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76)화 (76/84)

76화.

얼마 지나지 않아 블레어는 모네터리 저택 앞에 내릴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카일에게 연통을 넣어 달라고 부탁한 블레어가 아이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블레어를 발견한 사용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블레어와 금발 꼬마의 조합이라니?

“어머, 도련님. 웬 어린아이예요?”

“하하, 어쩌다 보니.”

함부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데인의 정체를 발설할 수는 없었다. 물론 모네터리가의 사용인들은 모두 일한 지 오래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데인은 황자였다. 아무리 어려도 황자가 귀족가에 머무른다는 사실은 좋지 않은 소문을 내기 좋았다. 또 이래저래 위협이 생길 수도 있고, 어리게 구는 아이를 보고 나쁜 소문이 생길지도 몰랐다. 블레어는 소문을 원천 차단했다.

“도련님 아들이세요? 정말 귀엽게 생기셨다!”

사용인들이 우르르 달라붙어 데인의 얼굴을 관찰했다. 사람들의 관심에 놀란 아이가 꾸물꾸물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를 달래 주며 블레어가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럴 리가. 세 살인 아이라고. 난 이 아이가 태어날 때 고작 열일곱이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연히 농담이죠. 그나저나 정말 예쁘게 생기신 분이네요.”

“그렇지. 혹시 집에 나나 누님이 어릴 적에 입던 옷이 남아 있나?”

“오래됐지만 있기는 할 거예요. 옛날 물건들을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었으니까요.”

사용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으면 좀 가져오렴. 혹시 남아 있는 헝겊 인형 따위의 장난감이 있어도 가지고 오도록 하고. 책 같은 걸 가지고 와도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사용인들이 블레어의 부탁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블레어가 데인을 안은 채로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사람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는 게 티가 나는 방이었다. 블레어는 안정감이 감도는 그의 방이 좋았다.

“잠시 내려오실까요?”

침대 위에 데인을 앉힌 블레어가 몸을 낮추어 아이와 시선을 맞췄다. 아이는 아까와는 다르게 퍽 안정적으로 보였다.

“이곳은 저희 집입니다. 제 이름이 뭔지 기억하고 계시나요?”

“블레어 슈호 모네터리.”

데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퍽 영리한 아이였다. 블레어가 데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정말 똑똑하시네요. 지금 황제 폐하의 부군, 국서이신 테오도르 님의 본가이기도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와 테오도르 님은 형제입니다. 중간에 누님도 한 분 계시고요. 저택 안의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니 편안하게 지내십시오.”

블레어가 그렇게 얘기를 하고 있자, 문이 열리며 따뜻한 물과 블레어가 부탁한 것들이 준비되어 들어왔다. 물의 온도를 확인한 블레어가 아이를 안고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아 준 후 지금 입고 있는 불편한 옷을 벗겼다.

데인이 입고 있던 의복은 확실히 고가품인 것 같긴 했다. 다양한 자수가 놓여 있었고, 장식품이며 보석도 적잖게 달려 있었다. 의복만이 데인이 황가의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는 말은 불편하다는 이야기도 됐다. 아이의 고운 피부에 거칠거칠한 자수며 편하게 앉을 수 없는 장식은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

당연히 모네터리가도 자식들에게 저 정도로 화려한 옷을 해 줄 재력과 역량이 됐다. 하지만 블레어는 어린 시절 저렇게 불편하고 보기만 좋은 옷을 입지 않았었다. 그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고 장식이 달리지 않아 활동하기 편하고 입고 벗기 좋은 옷을 입었었다. 심지어 클라라는 더 심했다. 그녀는 귀족가의 여아가 자연스럽게 입어야 하는 치마를 질색팔색했었다.

다행히도 집 안에 삼남매가 입었던 어린 시절의 옷들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적당한 크기의 옷을 아이에게 입혔다. 색이 고운 것을 보니 아마 테오도르의 옷일지도 몰랐다. 블레어는 나가서 뛰어 노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언제나 의복의 색이 짙었고, 클라라는 애당초 밝고 화사한 색을 싫어했다. 그녀의 취향은 지금까지도 바뀌질 않아 지금도 클라라는 늘 어두운 색의 옷만 입고 다녔다.

연노랑빛 셔츠와 하늘색 바지가 아이에게 꼭 맞춘 듯 어울렸다. 밝은 금발 머리와 셔츠의 색깔이 잘 어울렸다. 옷을 갈아입힌 블레어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가 시녀들이 커다란 상자에 담아서 가져다준 장난감을 보여 주었다. 클라라는 자신의 물건에 애착이 컸다. 이미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이라도 버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블레어나 테오도르는 물질적인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클라라는 아니었다. 클라라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은 삼남매의 물건을 잘 버리지 않았다.

