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82)화 (82/84)

82화.

보석점에 들어간 블레어가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보석들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카일은 워낙 얼굴이 화려해 무엇을 착용해도 다 잘 어울렸다. 오히려 소박한 보석보다는 화려한 보석을 착용할수록 얼굴이 돋보이는 쪽이었다.

그 어떤 걸 선물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블레어의 시선을 잡아챈 것은 시계였다. 품에 가지고 다닐 만한 크기의 작은 시계는 최근 들어 멋을 안다는 귀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였다. 시계 뚜껑 안쪽에 정교하게 새겨진 무늬나 전체적인 장식이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금으로 만든 테두리에 작게 박아 넣은 페리도트와 사파이어들은 카일의 외양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작은 보석으로 세공된 회중시계를 구입한 블레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는 가족들, 연인들의 모습이 무척 좋아 보였다. 블레어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블레어가 광장에 문득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싸라기눈이 내리던 며칠 전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청명한 하늘이었다. 물론 지나가는 바람은 몹시 찼고, 찬바람이 들어오는 코도 시큰거렸으며 손끝도 시렸다. 하지만 하늘이 워낙 청아하고 맑아 그런 것은 모두 상쇄되는 기분이었다.

블레어가 발을 까딱거리면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도 나름대로의 맛이 있었다. 수백 명, 수천 명의 사람들을 지나 보내자 그때서야 블레어의 어깨를 짚어 오는 손이 있었다.

“블레어! 많이 기다렸어?”

카일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강아지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환영이 보였다.

“아니에요. 약속 시간이 아직 안 됐는데, 일찍 나오셨네요?”

“이렇게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지.”

카일이 배시시 웃으며 블레어의 손을 덥석 잡아 왔다. 그가 추운 곳에 있다 보니 꽁꽁 얼어 버린 블레어의 손을 조물조물 주물러 주었다. 카일이 블레어가 들고 있던 상자를 반대쪽 손에 들었다.

“갈까요?”

“응.”

두 사람이 천천히 번화가를 걷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다정한 연인들과 화목한 가정들 속에서, 그들도 제법 잘 어울리는 연인 같아 보였다.

상점가의 중심으로 들어가자 인파가 더욱 많았다. 반쯤은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카일이 블레어의 차가운 손을 잡아 자신의 외투 주머니에 쏙 찔러 넣었다.

중심가로 갈수록 익숙한 상점들이 보였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보았던 상점들도 여럿 있었다. 물론 서른셋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점들도 많았다. 블레어가 감회 섞인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았다.

“저 가게는 새로 생겼나 봐. 건물이 완전히 새 거네.”

카일이 맞은편을 콕 찍으며 블레어의 시선을 빼앗아 갔다. 카일이 짚은 곳을 본 블레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카일이 가리킨 곳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즐겨 다니곤 했던 릴리의 펍이었다.

“그러네요.”

그렇게 대답한 블레어가 그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갓 오픈한 펍에 그렇게 줄기차게 드나들곤 했더랬다.

“우리 잠깐 들러 볼까요? 갑자기 가 보고 싶네요.”

“펍에?”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이나 소란스러운 곳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블레어의 성미를 아는 탓이었다. 그래도 카일은 굳이 만류하지 않고 사르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천천히 펍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깥과는 다른 더운 공기가 얼굴을 확 덮쳐 왔다.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블레어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걸렸다. 이렇게 과거를 뚜렷하게 떠올리게 하는 곳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황도에 나와서 이렇게 길을 걸을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이곳에 과거와 같은 펍이 생겼을 거란 생각을 해 보질 못했었다. 카일이 슬쩍 옆에서 걷고 있는 블레어를 내려다보았다. 블레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의 표정이 말랑말랑하게 풀려 있었다. 블레어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카일도 덩달아 들뜬 모양이었다.

문에 걸어 둔 풍경 소리를 들은 주인이 저기 구석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으러 나왔다. 호리호리한 실루엣을 확인한 블레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검고 긴 머리카락. 그보다 훨씬 새카만 검은색 눈동자. 블레어가 알고 있는 이 펍의 여주인이었다. 기억하고 있는 얼굴보다 분명히 십여 년은 젊을 텐데, 기억 속의 얼굴과 별달리 차이도 없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묻혀 있던 블레어의 기억을 끌어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이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두 분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블레어가 대답했다. 여주인, 릴리가 웃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조용한 방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아니면 홀에 나와 계시겠어요?”

“오늘 성탄절이라 여러모로 붐빌 것 같은데,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카일이 블레어의 의견을 물어 왔다.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이 이 층에 있는 작은 방을 내어 주었다. 적당히 주문을 마친 블레어가 카일을 두고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밤이 되며 펍이 채워지고 있었다.

