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일요일까지 보내자 데인의 표정이 훨씬 부드럽게 풀어졌다. 모네터리 저택 안의 사람들은 모두 데인을 굉장히 좋아했고,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블레어가 사용하는 어투와 카일과의 관계를 보고 데인의 정체를 어림짐작한 모양이었다. 그의 신분을 떠나서, 순하고 사랑스러운 꼬마는 예쁨을 받을 만했다.
카일은 먼저 아카데미로 돌아갔고, 블레어는 월요일까지 모네터리가에 남아 있었다. 데인은 생각보다 무척 유순했다.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황궁에서 봤던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던 꼬마와 과연 같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크라시아 황가의 핏줄답게 고집이 있었다. 카일에게도 아드리아나에게도 있는 그 엄청난 고집. 떼를 쓰거나 우기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의 의견이 관철될 때까지는 눈을 말끄러미 뜨고 바라보곤 했다.
새록새록 옛날 기억이 났다. 블레어가 훌쩍 여행을 떠나겠다고 했던 때였다. 블레어는 원래도 방랑벽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과거로 돌아온 후 얌전히 아카데미와 집 안에만 박혀 살았더니 좀이 쑤셨다. 그래서 그는 지난 여름방학을 맞아 제국 전역을 돌아보는 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때 블레어는 카일과 가족들을 모두 떼어 놓고 혼자 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그에게는 혼자만의 시간과 여유가 필요했다.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던 블레어의 계획에 제동을 건 것은 카일이었다. 처음에는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쓰던 카일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블레어의 주장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카일은 그 후로도 여름방학 세 달 내내 여행을 가겠다는 블레어의 계획에 어깃장을 놓았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며 블레어의 여행을 방해했더라면, 오히려 그 논리를 깨부수며 홀가분하게 떠났을 텐데 입을 다물고 눈을 말끄러미 뜨고 블레어의 눈을 들여다보자 블레어도 속절없이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 달을 꽉 채워 계획했던 장기 여행이 반의반으로 토막이 나 보름 남짓한 짧은 여행이 되어 버렸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의 얼굴에 무척 약한 블레어는 또 마음이 흐물흐물 풀리곤 했다. 무시하기엔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월요일 오전, 블레어가 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 화사하던 꽃들이 거둬지고, 찬 기운이 감돌았다. 나뭇잎의 색이 점점 알록달록하게 변해 갔다. 아이를 안고 정원을 구경시켜 주던 블레어가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옆에 앉혀 놓았던 아이가 몸을 돌려 땅에 발을 딛더니 쫑쫑 걸어와서 블레어의 양 무릎에 손을 얹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안아 드릴까요?”
블레어가 웃으며 묻자 아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블레어가 아이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찔러 넣어 작고 가벼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양다리를 모아 허벅지 위에 아이를 앉히자 데인이 몸을 기대 왔다.
“블레어.”
데인이 블레어를 불렀다. 데인의 호칭에 블레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블레어?”
데인이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블레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문득 호칭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님, 블레어라고 부르시면…….”
안 됩니다, 라고 하려던 블레어의 말은 데인의 말간 눈빛에 끊어졌다. 황궁 안에서야 당연히 블레어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었지만 지금은 바깥이었다. 워낙 눈치 빠른 사용인들만 있으니 다들 대충 데인의 정체를 알고 있겠지만 공언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완전히 달랐다. 입이 무거운 사람들이니 데인의 정체를 안다 하더라도, 주인이 공언하지 않았으니 밖으로 새나 갈 일도 없었다.
그러려면 데인과 블레어가 입을 맞추는 게 중요했다. 거의 아들뻘인 데인이 블레어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블레어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모네터리 소백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했다.
데인의 호칭을 고쳐 주려던 블레어가 고민에 휩싸였다. 블레어가 일단 아이의 의견을 묻기로 했다.
“블레어라고 부르시렵니까?”
블레어의 질문에 데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레어라고 하면 안 돼?”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 블레어가 좋아.”
블레어의 무릎에 앉은 데인이 고개를 한껏 젖혀 블레어를 올려다보았다. 블레어가 깨끗한 이마에 입을 쪽 맞춰 주었다. 빛을 잔뜩 받은 초록색 눈동자에 정원을 떠나간 여름이 아직 남아 있었다.
카일의 완벽한 벽안도 아름다웠지만, 데인의 녹안도 나름대로 귀여운 매력이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푸른 기가 남아 있는 눈동자였다. 조금 더 자라고 나면 녹색 눈동자가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둥근 뺨과 낮은 콧대, 솜털이 오종종 돋아 있는 얼굴과 단풍잎같이 귀여운 손까지. 아무리 보아도 데인은 퍽 귀엽게 생긴 꼬마였다.
