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75)화 (75/84)

75화.

“아까 잠이 드셔서 눕혀 놓느라 잠시 방에도 다녀왔는데, 방도 너무 협소합니다. 황자님이 머무시는 방이 그게 뭡니까, 정말. 저희 저택에 남아 있는 형님의 집무실이 그것보다는 넓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이 북향으로 나 있어서 해가 잘 들지 않더군요. 방도 해가 잘 드는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음, 참고하도록 하마.”

“아시잖아요, 형님. 막내 황자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신경 좀 써 주십시오.”

블레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내가 무신경했다.”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신 것 같더군요. 어머니가 키워야 할 나이에 떨어져서 지내게 됐으니 딱하지 않습니까. 황궁에 하나 남은 어린아이인데 잘 보살펴 주십시오. 형님이 아이를 보셔도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어린 분이잖아요. 형님 아들뻘 되시는 황자님이시란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낯선 사람 손에서 길러졌어요.”

블레어가 잘생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테오도르가 진지한 표정을 말을 듣고 있었다. 이 정도까지 말을 해 두었으니 뭔가 시정을 하겠지.

“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형님을 비난하려는 생각이었던 건 아닙니다. 오늘 황자님을 만나 뵈었더니 신경이 좀 쓰여서요.”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가 더 신경 쓰도록 하마.”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테오도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온 것은 데인이었다. 블레어를 발견한 데인이 다리에 답삭 매달렸다. 블레어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황자님?”

시녀 둘이 허둥지둥 따라 들어와서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잠에서 깨어나신 황자님께서 소백작님을 찾으셔서요. 지금 테오도르 님을 만나 뵙고 계시다고 만류했는데도…….”

시녀들이 변명을 했다. 아이는 자신을 두고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블레어의 다리를 꼭 붙들었다.

“황자님?”

블레어가 데인을 얼렀다. 그렇지만 데인은 블레어의 다리를 풀어 주지 않았다.

“잠자다가 일어나셨는데 제가 없어서 놀라셨어요?”

데인이 블레어의 바지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바지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우는 모양이었다. 아이의 몸이 히끅히끅 떨리는 것이, 여기까지 울면서 뛰어온 것 같았다. 그러니 시녀들이 차마 말리질 못했겠지.

블레어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데인이 블레어의 품에 찰싹 달라붙어 매달렸다. 블레어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도닥거렸다. 울고 있는 아이를 그치게 하는 게 먼저였다.

블레어가 시녀에게 눈짓을 했다.

“여기 황자님 드실 따뜻한 우유 좀 내오거라. 꿀을 진하게 타서.”

“알겠습니다, 소백작님.”

시녀들이 문을 닫고 천천히 물러났다. 블레어가 아이를 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테오도르가 놀란 눈으로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데인은 퍽 얌전한 아이였다. 이렇게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경우가 적었다.

“널 제법 잘 따르시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블레어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블레어는 살면서 아이와 마주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아이를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아이 다루는 솜씨가 좋은 아론을 만났더라면 황자님이 더 껌뻑 넘어가셨겠군.

데인은 블레어의 옷깃을 꼭 쥐고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든 사이에 블레어가 그를 놓고 나갔더니 크게 놀란 모양이었다. 왠지 어린 카일의 모습이 겹쳐 보여 데인이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블레어가 등을 천천히 도닥거렸다. 원래도 체온이 높은 아이의 몸인데, 울고 난 후라서인지 몸이 더욱 따뜻했다.

시녀가 조용히 데운 우유를 가져다주었다. 우유의 온도를 확인한 블레어가 아이에게 컵을 넘겨주었다. 데인이 꼴깍꼴깍 우유를 받아 마셨다. 잔뜩 울었으니 목이 탈 만도 했다. 컵을 받은 블레어가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올려놓았다.