덕분에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저택에는 오래된 헝겊 인형이나 사내아이가 갖고 놀기 좋을 만한 장난감들이 많았다. 블레어로서도 참 오랜만에 보는 물건들이었다. 과거에 살아왔던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삼십 년 만에 보는 물건들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아이가 정말 어리구나, 하는 감정이 새삼스럽게 다시 들었다. 블레어가 과거 적당한 때에 결혼했더라면 정말 데인만 한 자식이 있었을 것이다. 블레어가 미묘한 감정에 젖어 데인을 쳐다보았다. 데인은 상자 앞에 편하게 주저앉아 장난감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데인이 집어든 것은 여러 가지 헝겊으로 얼룩덜룩하게 기워 만든 소박한 곰돌이 인형이었다. 사용인들이 한차례 정리해서 가지고 왔는지, 오래된 인형이어도 먼지가 풀썩 일어나고 그러지는 않았다.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아이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볼수록 카일과 겹쳐 보였다. 카일이 어렸을 적 꼭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았다. 꼭 다 큰 카일을 압축해 작게 만들어 놓은 기분이었다. 블레어가 아이에게 인형을 들려 주었다.

“장난감들은 여기에다 둘 테니 다른 것을 갖고 놀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사용하시면 됩니다.”

블레어가 상아로 만든 빗을 가지고 와서 아이의 금발 머리를 곱게 빗어 주었다. 카일도 머릿결이 좋은 편이었지만, 아직 어리고 머리카락이 가는 데인만은 못했다.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말렸다. 예쁘게 머리를 빗겨 놓고 옷을 갈아입히니 꼭 사랑스러운 귀공자 같았다.

물론 황자이니 당연히 귀공자라는 말도 맞았다. 화려하고 불편해 보이는 옷가지보다 수수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옷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사용인들이 눈치 빠르게 아이의 입에 맞을 만한 먹을거리도 내려놓고 간 참이었다.

“평상시에는 혼자 주무시곤 합니까?”

“응.”

“그러시군요. 오늘은 그래도 저와 함께 주무시지요. 여기는 낯선 곳이니까요.”

블레어의 말에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아이는 곰돌이 인형을 안고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예법에도 어긋나는 행동이었고, 인형 위에도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졌지만 블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잔뜩 과자를 먹은 아이가 꾸물꾸물 침대로 올라가더니 통통하게 나온 하얀 배를 내놓고 잠이 들었다. 아직 어려서 먹으면 먹는 대로 볼록하게 나오는 모양이었다. 블레어는 침대와 이부자리를 정리한 후 아이를 다시 편안하게 눕혔다.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 준 블레어가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았다. 괜히 아이가 또 깨어났을 때 곁에 없으면 더 놀랄 것이었다.

블레어가 의자를 끌어와 다리를 꼬고 그 위에 책을 펼쳤다. 소일거리를 하는 데는 책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어느덧 노을이 어둑어둑 지고 있었다. 블레어의 방은 노을이 잘 보이는 위치였다. 언제나 올 때마다 이 시간이 되면 창가에 앉아 노을을 보곤 했다. 정원을 내다보고 있을 때였다.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블레어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침대 위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꼬마를 그대로 키워 커다랗게 만든 것 같은 남자였다. 블레어가 서둘러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문을 벌컥 연 블레어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카일?”

이름이 불린 카일이 화사하게 웃었다.

“아니,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월요일에 돌아간다니까요.”

“보고 싶어서 왔지.”

카일이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을 부리며 블레어에게 안겼다.

“월요일에 오면 주말 내내 못 보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요.”

블레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에 턱을 괸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위에 데인 황자님이 계십니다. 만나 보시겠어요?”

블레어는 연락을 줄 때 그저 개인적인 사유가 있어서 월요일에 돌아간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당연히 카일도 별다른 전언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데인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카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인이? 이곳에?”

“예. 오늘 테오 형님을 만나 뵈러 잠깐 황궁에 갔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네요.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함께 올라가요.”

블레어가 카일과 함께 복도의 계단을 올랐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자 아기 천사 같은 데인이 얌전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노을이 어느새 전부 사라져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블레어가 작은 초를 켰다.

“데인이네, 정말로. 데인이 왜 이곳에 있어?”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일도 오랜만에 보는 이복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했고, 두 사람은 애초에 접점이 거의 없었다. 데인이 태어날 적 이미 아카데미에서 재학 중이었던 카일이 데인을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평생을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빈약한 횟수였다.

“아까 황궁에서 잠깐 만나 뵈었는데, 절 잘 따르시더라고요. 좀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서 주말에는 저희 집에서 함께 지내려고 모셔 왔습니다.”

“그랬구나.”

카일이 미묘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어린 꼬마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꼬마는 정말 천사같이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덮고 있는 이불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귀엽네.”

“그러게요. 그리고 볼수록 당신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전 당신이 낳은 아들인 줄 알았다니까요.”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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