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그럴 리가!”
블레어의 농담에 카일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하도 큰 소리로 이야기해서 아이가 깰 정도였다. 블레어가 황급히 검지를 세워 입에 가져다 댔다.
“농담입니다. 쉿, 쉿. 조용히 하세요.”
하지만 블레어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데인이 꼬물거리면서 깨어났다.
카일과 블레어가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소음을 일으킨 카일은 쩡 얼어붙었고, 블레어는 부랴부랴 데인에게로 다가갔다.
“블레어?”
눈을 부비며 깨어난 아이가 블레어를 발견하고 양팔을 벌렸다. 블레어가 아이를 안아 주었다. 잠에서 갓 깨어나 더욱 따끈따끈한 몸이 찰싹 안겨 왔다.
“조심하려고 했는데, 깨어나셨네요. 기왕 일어나셨으니 이제 그만 잡시다. 이따 밤에 못 자실라.”
잠이 덜 깼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잠투정을 하는 데인을 안고 블레어가 방 안을 천천히 걸었다.
“으응.”
아이를 얼러 준 블레어가 데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쪽은 알고 계시죠? 형님 되시는 카일 님이십니다.”
“형님?”
데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일을 알아본 데인이 양손을 공손하게 맞잡고 허리를 꾸벅 굽혔다. 형님이래 봤자 데인에게 그렇게 다정하고 좋은 기억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카일도 만만치 않게 낯선 존재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많이 컸구나.”
카일이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인사를 한 데인이 슬쩍 카일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아무리 형제간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무척 많이 났다. 거의 부자지간뻘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나는데다 평생을 살며 얼굴을 본 횟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카일이 어린아이들을 예뻐하거나 살갑게 구는 사람도 못 되니 두 사람의 사이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데면데면하고 어색하고 뻣뻣한 상태로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짓 목소리를 발랄하게 만든 블레어가 그 딱딱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일어나셨으니 식사하시고 주무시죠. 카일도 자고 갈 거죠?”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아이를 안아 들고 방 밖으로 나왔다. 아무리 블레어가 신체 건강한 남자라고 해도 오늘 이렇게 아이를 번쩍번쩍 안아 들었으니 밤에 근육통이 올지도 몰랐다.
“내가 안을게. 무겁잖아. 세 살이나 된 남자애라고.”
“괜찮습니다.”
블레어가 사양했지만 카일이 데인을 받아 안았다. 블레어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만, 얼굴 몇 번 봤다고 익숙한 형님은 어색해도 그럭저럭 괜찮은지 아이는 별 거부 반응 없이 카일에게 안겼다.
데인을 안아 든 카일이 블레어보다 몇 걸음 앞서 내려갔다.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블레어가 작게 미소 지었다. 훌쩍 키도 크고 체격도 좋은 카일이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은 의외로 퍽 잘 어울렸다. 높이 안겨 있는 상태가 익숙하지 않은지, 데인이 카일의 어깨를 오동통한 손으로 꼭 잡았다. 꼭 닮은 곱슬곱슬한 금발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냈다.
식당에 이동한 블레어가 맞은편에 두 형제를 앉혔다.
눈 색은 조금 달랐지만, 역시 카일과 데인은 많이 닮은 편이었다. 블레어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얼굴 이쪽저쪽을 뜯어보았다. 오목조목 잘 자리 잡힌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형, 아몬드형 눈매까지도 비슷했다. 데인도 다 자라면 카일 못지않게 훤칠한 외양을 가지게 될 것 같았다. 아이의 모친인 스피렌다 황비도 꽤나 이름을 날리는 미녀였다.
센스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은 아이가 먹기 쉽도록 부드럽고 간이 약한 음식을 따로 내왔다. 입이 짧을 줄 알았는데, 데인은 스푼으로 담긴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맛있어?”
블레어더러 편히 식사하라며 카일이 전담해 아이에게 밥을 먹였다. 데인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얼른 음식을 더 작게 잘라 밥을 먹이고 있는 카일에게 밀어 주었다.
“뭐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아니야. 이 정도면 됐어. 신경 쓰지 말고 얼른 먹어.”
카일의 만류에도 블레어는 두 사람의 접시가 빌 때마다 잘게 자른 음식을 놓아 주었다. 분위기가 더욱 부드럽고 화기애애해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블레어가 데인을 거품을 낸 목욕물에 넣었다. 몽글몽글 거품을 내서 머리 위에 얹어 주자 데인이 배시시 웃었다. 아이는 유순해서 다루기가 쉬웠다. 소매를 둥둥 걷어붙여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자 정말로 아기 천사님 같았다.
카일이 부드러운 수건을 가지고 가서 데인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목욕 가운을 입혀 놓자 아이가 꾸벅꾸벅 또 졸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꼬박 4살을 채웠으니 굳이 나누자면 어린이 축에는 들 것 같았는데, 아이는 지나치게 잠이 많은 것 같았다. 어쨌거나 데인은 퍽 얌전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수고했어요.”
“내가 뭘. 수고는 네가 했지.”
