근막염)이 의심되었습니다.”

레지던트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따로 검사했어?”

“………………….”

“응? 김중곤?”

중곤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미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는지 아까부터 말 없이 팔짱만 끼고 있던 레지던트가 말을 던진다.

“최용 쌤 말 들어보니 GS(일반외과) 교수님이 크게 칭찬하셨다던데. 긴급 수술 들어가서 환부 열었더니 pus(고름)가 10cm 이상 솟구쳤다고 하더라. 조직 putrefaction(부패)에 극심한 fetor(악취)도 났고 말이지.”

다른 레지던트들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수술실에서 그게 느껴질 만큼 심했다는 거야?”

“음, pus 부위를 따라 절개 확장했고 무릎부터 둔부까지 전부 절개했대. hypodermic fat(피하지방)과 함께 fascia(근막)이 괴사되었고 검푸른 pus와 괴사된 조직 모두 제거하며 주위 조직도 Debridement(변연절제)했다고 하더라. GS교수님 말로는 이 환자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대. 하루 이틀만 더 지났어도 사망했을 수도 있다던데.”

“헐… 그래서 지금 그 환자는 어디 있는데?”

“GS 병동에 입원 중이지. 이제부터 드레싱 하고 고단백 음식 먹이며 central vein(중심정맥) 영양요법 시행할 거라고 하더라.”

“절개창부는?”

“그냥 열어놨대. Pus가 더 나올 수 있다고, 1개월 후부터 서서히 봉합한다더라.”

“우와, 그 정도로 심했던 거야? 1개월이나 열어놔야 할 만큼?”

“어, 아까 말했잖아. 교수님이 그 환자,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하셨다니까?”

레지던트들이 일제히 중곤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중곤. 레지던트들이 그런 중곤을 위아래로 보다 물었다.

“넌 그거 어떻게 알았는데?”

“아니, 안다고 해도 GS에 긴급수술 요청해야 될 정도란 건 어떻게 알았어? blood pressure(혈압)도 그 정도면 긴급수술 요청할 정도는 아니었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따로 검사 더 했지, 너?”

중곤이 자신에게 따지듯 물어오는 선배들을 번갈아 보다 말을 더듬었다.

“그게…….”

레지던트들이 얼굴을 더욱 내민다. 구석에 앉아 있던 정혜선도 귀를 쫑긋거리는 것이 보인다. 중곤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포기한 듯 말했다.

“하, 뭐 제가 했다고 해도 어차피 안 믿으실 분위기니까.”

레지던트들이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야, 교수님들이야 우리 이름이나 외우고 계시면 다행인 분들이니 착각하실 수 있지만 우리가 널 모르냐? 해 본 수술이라곤 아빼 밖에 없는 2년 차가 무슨 수로 그걸 알아내?”

“그러니까, 뭔가 다른 검사 해놓고 안 한 척한 거 아냐? 칭찬 받으려고.”

“만에 하나를 위해 검사를 하고 알아냈다고 해도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야. 그걸 숨기는 건 비겁한 짓이고.”

중곤이 한숨을 쉬었다.

“하, 검사한 거 없습니다.”

레지던트들이 인상을 썼다.

“그럼?”

“제대로 말 안 해?”

“빨리 말해 봐.”

팔짱을 끼고 있던 가장 선배 레지던트가 가만히 중곤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럼 네가 전설의 화타(華佗)라도 되냐? 시진(視診)만 해도 막 무슨 병인지 알아?”

선배 레지던트의 말에 실소를 짓는 의사들. 휴게실에서 웃고 있지 않은 사람은 중곤과 혜선 뿐이다. 중곤의 진지한 얼굴을 본 레지던트가 물었다.

“뭐야, 설마 그게 진짜란 소릴 하려는 건 아니지? 확 입 찢어 버린다?”

중곤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진짭니다.”

선배 레지던트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 새끼, 입 찢어.”

레지던트들이 반쯤 장난으로 중곤의 팔을 붙잡자, 중곤이 급히 외쳤다.

“아뇨! 제가 화타란 소리가 아닙니다!”

레지던트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 소리야?”

중곤이 한 줌 거짓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ER에 진짜 화타가 와 있습니다.”

최고 선배 레지던트는 중곤의 얼굴에 거짓이 없음을 알아챘는지 손을 들어 중곤을 포박하고 있는 다른 레지던트들을 말린 후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자세히 설명해, 하나도 빠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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