블레어가 그 모습을 이층의 난간에 팔을 얹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익숙한 공간인데, 이곳이 더없이 낯설게 다가왔다. 굉장히 새삼스럽고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뒤에서 여주인이 다가와 인기척을 냈다. 블레어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방긋 웃은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글라디우스 공작님.”

그 말을 들은 블레어가 쩡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블레어의 표정을 본 릴리가 눈을 둥글게 휘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한참을 그러고 서 있던 블레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래, 그랬군. 자네였어.”

블레어는 이제 막 성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린 청년이었고, 릴리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으로도 보이는 농염한 여인이었다. 당연히 외양은 릴리 쪽이 훨씬 연상으로 보였다. 아무리 블레어가 귀족가의 자제라지만, 이런 말투는 분명히 적잖은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말투의 어색함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그랬군.”

고작 한마디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함축되어 있었다. 블레어도, 릴리도 이 짧은 몇 마디의 대화만으로 서로가 무엇을 파악했는지 이해했다. 블레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왠지 목이 메어 들었다. 왠지 조금쯤 울컥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같은 순간을 살아가고 있으니 언제고 다시 뵙게 될 줄은 알았지만 저 역시 그게 오늘인지는 몰랐습니다. 오픈하고 처음 맞는 성탄절인데, 귀한 손님을 모시게 되었군요. 편안히 쉬시다 가셨으면 합니다.”

릴리가 아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블레어를 스쳐 지나갔다. 블레어는 굳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블레어가 그녀의 뒤에 대고 짧게 중얼거렸다.

“시간이 되면 종종 오도록 하겠네.”

“물론입니다.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아, 맡겨 두신 호벌론은 아론 님께서 다 드셔 버리셨어요. 다시 주문하셔야 해요. 저도 한 팔 거들었지만, 설마 절 나무라시지는 않으시겠죠?”

릴리가 돌아보며 눈을 짓궂게 찡긋거렸다.

“하하, 그랬군. 잘했네, 잘했어. 더 마셔 놓고 달아 두지 그랬나.”

릴리가 농담을 하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온 블레어가 못 말린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녀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쯤 꼭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나 역시 그랬네. 이렇게 만나니 몹시 반갑군.”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한참 어린 얼굴을 한 블레어를 바라보는 릴리의 표정이 따뜻했다. 지금의 블레어에게는 과거의 그가 잃어버렸던 싱그러움이 있었다.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이제야 그가 맞는 자리를 찾아온 것 같았다.

릴리는 블레어가 이번 생은 훨씬 더 잘 살기를 바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마녀의 입맞춤에는 축복이 깃들어 있다. 염원을 담은 축복이 잠시간 블레어의 뺨에 머물렀다.

“편히 쉬다 가십시오.”

인사를 한 릴리가 자리를 떠났다. 블레어는 릴리를 보내고도 2층 난간에 한참을 기대 서 있었다.

블레어는 굳이 그녀에게 시간을 돌린 후의 미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죽은 채로 그 세상은 잘 굴러갈 수도 있었고, 그녀가 시간을 돌려 버렸으니 아예 그 후가 모두 단절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블레어는 굳이 그 다음을 확인하려고 하지는 않기로 했다. 묻어 두는 게 더 나은 진실도 존재하는 법이다.

릴리가 자신을 왜 과거로 돌려놓았을까. 블레어로서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블레어는 성급한 질문으로 현재의 평안을 깨지 않기로 했다. 그도, 릴리도 지금이 모든 퍼즐의 조각이 조각조각 맞춰진 완벽한 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릴리는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현명한 사람이니 이번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방문이 빼꼼 열리면서 카일이 나왔다.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고 나온 블레어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카일을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최대한 평상시처럼 웃으려고 노력했지만 표정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블레어의 옆으로 다가온 카일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카일이 꼼지락거리며 블레어의 손을 잡아 왔다. 블레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들어가요, 우리. 식사해야죠. 문득 그리운 기억이 나서요.”

블레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일이 고개를 양옆으로 갸웃갸웃했다. 하지만 블레어가 웃자 그저 카일도 배시시 따라 웃었다.

이미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음식을 먹기 전, 블레어가 주방장에게 일러 준비해 온 상자를 풀었다.

“집에 부탁해서 만들어 온 거예요.”

어린아이 주먹만큼 커다란 딸기가 둥글게 올라가 있는 케이크였다. 주방장이 솜씨를 부린 티가 났다. 나머지 작은 상자에는 예쁘게 모양을 낸 초콜릿이 들어 있었다. 카일은 어울리지 않게 상큼한 맛이 나는 딸기를 좋아했다. 내용물을 확인한 카일이 배시시 웃었다.

“맛있겠다.”

“조금만 맛보고 챙겨 가요. 전부 다 가져가도 되고요.”

“네가 가져다줬는데 어떻게 내가 혼자 홀랑 들고 가. 조금만 먹자.”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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