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화. 돌아온 펠로우 (12)
레지던트 2년차 김중곤 29세.
인턴 딱지 뗀지 2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Appendicitis 수술만은 자신 있다. 처음 담당교수가 자신이 집도하게 해준 수술도 appendicitis였고, 지금껏 자신에게 맡겨진 수술 중 가장 많은 수술도 appendicitis였기 때문이다.
손을 세척하고 수술실로 들어오자, 이미 PA와 SN 간호사들이 수술준비를 마치고 있었고, 마취과도 미리 대기하고 있다, 수술실로 들어온 직후 마취를 시행했는지 환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다. PA들의 도움으로 일회용 수술가운을 걸친 김중곤이 시간을 힐끔 보며 말했다.
“18세 김다혜 환자, 2월 23일 17시 54분, Acute appendicitis surgery(급성 충수염 수술) 시작합니다.”
중곤이 환부를 바라보며, 오른손을 간호사에게 내민다. 엄지와 검지로 뭔가를 쥔 모양을 하며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는 수신호를 보내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간호사가 메스를 넘겨준다. 순간 옛날 기억이 나 실소를 짓는 중곤.
자신의 첫 수술 참관 때의 기억이 떠올라 웃은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의사의 꿈을 키워온 그는 수술실의 슈퍼맨인 의사가 간호사를 보지도 않고 손을 내밀며 ‘Scissors’, ‘mes’, ‘forceps’ 따위의 말을 번지르르 하게 흘리며 수술 해대는 걸 기대했었다.
하지만 실제 수술실에서 의사는 최소한의 말만 한다.
수술실에 들어오기 전, 간호사들은 해당 수술의 순서에 대해 미리 숙지하고 오기 때문에 대부분 준비된 순서대로 도구를 넘겨주며, 혹시 수술 중 갑자기 다른 도구가 필요할 때는 집도의가 수신호를 보낸다. 방금 자신이 한 것과 같은 수신호는 메스를 달라는 것, Scissors(가위)를 달라고 할 때는 가위 바위 보를 할 때처럼 가위 모양을 취하며, forceps을 달라고 할 때는 집게를 쥔 것 같은 모양으로 오므렸다 폈다 하면 신호를 본 간호사가 알아서 준다.
그것도 모르고 왜 저 간호사는 의사가 말도 않는데 알아서 도구를 주는지, 의사는 또 왜 간호사가 하라는 순서대로 수술을 하는지 헷갈려 했던 첫 수술 참관 때의 기억이 그를 웃음짓게 한다. 이제는 의사 일도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물론 해보지 못한 수술이 수두룩하지만 적어도 이 수술만은 눈 감고도 할 자신이 있는 것이다.
정석대로 개복을 하는 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 역시 김중곤을 미소 짓게 한다. 첫 수술 때 간호사가 필요한 도구를 가지러 나가는 소리에 놀라 집중력이 깨어지고, 그것이 실수로 이어질 뻔 했던 기억이 난다. 자기가 미숙해 그런 걸 인정하지 못하고 수술이 종료된 후 간호사를 불러 한참 호통을 쳐댔던 기억. 그때를 생각하면 무척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오히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술에 열중하는 김중곤. 간호사들과 마취의도 매우 난이도가 낮은 수술이라 그런지 여유롭게 움직인다.
수십 번은 해본 수술.
개복을 하고 회 맹장 연결부위의 시야를 확보했다. 익숙한 듯 충수돌기를 박리하기 위해 메스를 들이대려던 김중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황이 맴돈다. 멈칫한 중곤이 간호사에게 메스를 돌려주고, 손을 집어 넣어 주변을 눌러 본다. 개복한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보려는 듯 허리를 숙이는 김중곤.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그를 바라보던 간호사.
그가 돌려준 메스는 비록 사용하지 않았지만 손으로 한번 잡았기에 정해진 수거용기에 넣고 물끄러미 의사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이는 지수의 친구인 은비였다.
“……………….”
선생님? 왜 그러세요? 하고 물어보고 싶지만 집도의의 집중력을 깨는 쓸데 없는 말은 해선 안 된다고 배웠다. 뭔가 이상한 점이 있는 모양이지, 뭐. 저러다 다시 수술을 시작할 것이다. 수술실이란 변수가 수백 가지인 공간이니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된다.
김중곤이 손을 개복 부위로 집어 넣고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다.
