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못 데려다 드렸어요.”
“왜?”
“가기 싫다고 하셔서요.”
“그러면?”
“당분간은 제가 돌봐야지 어쩌겠어요.”
순식간에 짧은 대화가 오갔다. 블레어의 대답은 여상했지만, 그 말을 들은 카일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황자님 잘 돌보고 있어요. 수업 갔다 와서 근처에 집이나 구해 보죠.”
오늘 저녁 메뉴가 뭐더라? 그건 별론데.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블레어는 태평했다.
“저 수업 지금 곧장 들어가 봐야 해요. 끝나면 올 테니까 여기서 잘 놀고 있어요.”
그렇게 이야기한 블레어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손에는 데인의 손을 쥐고 블레어의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던 카일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 음.”
일단 카일이 몸을 낮춰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블레어가 기다리라고 하네? 나랑 여기서 같이 블레어를 기다려 볼까?”
데인이 고개를 얌전하게 끄덕였다. 그 눈빛이 블레어가 사라진 방향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데인을 번쩍 안아 든 카일이 벤치에 주저앉았다. 카일이 코를 훌쩍거리는 데인에게 자신의 겉옷을 걸쳐 주었다. 자기 몸만 한 외투를 걸친 데인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카일이 데인을 일으켰다.
“블레어가 올 때까지 여기 구경할까?”
소맷자락을 돌돌 접어 준 카일이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데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천천히 아카데미 안을 걷기 시작했다.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구경하던 데인이 멀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학생들에게 흥미를 보였다.
“저건 뭐예요?”
“수업을 하고 있나 보네. 말이 있는 걸 보니 승마 수업인가?”
그렇게 대답한 카일이 가까이 다가갔다.
교수며 학생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승마 수업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카일의 손안에 잡혀 있는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카일이 데인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보고 싶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일이 손을 잡고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말이 있는데다 수업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데인은 멀리서나마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말을 탄 학생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장애물을 넘는 모습, 말의 질주를 보며 손바닥을 짝짝 치면서 좋아하던 데인이 사레가 들렀는지 얕게 기침을 했다.
화들짝 놀란 카일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목이 마르니?”
카일의 물음에 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곧장 아카데미 안에 있는 작은 가게로 이동했다. 아이의 입맛에 맞는 달콤한 음료를 사 준 카일이 아까 블레어와 헤어진 곳으로 돌아와 벤치에 털썩 앉았다. 데인은 바닥에 다리가 닿지 않아 짧은 다리를 달랑거리며 음료를 마셨다.
수업이 끝난 블레어가 금발 머리 형제에게로 돌아왔다. 데인의 손을 잡은 블레어가 두 사람 몫의 외출증을 끊어 왔다.
“나가려고?”
“그래야죠. 아무리 어려도 외부인인데 기숙사에서 잘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집을 구해야겠죠?”
블레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가 아카데미 근처에 있는 모네터리 상단의 지부로 마차의 방향을 잡았다. 순식간에 마차는 거대한 지부 앞에 세 사람을 내려놓았다. 거침없이 상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은 블레어가 지부장을 불러냈다. 물론 곧바로 융숭한 대접이 펼쳐졌다. 5분 만에 뛰어온 지부장이 허리를 꾸벅 접으며 블레어에게 인사했다.
지부장에게 몇 가지를 부탁한 블레어가 편안하게 차를 홀짝거렸다. 허벅지 위에 얌전히 데인을 앉혀 놓고 있던 카일이 블레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블레어의 일면이었다. 카일의 눈빛을 알아챈 블레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평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뭐, 이 집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남용하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필요할 때 사용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블레어의 말을 들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인이 얌전하게 앉아 사람들이 내준 과자를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카일이 데인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닦아 주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잠깐 같이 있었다고 고새 가까워진 두 사람을 본 블레어가 부드럽게 웃었다.
순식간에 블레어가 원하는 집이 준비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와 아카데미에서 멀지 않아야 한다는 게 원칙이었다.
“도련님, 말씀하신 생필품과 가재도구를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세 사람을 새로 구한 아담한 집에 안내해 준 상단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블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블레어네 삼형제 중 성격이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라라는 성격이 이상하다기보단 괴짜에 가까웠고, 테오도르는 허허실실로 쪽이었다.
블레어도 성격이 꽤나 너그러웠다. 그렇지만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삼남매 중 제일 어린 블레어를 가장 어려워했다. 그가 한 번도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과거에 갖춘 위엄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그런 모양이었다,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물론이죠.”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상단 사람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이고 후다닥 사라졌다. 블레어가 데인의 손을 놓고 집 안을 돌아보았다.
