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80)화 (80/84)

80화.

블레어가 아이를 자연스럽게 안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벌써 제법 자란 아이가 꽤 묵직해져서 이젠 오랜 시간을 안아 주지 못할 정도였다. 바쁜 학생 둘이 사는 집이다 보니,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하루에 한 번씩 오갔다. 부엌에 놓인 그릇에 따뜻한 스튜가 들어 있었다. 스튜를 퍼서 데인의 몫으로 내준 블레어가 자신의 몫도 덜어 냈다.

“오늘은 뭐 했어요?”

“형님이 책 읽어 줬어.”

“책?”

“응.”

“무슨 책 읽었어요?”

“건국사.”

“되게 재미없는 거 읽었네요.”

“아냐, 재밌었어.”

“호랑이 나와서?”

데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말을 하는 호랑이라니. 확실히 어린아이가 좋아할 만한 소재였다. 블레어가 데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머리카락은 올이 카일의 것보다 더 가늘었다. 가느다란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면 됐죠. 우리는 뭐 하고 놀까요?”

“음. 장난감?”

“장난감?”

그렇게 이야기한 데인이 블레어의 무릎에서 쪼르르 내려가서 장난감을 가지러 사라졌다. 블레어는 아이의 교육 시간을 현저히 줄여 버렸다. 어린아이에게 지나친 강도의 수업을 시켜 봤자 공부에 거부감만 일으킬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블레어만 해도 대귀족가의 아들이지만 어릴 적 그렇게 강도 높은 수업을 듣지는 않았다. 블레어는 아이가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도록 두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그래 봤자 데인이 식탐이 많거나 욕심이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두자 더욱 마음이 편해진 게 눈에 보였다.

데인은 사람에게 붙어 있는 것을 유달리 좋아했다. 카일하고도 나름대로 잘 어울렸지만, 데인은 블레어만 눈에 보이면 카일에게서 꾸물꾸물 내려와 그에게 찰싹 붙었다. 무릎이나 다리 위에 앉혀 주는 것도 좋아했다. 그렇게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면 온몸이 따끈따끈해졌다. 가죽 탕파에 따뜻한 물을 채워서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데인.”

“응?”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안 들어요?”

블레어가 물었다. 아무리 블레어나 카일이 아이를 잘 돌본다고 해도, 황궁에서 자라는 것과는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는 대외적으로 황자라고 공표할 수도 없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불편한 것 없이 신경을 쓴다고 해도 황궁과는 다를 것이었다.

워낙 아이가 돌아가기 싫어했고, 또 안쓰러운 마음에 덥석 데려와 키우게 되었지만 블레어는 종종 궁금해졌다.

“응.”

하지만 데인의 반응은 단호했다. 블레어가 데워 준 우유가 담긴 컵을 손에 꼭 쥔 데인의 표정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래요?”

“황궁에 가면 이런저런 사람들도 많고, 정원 같은 것도 여기보다 훨씬 넓고. 황궁이 더 좋지 않아요?”

“아니. 여기가 훨씬 좋아.”

“공부를 안 해서?”

블레어가 짓궂게 웃으면서 묻자 컵을 내려놓은 아이가 몸을 꾸물꾸물 뒤집어 블레어에게 찰싹 안겼다. 데인이 최대한 품에 파고든 후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가 더 좋아. 블레어도 좋고, 형님도 좋아.”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었다.

“그래도 친구는 있는 게 좋으니까, 나중에 비슷한 나이의 친구가 있을 만한 곳에 방문도 해 보고 그래요, 우리.”

블레어의 제안에 데인이 고개를 얌전하게 끄덕였다. 근교에 데인과 비슷한 어린아이가 있는 귀족 집안이 몇 군데 있으니 시간이 나면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데인을 품에 안고 어르고 있자 2층에 있는 방에서 카일이 내려왔다.

“왔어? 부르지 그랬어.”

“응. 뭐 하고 있었어요?”

“낮에 데인이랑 놀았던 물건 정리했지.”

“나중에 나랑 같이 하면 되죠.”

“에이, 시간 있는 사람이 빨리 치우면 좋지.”

카일은 의외로 집안 살림에 야무졌다. 정리 정돈도 잘했고, 요리도 무척 잘했다. 똑같이 제 손으론 그런 일 한번 하지 않으며 귀하게 컸을 게 뻔한데도 의외로 손끝이 야무져서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꾸준히 집안 살림을 돌봐 주는 사람이 들고나긴 했지만, 블레어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데인을 씻기는 것 외에는 집안일에 신경 쓴 적이 없었다. 언제나 집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의외인 것은 카일의 요리 솜씨였다. 워낙 귀하고 맛있는 것만 골라 먹고 자란 입맛이어서 그런지, 카일은 스스로 요리하는 것도 상당히 좋아했다. 물론 재료를 다듬고 칼질하는 쪽은 블레어가 훨씬 나았지만, 무언가 완성된 조리 식품을 내놓는 데는 카일 쪽이 월등했다.

