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81)화 (81/84)

81화.

Al coda Ⅲ: 메리 크리스마스

연말, 일 년을 마무리하는 시기가 되면 모두가 바빠지기 마련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결산도 해야 할 것이고, 약속들도 늘어난다. 연락이 뜸했던 사람들과도 자리를 가져 오랜만에 회포를 풀기도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맛있는 요리를 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크라시아 제국은 연말에 꽤 의미 있는 휴일이 있었다. 몇천 년 전의 성인이 나셨다는 날이었다. 성인이 나신 날이라고 해서, 성탄절이라고 불리는 휴일이었다. 성탄절은 제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일 중 하나였다. 제국에는 건국절처럼 성탄절보다 의미가 훨씬 큰 휴일들도 있었지만, 성탄절은 연말에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휴일이었다.

연말이 마무리되기 딱 일주일쯤 전에 자리한 휴일. 사람들은 그날을 핑계 삼아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고, 여유로운 휴식을 즐기기도 한다. 가족들과 두런두런 다정하게 모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기도 한다.

당연히 블레어와 카일도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휴식에 들어가고 있었다. 카일이 이번 성탄절에는 자신이 솜씨를 부려 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물론 대부분의 요리는 요리사들이 준비해 주었고, 블레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하나만 주방장의 도움을 받아 카일이 완성시켰다.

따끈따끈하게 김이 오르는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블레어가 그 옆에 와인병을 내려놓았다.

“앉아요.”

블레어가 어수선하게 주방과 식탁을 오가면서 음식을 내오고 있는 카일에게 손짓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카일이 씩 웃으며 마지막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블레어가 두 사람의 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기울여 짠 부딪힌 후 와인으로 입술을 축였다. 와인을 한 모금 삼키고 잔을 내려놓은 블레어가 고개를 살짝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오네요.”

“그러네. 올해는 눈이 안 올 것 같았는데.”

“작년에도 성탄절 전후로 춥지 않아서 눈이 안 올 것 같았는데 왔잖아요.”

“하긴, 작년에도 성탄절에 눈이 왔었지.”

천천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던 블레어가 작년, 오늘을 떠올렸다. 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 * *

클라라는 꼬박 한 달 전부터 상단 전체에 장식을 매달고 기분을 냈다. 사람들의 씀씀이가 너그러워지는 계절이라며, 그녀는 세달 전부터 성탄절을 손꼽아 기다렸다. 클라라는 그날 전후로 이런저런 할인 행사까지 준비한다면 정말 물건을 없어서 못 팔 정도라며 잔뜩 신나 했다. 클라라처럼 성탄절부터 시작해 연초까지 진행되는 황금기는 상가에서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기간이기도 했다. 당연히 상가의 느낌이 강한 모네터리가의 사람들도 모두 성탄절을 좋아했다.

물론 그 속에서 자라난 블레어도 그랬다. 연인이나 가족과 보내는 날이라는 느낌이 주는 안온함도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들뜬 집안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에는 클라라가 상단이 유래 없는 흑자를 기록했다며 모네터리가와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성과급을 뿌렸다. 세 달 급여에 맞먹는 성과급이라며 사람들이 들떴다.

덕분에 원래도 활기찬 모네터리 영지는 평상시보다 더욱 복작복작했다. 사람들이 예쁜 옷과 외투, 그리고 부담스러운 금액대의 선물들을 구입했다. 평상시에는 쉽게 먹지 못하는 고급스러운 식재료들도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동요 가락도 꽤나 듣기 좋았다.

마침 아카데미도 겨울 방학을 시작한 상태였다. 일 년에 걸친 한 학기가 마무리되면 비교적 긴 방학이 시작된다. 이번에도 거의 세 달 가까운 휴일이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월반을 하게 되어 곧장 상급반으로 넘어간 터라 여러모로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블레어는 올해도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덕분에 긴 방학에 들어가는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는 방에 준비된 벽난로에도 불을 때기 시작했다. 벽난로에서 나는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은은하게 채웠다. 창가에 앉아 겨울이 도착한 외로운 정원을 내다보자 조금쯤 마음이 쓸쓸해졌다.

한참을 그렇게 정원을 내려다보던 블레어가 몸을 일으켰다. 블레어가 곱게 걸려 있는 외투를 입고 집을 나섰다. 작년, 성년이 된 기념으로 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고급 외투였다.

“도련님, 외출하세요?”

“응, 바람 좀 쐬다 오게.”

“식사는 하고 들어오실 건가요?”

“아니야. 그냥 한 바퀴 둘러보고 올 거야. 저녁 때맞춰서 올게.”

“마차를 준비시킬까요?”

“아니야, 걸어 나갈 거니까. 들어올 때도 알아서 올 테니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오늘 하늘이 우중충한 게 꼭 눈이 올 것 같아요. 장갑이랑 모자 쓰고 나가세요.”