데인을 보자 이번 삶에도, 과거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아이를 갖는 꿈이 생각이 났다. 블레어는 과거에도 이번에도 귀여운 아이와는 여러모로 연이 적었다. 과거에는 결혼조차 하지 못한 채로 요절했고, 지금은 카일에게 또다시 코가 꿰어 버렸으니 여인과는 여러모로 인연이 없는 삶이다. 블레어는 아이들을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데다 순한 데인은 블레어의 마음에 쏙 들었다. 블레어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래요, 블레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으응. 알겠어.”
“그럼 갈까요?”
“응.”
블레어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오동통하고 말랑말랑한 손을 잡았다. 아이의 손은 통통하고 습하고 따뜻했다. 손가락을 쫙 뻗어 봤자 고작 블레어의 손바닥만 한, 작은 손이었다. 마디가 도드라지고 길고 곧은데다 블레어의 것보다 큰 카일의 손과는 달랐다. 아이의 체온은 미묘한 감각을 가슴에 전해 줬다.
학교로 돌아가기 전, 블레어가 다시 데인을 황궁으로 데려다 주려고 했다. 자신이 아이를 맡아 키울 수 없으니 이제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맞았다. 마차가 황궁 앞에 도착했다. 블레어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며 데인을 안아 들기 위해 양팔을 뻗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 눈앞에 있는 황궁을 확인한 데인이 그에게 뻗은 블레어의 손을 탁 쳐 냈다.
“황자님?”
아이의 손이니 아무리 세게 때려 봤자 아플 리가 없었다.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의외의 반응이긴 했다. 손을 얻어맞아 살짝 놀란 블레어가 의아함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싫어!”
블레어의 손을 쳐 낸 데인이 마차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블레어가 낭패감을 감추지 못하고 같이 마차 위에 올라탔다. 데인이 마차 구석에 앉아 몸을 옹송그렸다. 아이의 동그랗고 작은 머리꼭지만 보였다.
“황자님.”
블레어가 걱정스럽게 데인을 불렀다. 아이의 몸에서 약한 경련이 일고 있었다. 블레어가 아주 작은 한숨을 내쉬곤 아이를 안아 들었다. 콩벌레처럼 몸을 동그마니 만 아이를 허벅지 위에 앉히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달래 주었다. 며칠 전에도 분명히 이랬던 것 같은데.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황궁에 가기 싫으십니까?”
아이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데인은 그저 어린 짐승이 어미의 품을 파고들 듯 블레어의 품에 찰싹 달라붙었다. 필사적으로 그에게 붙어 있으려고 하는 데인이 안쓰러웠다.
“저랑 또 같이 가고 싶으세요?”
데인은 대답 없이 블레어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블레어가 아이의 얼굴을 가슴에서 떼어 내 눈을 맞췄다. 아이는 블레어에게서 조금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지, 얼굴을 보려고 하는 동작에도 거센 거부감을 드러냈다.
아이의 올리브색 눈동자가 그렁그렁 젖어 있었다. 이렇게까지 극명하게 거부할 줄은 몰랐었다. 며칠간 함께 지냈던 데인은 퍽 얌전하고 유순한 꼬마였다. 어딜 가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황궁이 얼마나 싫으면 이 정도로 고집을 피울까.
블레어는 충동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아마, 그는 머지않아 분명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마음 내키는 대로 굴고 싶었다. 블레어가 마차의 방향을 다시 잡았다.
마차의 두 번째 종착지는 아카데미가 위치한 도시였다. 어차피 블레어도 오후 늦게 수업이 있어서 오늘 안에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했다. 블레어가 아이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아까 황궁을 확인하고는 경기를 일으키던 데인이, 아카데미를 보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여기는 아카데미라고 합니다. 많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는 곳이죠. 데인 님도 후일 자라시면 이곳에 다니시게 될 겁니다.”
데인의 손을 꼭 잡은 블레어가 아카데미의 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데인이 눈을 반짝거리며 오동통하고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여 블레어의 뒤를 따랐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사랑스럽고 귀엽게 생긴 꼬마에게 관심을 표했다.
아카데미 안을 구경시켜 주던 블레어가 누군가를 손짓해 불렀다. 블레어의 손짓을 알아본 남자가 저 멀리에서 뛰어왔다. 사람은 카일이었다.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카일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블레어가 그의 손에 데인의 손을 쥐여 주었다.
“……?”
“왜?”
블레어를 보다 뒤늦게 손에 들어온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존재를 알아챈 카일이 당황을 숨기지 않고 블레어를 마주 보았다. 데인도 얌전히 서서 카일에게 손을 내어 준 채로 블레어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색깔만 다르고 똑같이 생긴 눈동자 두 쌍이 블레어를 바라보았다.
“저 수업이 있으니까 잠시 보고 있어요.”
“……블레어?”
카일이 어정쩡한 미소로 블레어를 불렀다. 이 상황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카일이 블레어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