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83)화 (83/84)

83화.

칼을 빌려 딱 한 조각을 썰어 낸 후, 나머지 케이크를 다시 상자에 넣어 리본을 곱게 묶은 카일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블레어도 천천히 포크를 들어 음식을 맛봤다. 이 펍은 예나 지금이나 주방장의 솜씨가 좋은 곳이었다.

카일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눈을 빛내며 조잘거렸다. 배경처럼 깔리는 카일의 조잘거림이 나쁘지 않았다.

“맛있죠?”

“그러게. 펍이라서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정말 맛있는데?”

“그렇죠. 저도 좋아하는 곳입니다.”

“와 본 적이 있는 거야?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던데.”

카일이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곳이 아니고, 다른 곳이긴 하지만. 뭐, 그렇습니다.”

블레어가 얼버무리자 카일이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이 천천히 방을 빠져나왔다. 바쁘게 손님을 맞던 릴리가 두 사람이 나온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다가왔다.

“들어가 보겠네.”

“예.”

금화를 꺼내 값을 치른 블레어가 작게 미소 지었다.

“또 들르지.”

거기까지 이야기한 블레어가 문을 끼익 열었다. 릴리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블레어 님, 카일 님.”

낯선 사람에게 이름이 불린 카일이 잠시간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블레어와 릴리가 제법 가까워 보이는 것을 보고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온 블레어가 카일의 손을 천천히 잡았다. 순순히 손을 내준 카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보고 짧게 감탄했다.

“와!”

하늘하늘 눈이 오고 있었다. 함박눈이라기엔 어설프고, 진눈깨비라고 하기엔 제법 눈발이 굵었다.

“눈이 온다.”

“그러게요. 올겨울은 좀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려나.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좋다.”

손을 꼭 쥔 카일이 블레어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었다. 블레어도 같이 마주 보며 웃을 수밖에 없는 상큼한 미소였다.

한참 동안 눈을 맞으며 거리를 걷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눈에 띄는 숙박업소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건물 안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넓은 방을 배정받았다. 방에는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녹이고 밖으로 나오니 카일이 침대 옆 협탁 위 투명한 잔에 와인을 따라 놓고 있었다. 블레어가 천천히 침대 위, 카일의 옆자리에 앉았다.

블레어가 나온 것을 확인한 카일이 배시시 웃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곱고 가녀린 선이 조금씩 굵어져 남자다운 맛이 더해지고는 있었지만, 카일의 얼굴은 오늘도 최선을 다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카일이 웃을 때마다 주변이 꼭 반짝반짝하는 것 같았다. 카일이 어깨에 걸쳐 둔 수건을 빼 블레어의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 주기 시작했다.

얌전히 등을 내준 블레어가 카일의 손길을 받았다. 카일은 의외로 손끝이 야무진 편이었다. 길고 가느다랗고 매끈한 손의 모양새만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블레어의 편견이었다.

머리끝에 남은 물기까지 꼼꼼히 닦아 낸 카일이 홀짝홀짝 와인을 마시는 블레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카일은 목덜미를 물거나 어깨 위에 턱을 괴고 블레어와 살갗을 부비는 것을 꽤 좋아했다. 객실은 따뜻했고, 밖은 눈이 오고 있었으며, 오늘은 기분 좋은 휴일이다.

블레어는 그렇게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 와인 한두 잔 정도로는 그다지 취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취기가 오르는 속도가 좀 빨랐다. 블레어가 와인 잔을 옆에 놓인 협탁에 올려놓았다.

“그만 마실 거야?”

“응.”

블레어가 느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젖혀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귓가가 조금 붉어진 카일이 서둘러 블레어가 가져온 초콜릿 상자를 열어서 조각 하나를 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예쁘게 모양을 낸 초콜릿이 혓바닥 위에서 녹진녹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와인의 쓴맛을 초콜릿의 단맛이 묻어 버렸다.

블레어가 입 안에서 혀로 초콜릿을 도록도록 굴렸다. 그의 입에서 작은 허밍이 흘러나왔다. 기분이 몹시 좋았다. 음식은 맛있었고, 방 안은 따뜻했으며 좋은 날에 좋은 사람과 함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카일이 물었다.

“맛있어?”

“예. 맛있네요. 당신도 하나 줄까요? 먹어 봐요.”

그렇게 이야기한 블레어가 카일의 품에서 등을 떼고 초콜릿 상자에 팔을 뻗었다. 하지만 카일이 블레어가 뻗은 팔을 잡아 내렸다. 그대로 자신의 품으로 다시 블레어를 끌어온 카일이 그의 턱을 잡아 깊게 입을 맞췄다.

카일의 혀가 입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진득한 초콜릿을 휘저었다. 주방장이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초콜릿이 무자비한 혀의 침입으로 그 형태를 잃고 녹아 갔다. 초콜릿이 톡 깨지면서 그 안에 들어 있던 약간의 술이 흘러나왔다.

카일이 고개를 더 꺾다시피 하며 입을 맞추어 블레어의 입 안에 남아 있는 초콜릿을 혀로 맛봤다. 꼼꼼하게 입 안을 애무하자, 자연스럽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초콜릿이 다 녹아서 사라질 때까지 깊은 입맞춤이 오갔다. 꼼꼼하게 입 안에 남아 있는 단맛까지 싹싹 핥아 먹은 카일이 기분 좋게 고개를 떼어 냈다. 자세가 허물어진 블레어가 반쯤 카일의 품에 기대듯 안겨 있었다.