“뭐 먹을까?”

“스튜 있던데요?”

“에이, 저녁은 따로 먹어야지. 앉아 있어. 금방 할 수 있는데, 뭘.”

카일이 식재료 몇 개를 뒤적거리며 들고 오더니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섰다. 작고 따뜻한 데인을 안고 카일이 요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 평화로운 기분을 선사했다. 도마 위에서 칼이 규칙적으로 통통 울리는 소리가 마음을 나른하게 가라앉혔다.

데인과 함께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블레어의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따뜻한 공기와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을 노곤노곤 풀어지게 했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 도마 소리. 식재료를 손질하는 소리들이 자장가가 되었다. 무릎에 얌전하게 앉아 책을 보던 데인이 고요해진 블레어를 살짝 돌아보았다.

조심스럽게 무릎에서 내려온 데인이 보드라운 이불을 가지고 와 블레어에게 덮어 주었다. 자그마한 단풍잎 같은 손으로 꼬물꼬물 어깨에 이불을 덮어 준 데인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불을 덮어 준 데인이 오종종 뛰어가 카일의 다리를 잡았다.

“형님.”

“응?”

데인을 내려다 본 카일이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돌아보았다. 블레어가 흔들의자에 앉아서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카일이 가늘고 부드러운 데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빠져나갔다. 가까이 다가가 블레어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카일이 싱긋 웃으며 데인을 돌아보았다. 검지를 하나 펴 입에 가져다 대자 데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똑같이 주먹 쥔 손에서 검지를 하나 펴서 입에 가져다 댔다.

두 사람 사이에 블레어가 모르는 작은 비밀이 생겨났다.

* * *

카일과 데인이 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데인은 심지어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걸어 다니기까지 했다. 두 사람 다 블레어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카일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의자를 조심조심 잡아 뺀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어 도란도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맛있니?”

블레어의 몫을 덜어 낸 카일이 음식을 식혀 데인의 접시에 담아 주었다.

“네.”

수저를 주먹으로 야무지게 쥔 데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는 귀족의 예법에 그리 익숙하지 않았지만, 블레어도 카일도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여기서 지내면서 불편하지는 않니?”

카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블레어가 깨어 있을 때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다.

“아니요.”

데인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여기가 훨씬 좋아요. 훨씬, 훨씬.”

데인과 카일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화려하고 복잡한 황궁에서 홀로 자란 사람들이었다. 카일은 고집스럽게 다물린 아이의 입매에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읽어 냈다. 카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데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간 갸웃거렸던 데인이 다시 자신의 접시에 집중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카일이 아직까지도 불편한 자세로 자고 있는 블레어를 안아 들었다. 블레어는 상당히 기감이 예민한 사람인데도, 오늘따라 깊게 잠들었는지 도무지 깨어나질 않았다.

데인을 방에 들여보내 재운 카일이 블레어를 안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햇빛에 오랫동안 말려 포근포근해진 침구에 조심스럽게 몸을 뉘여 놓고 방을 빠져나올 때였다. 블레어의 위로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 준 카일이 한참 동안 침대 옆에 서서 곤히 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졸업논문 준비와 아이를 돌보는 일, 익숙하지 않은 독립생활까지 겹쳐져서 그런지 살이 조금 내려 보였다. 내일은 블레어가 좋아하는 요리를 잔뜩 해야겠다. 카일이 허리를 굽혀 블레어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이마에 입을 짧게 맞춘 카일이 천천히 물러났다.

“카…… 일?”

블레어가 눈을 부비면서 일어났다.

“일어났어? 안 깨우려고 했는데. 더 자.”

“아니에요. 몇 시예요? 일어나야죠.”

“열 시.”

“많이 잤네요.”

블레어가 침대에 앉자 카일이 입술 위에 쪽 입맞춤을 남겼다.

“데인 님은?”

“방에 재워 놓고 나왔어.”

“잘했어요. 난 졸려서 더 잘래요.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저녁도 안 먹고?”

“배가 고프지는 않아요. 내일 먹을래.”

블레어가 다시 침대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이불을 고쳐 덮었다. 블레어가 눈을 감은 채로 침대 밖에 서 있는 카일에게 팔을 벌렸다. 그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고 있던 카일이 블레어의 신호를 이해하곤 자신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럼 나도 잘래.”

“예. 잘 자요.”

이미 불이 어둑어둑했던지라 두 사람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문이 끼익 열렸다. 문틈으로 커다란 인형을 안고 데인이 들어왔다. 데인이 꾸물꾸물 두 사람을 파고들었다. 블레어가 무의식적으로 품에 파고든 데인의 가슴팍을 도닥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 모두 단잠에 빠져들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한때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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