“이게…….”
은비의 눈에 환자의 개복 부위 안 쪽으로 손목 부근까지 들어가 있는 김중곤의 손이 보인다. 저렇게 헤집는 건 쓸데 없는 행동이다. 환자의 빠른 퇴원과 After life(수술 후 생활)에도 좋지 않다. 왜 저러는 걸까? 은비는 PA 근무 3년 차다. 수술실 경험은 중곤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은비가 결국 입을 뗐다.
“선생님?”
“………………….”
답을 하지 않고 당황한 기색으로 환부만 헤집어 놓고 있는 중곤. 은비가 조심스럽게 다시 그를 부른다.
“선생님, 무슨 문제 있으세요?”
“…………………….”
“김중곤 선생님?”
“어, 없어.”
“네?”
중곤의 일그러진 얼굴에 점점 당황이 서려진다.
“이, 이… cecum(맹장)에 blind loop(맹관)가 없어요.”
은비의 얼굴에도 놀람이 서린다. 맹관이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보통 급성 충수염을 맹장이 터진다 표현하지만, 사실 맹장 끝의 맹관이나 맹낭에 염증이 발생해 생기는 병이 충수염이다. 그런데 맹관이 보이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소릴까?
감히 집도의에게 비키라 하고 자신이 개복한 곳을 볼 수는 없다. 손에 쥐고 있던 도구를 메이요 스탠드(MAYO STAND)에 내려 놓은 은비가 말했다.
“최용 선생님께 연락 드려야 할까요?”
“자, 잠깐만요!”
어떻게든 자신이 해결하고 싶다. 최용이 아무리 부드러운 치프라곤 하지만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 중 하나다. 이곳은 대학병원. 인턴도 아니고 레지던트가 이렇게 쉬운 수술도 못해 치프를 호출하는 일만은 피하고 싶다. 손을 더욱 깊숙하게 집어 넣는 김중곤.
은비가 급히 마취 선생 쪽을 보자, 그는 아직 환자 바이탈에 문제는 없다는 듯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다.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저렇게 내부를 헤집어 놓는 건 환자에게 결코 좋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당장 수술 중지시키고 최용을 불러야 할까? 그렇게 되면 김중곤과의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수술실 간호사인 자신과 의사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다. 아직 환자에게 특별한 이상이 없으니 좀 더 기다려 볼까? 바로 그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은비의 귀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멍청한 새끼.”
수술실에 적막이 흐른다. 환자의 개복한 부위에 손을 집어 넣고 있던 김중곤도 굳었다. 수술실에서 집도의의 권한은 막강하다. 감히 누가 집도의에게 저런 소릴 한단 말인가? 이 방에 있던 누군가가 저런 소릴 한 것이라면 그 날로 병원의 위계질서는 무너지는 것이다.
간호사들과 마취과 의사, 집도의의 고개가 모두 소리가 난 방향으로 획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소문의 악당, 모건우의 모습이 보인다. 수술실 문 옆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 아까 문 열리는 소리를 낸 것은 바로 그였던 모양이다. 한 쪽 눈동자만 푸른 남자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술을 뒤틀었다.
“너 appendicitis 수술 몇 번째야?”
순간 울컥한 모양이지만 상대가 소문의 모건우임을 안 김중곤은 슬며시 손을 빼며 더듬거렸다.
“이번이 61회째입니다.”
꽤 많은 경험이다. 건우도 그건 인정하는지 고개를 까딱인 후 말했다.
“cecum 들어올려, 후 복부다.”
처음 건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멍청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만 보는 중곤. 그러다 문득 번개 같이 스치는 생각에 급하게 맹장을 들어올리자 그의 눈에 후 복막에 박혀 있는 충수돌기가 보인다.
“이, 있다!”
그제야 상행결장과 맹장의 해부학적 구조를 확인하곤 후 복막에 충수돌기가 있을 수 있는 환자임을 깨달은 김중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슬금슬금 건우의 눈치를 보는 중곤. 건우는 더 볼 필요 없다는 듯 팔짱을 풀며 말했다.
“그 다음까지 설명해줘야 되는 건 아니겠지?”
“………………….”
“귀 안 들리냐?”
“아, 아닙니다!”
건우가 귀까지 새빨개진 김중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비에게 말했다.
“저 놈 제 정신 아닌 것 같은데 간호사님이 잘 보조해 주….”