사용인이 부랴부랴 블레어에게 모자와 장갑을 가져다주었다. 사용인의 도움으로 완전무장을 마친 블레어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와 잘 어울리는 남색 코트를 입고 가죽으로 된 장갑을 착용하자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았다.

성탄절이 바짝 앞으로 다가온 상점가는 온통 반짝반짝했다.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고, 아이들은 발랄하게 거리를 뛰어다녔다. 순록이 끄는 선물 마차도 모형으로 만들어져 상점가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모형 순록을 한 번씩 만져 보고 웃으면서 지나갔다.

블레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모네터리가의 막내아들을 알아본 상점가의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해 왔다. 블레어가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블레어는 모네터리 저택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생명력을 좋아했다. 이렇게 추운 겨울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잔뜩 빨개진 코끝과 터진 뺨까지도 사랑스러웠다.

블레어가 상점가를 돌며 가족들의 선물을 하나씩 골랐다. 클라라의 몫으로는 최근 가장 인기가 있다는 황도의 조향사에게 향수를 주문해 두었고, 테오도르의 몫으로는 얼마 전에 고서점에 풀린 책을 구입했다. 부모님께도 두 분의 취향을 맞춘 선물을 구입했다. 돈을 얼마 쓰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양손이 묵직했다. 마차를 부른 블레어가 선물을 들고 올라탔다.

마차는 순식간에 짐과 블레어를 모네터리 저택에 내려 주었다. 선물을 방에 보관한 후 펜을 들어 편지를 남겼다. 고급스럽게 가공된 종이 위에 깃펜이 끼적끼적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게 남길 편지를 마무리 짓고, 멀리 타클라마칸 영지에 있는 아론에게 보낼 카드와 선물까지 준비하니 어느덧 늦은 시간이었다. 아론같이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보낼 선물들은 내일 아침에 보내고, 가족들에게 드릴 선물은 전야제에 나누면 될 것 같았다.

성탄절 전야제에 온 가족이 한데 모이는 것은 모네터리가의 오랜 가풍이었다. 그때 모든 가족 구성원들이 준비한 작은 선물을 나누었다. 당연히 식탁은 평상시보다도 훨씬 풍성했다. 올해는 클라라가 모두에게 쓸모없는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면서 괴상한 선물을 꺼내 들어 분위기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블레어는 클라라에게서 어린아이의 손에나 겨우 맞을 법한 크기의 털장갑을 선물 받았다. 클라라가 준비한 선물 중에서 블레어의 것이 가장 정상적이라는 게 숨겨진 함정이었다. 가족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클라라의 선물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 두었다.

도란도란 맛있는 음식을 서로의 접시에 덜어 주며 식사를 끝내자,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성탄절이 부쩍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블레어도 내일은 약속이 있었다. 아마 집안 식구들도 모두 약속이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부부 동반으로 다른 귀족 가문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가신다고 이미 말씀해 두신 상태였고, 클라라는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날 거라고 잔뜩 들떠 있었다. 테오도르의 행선지를 캐묻지는 않았지만, 말을 꺼낼 때마다 귀가 붉어지는 게 누굴 만나러 갈지 빤했다.

성탄절 당일, 블레어가 주방으로 내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오랫동안 모네터리가에서 일하고 있는 주방장이 블레어를 기쁘게 맞아 주었다.

“막내 도련님!”

“휴가 안 갔어?”

블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탄절 당일과 이튿날은 모네터리가의 모든 사용인이 쉬는 날이었다.

“도련님 뵙고 가려고 했죠. 저한테 부탁하신 것도 있는데 어떻게 그냥 갑니까?”

“그냥 놔두고 가면 될 것을. 내가 애도 아니고, 알아서 챙겨 갈 텐데.”

“곧 독립하실 수도 있는데, 앞으로 도련님이 제게 부탁을 하시면 얼마나 더 하신다고요. 제가 좋아서 남아 있는 거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주방장이 예쁘게 포장된 상자 두 개를 건네주었다. 블레어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런 것을 부탁하시는 걸 보니, 마음에 드시는 아가씨라도 생기신 모양이죠?”

주방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잘 손질된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것은 아니야.”

블레어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우리 막내 도련님이 이렇게 장성하게 자라셨다니. 저는 언제나 감격스럽답니다.”

주방장이 웃으며 블레어의 어깨를 떠밀었다.

“어서 가 보셔야죠.”

“그대도. 가족들과 행복한 하루 보내게.”

블레어가 살짝 웃으며 두 개의 상자를 들고 주방을 벗어났다.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은 블레어가 집을 벗어나 마차를 탔다. 황도에 도착하면 정오쯤이 될 것 같았다. 카일의 선물을 마저 사고, 그를 만나면 될 것 같았다.

드물게 날씨가 화창했다. 눈이 와도 좋을 것 같았는데, 또 이것은 이것대로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황도의 상점가도 모네터리 영지 못잖게 왁자지껄했다. 평상시보다 오가는 행인도 훨씬 많았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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