카일이 멋쩍게 웃으며 침대에 앉은 블레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나저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황궁에서 황자님이 눈칫밥을 먹는 것 같더라고요.”
“흐음, 그래?”
카일이 블레어의 목덜미에 턱을 얹고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신경 써 줄 사람도 전혀 없고. 현 황제 폐하는 데인 님을 싫어하시니까요. 당신과는 또 다른 경우죠. 딱 봐도 방치되면서 자라고 있더라고요. 저랑 떨어지기 싫어하셔서 주말만이라도 함께 있을까 해서 같이 왔습니다.”
고개를 조금 떼어 낸 카일이 블레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어린아이에게 너그럽고 상냥한 편이었던가. 블레어는 알 수 없는, 그의 새로운 모습이 계속해서 드러났다. 언제쯤 이 사람을 완전히 알게 될까. 어쩌면 평생이 가도 알 수 없을지도 몰랐다. 왠지 가슴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아 카일이 다시 블레어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너는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신기하게 사람이 되게 무르고 정이 많아.”
“그러니까 당신한테 다시 넘어갔겠죠.”
블레어가 픽 웃으며 고개를 돌려 카일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다시? 카일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국 카일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카일이 다시 블레어에게 쪽쪽 입을 맞췄다. 성애의 함의는 조금도 없는 가벼운 애정 표현이었다.
“나도 잘 몰랐는데, 아이가 순하고 착하네.”
“그렇죠. 당신 어릴 때를 본 건 아니지만 꼭 이랬을 것 같긴 합니다.”
“나는 더 귀여웠는걸?”
“와, 양심이 없네요.”
“정말인데. 나 정말 귀여웠다고. 엄청나게.”
카일이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 항변했다. 블레어가 소리를 죽여 킥킥 웃었다. 몸의 떨림으로 장난을 알아챈 카일이 블레어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블레어가 화제를 돌렸다.
“카일, 월요일에 수업 있죠?”
“응. 나는 월요일이랑 수요일에 수업 있잖아.”
두 사람 다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이어서 시간표가 크게 빡빡하지는 않았다. 블레어는 화요일, 금요일에만 수업이 있었다.
“그럼 당신은 일찍 돌아가 봐야겠네요. 저는 화요일까지 머무르다 돌아가겠습니다. 원래 월요일에 가려고 했는데, 당신이 왔으니 하루 늦춰도 되겠어요.”
“그 다음에는? 데인은 다시 황궁으로?”
“바래다 줘야겠죠.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제가 어떻게 맡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이를 키워 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시 그렇겠지?”
카일이 곰곰이 고민을 했다.
“아예 이곳 저택에서 키우면 모를까 제가 양육할 수는 없죠. 제가 육아 전문가도 아니고, 저도 아직 학생인 데다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렇다고 모네터리가에서 키우면 황자님이신데 말이 나올 게 뻔하니 서로 조심하는 게 좋죠. 당장 당신만 해도 여기를 하도 들락날락하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모네터리가에서 황자 두 사람과 연을 대 놓는다는 말이 들리면 어떡해요. 곧바로 반역 도당으로 몰릴걸요. 당장 국서도 큰형님이신데.”
“내가 뭘.”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거 자제하라고 이야기했구만. 조금 늦게 들어간다고 연락했더니 바로 쪼르르 달려오고. 잘했어요, 잘못했어요?”
“월요일에 온다고 했잖아. 그냥 친구 집에 가는 셈 치면 되지.”
카일이 어린애처럼 칭얼거렸다.
“그러기엔 빈도가 지나치게 잦은 걸 알고 있죠?”
블레어가 카일의 잘생긴 코를 검지와 중지로 꾹 쥐고 비틀었다.
“아야야.”
“반성해요.”
카일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카일이 삐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삐쭉 내민 샐쭉한 표정이 귀여웠다. 삐친 카일이 블레어의 상체를 침대 위로 넘어트렸다. 상체가 넘어간 블레어가 카일과 눈을 맞추고 픽 웃었다.
카일이 사르르 녹는 듯 예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사람을 홀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수없이 봐도 카일의 해사한 미소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대로 두 사람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데인의 옆에 누웠다. 침대가 장정 다섯이 굴러다녀도 남을 정도로 넓어서 다행이었다.
“데인 님도 참 딱해요. 어머니의 잘못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아직 세 살인 꼬마가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는 게 말이 되나요. 아직 아무것도 모를 나인데.”
블레어가 카일을 마주 보곤 뺨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성년이 된 지 한참인데도 보드랍고 매끄러운 카일의 뺨이 손바닥에 차지게 감겼다. 몸을 둥글게 만 카일이 블레어의 품에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으응.”
타이밍 좋게 데인이 칭얼거렸다. 데인의 뒤척임에 블레어와 카일이 깜짝 놀라 입을 딱 다물고 데인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도 데인은 깨어나지 않고 다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블레어가 몸을 일으켜 데인의 이불을 곱게 여며 주었다. 아이는 세상모르고 노곤노곤 잠을 자고 있었다. 작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두 사람도 조용한 숨소리를 듣고 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