말을 하며 은비를 바라본 건우가 멈칫했다. 젠장 아까 고양이 사건 때 지수 옆에 있던 간호사다. 자기도 모르게 말을 멈춰버린 건우. 하지만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는 이미 알아 들은 은비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걱정 마세요.”
“흠.”
민망한 헛기침을 한 건우가 발로 수술실 문을 여는 버튼을 툭 누른 후 나가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눈웃음을 짓는 은비가 아직 맹장을 들어올린 채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중곤에게 말했다.
“선생님? 개복한지 꽤 지났습니다. 어서 수술 시작하시죠.”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중곤이 얼른 도구를 달라는 손을 내민다. 눈웃음을 짓는 은비가 건우가 나간 수술실 문을 힐끔 보며 마스크 아래로 빙긋 웃음을 짓는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돼. 보지도 않고 경험으로 돌기 위치를 알아내는 실력 있는 의사였잖아?’
좀 전에 건우가 집도의에게 ‘멍청한 새끼’라 말했던 것 따위는 금방 잊어 버린 은비다.
**
건우가 버리고 가버린 지수와 김다혜 환자의 어머니.
지수는 지나던 남자 간호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병상 옆 보호자용 의자에 어머니를 앉힌 후 등을 토닥거린다.
“어머님, 급성 충수염 수술은 시간도 짧아요. 금방 나올 테니까 그만 진정하세요.”
“흐흑, 흐흐흑.”
아무리 진정시키려 해도 쉬이 진정되지 않는 어머니. 그녀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병원 방침이라지만 그것 때문에 병원에 온지 네 시간이 다 되도록 응급실에 방치된 상태로 앓는 딸을 봐야 했던 어머니 심정은 분명 이해할 만 하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건 시스템이다. 대형 병원에 소속되어 있어 참을 수 밖에 없지만 이런 시스템이 환자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면피하려는 생각뿐이지.’
문제를 최대한 만들지 않는다.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피한다.
어차피 죽을 환자라면 받지 않는다.
우리 병원에서 테이블 데스는 일어나선 안 된다.
이것이 대학병원의 방침이다. 아니, 속이 쓰리지만 사실 대부분의 대형병원의 방침이기도 하다. 물론 김다혜 환자 같은 케이스의 사태는 병원 때문이 아니라 무지한 기자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만 그 무지한 기자가 쓴 기사를 읽은 대중도 무지하다는 것이 문제다.
“하…….”
계속 울기만 하는 어머니를 달래던 지수의 눈에 무표정한 얼굴로 응급실로 돌아온 건우가 보였다.
‘싸가지 없는 자식!”
어머니는 건우의 모습이 보이자 얼른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춤거리며 일어난다. 멀리서 지수와 어머니를 본 건우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잔뜩 불안한 시선을 던지는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던 건우가 손목시계를 확인한 후 말했다.
“김다혜 환자, 충수돌기 박리 완료했습니다. 봉합 후 회복실에 들러 마취가 풀리는 시간까지, 앞으로 두 시간 내로 돌아올 겁니다.”
나름 쉽게 말한다고 했지만 그게 괜찮다는 뜻인지, 단순 처치만 했다는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어머니가 비틀비틀 달려와 건우의 손을 꽉 붙잡았다.
“우리 다혜 괜찮은 건가요, 선생님?”
건우가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자나깨나 자식 걱정뿐인 어머니의 눈빛. 꼭 우리 엄마를 보는 듯 하다. 바로 그때, 건우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며 콕콕 아프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살짝 인상을 쓴 건우. 그의 표정으로 인해 다시 불안감을 드러내는 어머니.
“서, 선생님? 무슨 일 있는 건가요?”
건우가 살짝 불편한 듯 몸을 구부린 후 말했다.
“아닙니다, 배가 좀 아파서요.”
“아…….”
또 왜 이러는 거지? 진짜 검사해 봐야 하나? 건우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그녀에게서 자신에게로 전해진다.
“모레쯤엔 아이가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겁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우가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렸다. 흐뭇한 상황임이 분명한데 두 사람에게서 몸을 돌린 건우의 표정은 놀라움에 차 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는 건우.
‘갑자기 아프지 않다.’
뭐지? 왜 두근거리며 찌릿찌릿 아프다가, 또 순식간에 나아지는 거지?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