“맛있네.”

카일이 씩 웃었다. 방금 그 정도의 농탕질을 했으리라곤 믿지 못할 정도로 순진하고 선해 보이는 미소였다.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잔뜩 타액으로 젖은 입술뿐이었다. 블레어가 배시시 웃는 카일에게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언제나 느끼지만 모네터리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좋아. 황궁으로 초빙해야겠어.”

“어려울걸요. 우리 집이 급여를 더 챙겨 줄 텐데.”

블레어의 대답에 카일이 씩 웃었다.

“이런. 그러면 역시 이렇게 맛보는 수밖에 없겠네.”

“초콜릿 다시 줘요?”

“아니, 그거 말고. 이번에는 케이크 쪽이 좋겠는데.”

“케이크요?”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협탁 위에 놓아둔 케이크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공단으로 만들어진 긴 리본이 카일의 가느다란 손끝에서 풀려 나갔다. 퍽 부드럽고 튼튼해 보이는 끈이었다. 카일이 케이크를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블레어가 그 사이 다시 와인 잔을 집어 들고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낸 카일이 블레어의 입에 조각을 넣어 주었다. 블레어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그 위에 놓인 딸기 장식이 입안에서 톡 터지며 과즙을 뱉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술기운이 오른 블레어가 본심에 담겨 있는 말을 꺼냈다.

“왜?”

“그러게요.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을 만났거든요.”

“그래? 오늘?”

“예.”

블레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뭐, 기분이 나쁜 것은 아녜요. 반가운 사람도 보고, 오늘은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성탄절이잖아요.”

블레어가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공단 끈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카일이 봐도 오늘은 블레어의 전체적으로 기분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카일이 블레어의 손에 들려 있는 공단 끈을 스르륵 잡아 뺐다. 부드러운 끈이 저항 없이 빠져나갔다.

블레어의 등을 받치고 앉아 있던 카일이 순식간에 몸을 빼 블레어의 위에 올라탔다. 등을 받치고 있던 지지대가 사라지자 블레어가 속절없이 침대 위로 넘어졌다.

“……카일?”

블레어가 깜짝 놀라는 것도 잠시, 그의 위에 올라앉은 카일이 블레어의 양팔을 단단하게 결박했다.

“카일?”

물론 무예 실력은 카일보다 블레어 쪽이 월등했다. 대등하게 칼을 들고 겨룬다면 블레어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래에 깔려 있을 때 체중을 실어 누른다면 블레어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일단 두 사람 사이에는 피지컬적인 차이가 있었다. 카일이 블레어보다 체격이 더 좋았다. 무척 곱고 예쁜 얼굴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체격이었다.

카일이 블레어를 내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살짝 젖어 있는 머리카락이 꼭 물을 잔뜩 머금은 꽃 같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이런 각도에서도 잘생겼다니. 블레어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블레어의 손목을 요령 있게 한 손으로 모아 잡은 카일이, 아까 블레어가 만지작거리던 공단 끈으로 손목을 묶기 시작했다.

“뭐예요?!”

블레어가 당황해 버둥거렸지만 카일이 조금 더 빨랐다. 케이크를 이중으로 묶었던 공단 끈은 충분히 길었고, 당연히 블레어의 손목을 여러 번 감아 묶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요령 좋게 후다닥 손목을 모아서 묶은 카일이 그 끝을 침대 헤드에 묶었다. 단단히 묶인 팔이 침대 헤드에 고정되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뭐예요, 진짜.”

블레어가 투덜거리며 몸에서 얌전히 힘을 뺐다. 더 움직여 봤자 기운만 빼는 일이다. 적당히 올라와 있는 취기는 마음을 평상시보다 너그럽게 만들었다.

“끈이 너무 부드럽고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케이크만 포장하기는 아깝잖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블레어가 허탈하게 웃었다. 카일은 블레어의 타박에 개의치 않고 그저 배시시 웃었다.

“오늘은 그냥 어울려 줘.”

그렇게 이야기한 카일이 블레어의 입에 쪽 입을 맞췄다. 꼭 오랜만에 만난 반가운 주인의 얼굴을 싹싹 핥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

블레어가 고개를 틀어 시선을 살짝 피했다. 저 얼굴에는 언제나 마음이 약해진다. 블레어의 기분이 풀어진 것을 잘도 눈치챈 카일이 화사하게 웃었다. 카일이 블레어가 입고 있던 가운을 풀어냈다. 허리끈으로 겨우 앞섶만 여며 놓은 가운이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풀렸다.

군살 없이 매끈한 몸이 드러났다. 카일이 배시시 웃으면서 쪽쪽 맨살에 입을 맞췄다. 카일이 옆에 잘라 둔 케이크를 다시 블레어의 입에 넣어 주었다. 팔이 들린 채로, 블레어가 얌전히 입 안에 들어온 케이크를 받아먹었다.

블레어가 오물거리는 모습을 본 카일의 눈이 반짝거렸다. 카일이 케이크에 발려 있는 크림을 듬뿍 떠서 블레어의 몸 위에 올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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