급하게 준비한 게 뻔한 집인데도 집 안은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다. 데인이 사용할 만한 어린아이용 의복과 물건도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카일이 블레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상시엔 워낙 검소하게 다녀 저택에 갈 때가 아니라면 블레어가 대단한 부잣집 아들이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블레어는 돈을 쓰는 데, 그리고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외부에 집을 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결국 반 학기를 남기고 따로 집을 구하게 되네요. 뭐, 졸업 후에는 뭘 할지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미리 독립해 보는 것도 괜찮겠죠.”
카일이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낀 상태로 집 안의 물건을 꼼꼼하게 점검하던 블레어가 카일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블레어의 모습을 본 카일이 자동 반사적으로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새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물론 처음에는 블레어만 기숙사에서 독립해 나와 데인을 돌보려고 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독신이 어린아이를 혼자 돌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자연스럽게 카일도 기숙사를 벗어나 블레어가 구한 집에 짐을 풀었다.
블레어도, 카일도 마지막 학기를 보내고 있다 보니 수업이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 교대로 데인을 돌봤다. 둘 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리를 비워야 할 때면,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데인을 봐 주었다.
나라 제일의 상단의 막내아들인 블레어, 그리고 두 명의 황자가 지내는 곳이라고 하기엔 거처는 무척 소박하고 아담했다. 2층으로 이루어져 있긴 했지만, 집 자체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란색과 아이보리색으로 꾸며진 집은 충분히 안온하고 따뜻했다. 아기자기한 천 소품과 인형도 잔뜩 놓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기숙사에서 나오게 되어 아카데미를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이 늘어났지만, 블레어도 카일도 그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당분간 데인을 이쪽에서 돌볼 것이라고 통보하니 황궁도 별문제 없이 납득했다.
의외로 두 사람 중 육아에 더 능숙한 쪽은 카일이었다. 홀로 자라는 데인에게 동질감을 느끼는지, 카일은 꽤나 상냥하고 다정하게 데인을 돌봤다. 아이를 씻기고 먹이는 것도 모두 카일의 몫이었다.
데인이 먹을 음식의 조리도 카일이 도맡았다. 그중 제일은 아이를 재우는 솜씨였다. 데인은 꼭 블레어나 카일과 같이 잠들고 싶어 해서, 밤늦은 시간까지 억지로 깨 있으려고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삽화가 담긴 종이책을 가지고 데인과 카일이 침실로 올라가면,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재운 카일이 밑으로 내려오곤 했다.
카일도, 블레어도 마지막 졸업 논문만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여러모로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 다 집을 비우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데인이 잠들고 나면 온전히 두 사람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블레어와 카일은 평화로운 밤이 되면 신경을 가라앉혀 준다는 차를 한 잔씩 우려 놓고 책을 읽거나 논문을 쓰곤 했다. 가만히 기대 앉아 부드러운 침묵을 즐길 때도 있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출출해지면 카일이 솜씨를 부려 야식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자질구레하게 할 일도 늘었지만, 기숙사에서는 누릴 수 없던 평안함이었다.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던 데인은 어느새 두 사람과의 생활에 천천히 익숙해져 갔다. 홀쭉하던 뺨은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 통통하게 살이 올랐으며, 몸의 마디마디에 혈색이 돌았다. 숫기 없이 눈치만 보던 목소리와 표정도 활달해졌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적극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겨울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더욱 추워졌다. 블레어가 양털을 누빈 겉옷을 구해다 입혀 주었다. 예쁜 초록빛 염료로 염색한 겉옷은 아이의 초록색 눈동자와 잘 어울렸다. 양털로 만들어진 북슬북슬한 안감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데인은 최근에는 늘 그 옷만 입고 집 안에서 돌아다녔다. 작년, 클라라가 성탄절 선물로 블레어에게 줬던 쓸모없는 선물인 작은 털장갑도 데인의 물건이 되었다.
수업을 들으러 외출했던 블레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따뜻한 실내 공기가 확 얼굴에 끼쳐 들었다.
“블레어!”
짧은 다리를 쫑쫑 움직여 달려온 데인이 블레어의 다리에 동동 매달렸다. 블레어가 허리를 숙여 주자 데인이 양쪽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는지, 아이의 스킨십이 최근 상당히 늘어났다.
“잘 지냈어요?”
블레어는 데인에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이야기했다. 대외적으로는 블레어가 황자라는 것을 공표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반말을 사용했고, 그들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썼다.
“응, 잘 지냈어. 블레어는?”
“저도 잘 다녀왔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