무릎 위에 다시 데인을 앉힌 블레어가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가 짧은 팔로 블레어를 힘겹게 끌어안았다. 별 대화도 하지 않았는데 블레어가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대화를 한 것 같지도 않았고, 별달리 특별한 행동을 해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정도의 노골적이고 맹목적인 호의는 참 오랜만에 받아 보는 것 같았다. 블레어에게도 이유 없는 호의를 받는 것은 그다지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아이가 너무 매달려서 조금 미묘하고, 멋쩍고 약간 곤란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블레어가 뒷머리를 살짝 긁적거렸다. 괜히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네 말대로 신경을 많이 써야겠구나. 오늘 한 번 만난 너에게 이렇게 매달리실 줄은 몰랐단다. 정이 많이 고프신 모양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외로우실 만도 하죠. 주변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곤 시녀들과 선생들뿐이니까요.”

“그렇지. 황자님 나이 또래의 귀족 아이들의 명단을 추려 봐야겠구나. 친구를 좀 붙여 드려야겠어. 네가 와 줘서 다행이구나. 신경 써 줘서 고맙단다.”

“예. 그러게 말입니다.”

블레어가 웃었다.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따끈따끈한 온기. 갓 구워 낸 하얀 빵을 안고 있는 기분 같기도 했다. 아이는 말랑말랑하고, 따뜻했고 우유 젖내가 났다.

“그러면 이야기도 잘 마무리됐으니 저는 슬슬 들어가 보겠습니다. 데인 황자님, 다음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

블레어가 데인을 땅에 내려놓고 허리를 굽혀 눈을 맞췄다. 블레어가 데인을 떼어 놓자마자 데인의 초록색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확인한 블레어가 황급히 엄지손가락으로 아이의 눈가를 닦았다.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데인이 블레어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블레어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블레어도, 테오도르도 어른이었다. 블레어는 물론이고, 테오도르는 적잖은 세월을 살아온 남자였다. 아드리아나의 적대감과는 다르게, 테오도르도 이 어린 황자에게 적잖은 연민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모네터리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무른 사람이었다.

“황자님, 제 동생과 함께 있고 싶으십니까?”

테오도르가 곰 같은 덩치를 굽혀 무릎에 손을 댔다. 테오도르의 위협적인 덩치가 줄어들자 금발 머리 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퍽 단호한 동작이었다.

“으음, 그러시군요. 하지만 데인 황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 동생은 황실의 사람이 아니라서요. 곧 퇴궁을 해 집에 돌아가 봐야 한답니다. 게다가 아직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으니 황자님이 함께 가시기는 곤란하실 것 같군요.”

부정의 말을 듣자마자 또다시 데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의 뺨을 타고 눈물이 도륵 흘러내렸다.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고 우는 모습이 너무나 서러워 보여 블레어가 덥석 아이를 안아 들었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사라는 평을 들었던 과거의 블레어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놀랄 만한 행동이었다.

블레어조차도 스스로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제 허벅지에나 겨우 미칠 정도로 작은 꼬마가 울고 있는데 내버려 둘 정도의 냉혈한은 아니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블레어의 품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하.”

테오도르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이를 어쩌니?”

“그러게 말입니다.”

데인은 제법 고집이 있어 보였다. 크라시아 황가의 피에는 고집이라는 값이 기본적으로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멋쩍게 웃었다.

“저와 함께 가 보시렵니까?”

“응!”

“그럴까요.”

블레어의 허락에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기쁨으로 빛났다. 그때서야 아이가 본래의 나이인 세 살로 보였다. 지나치게 어리고 작은 아이였다. 혼자 세상에 내던져지기엔 더더욱 작고 어렸다. 이유 모를 동정심이 차올랐다. 블레어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린아이를 데려가 돌보는 것은 자신의 깜냥 밖의 일이라는 것을.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는 꽤나 유능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유능함이 육아로 이어져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뭘 해도 잘 하는 편이니 분명히 아이를 양육하면 잘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가정과 현실은 분명히 달랐다. 블레어는 과거에도 어린아이를 돌봐 본 일이 없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였다.

블레어는 모네터리가의 막내였기에 어린 동생을 돌봐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과거 테오도르와 클라라는 블레어가 지나칠 정도로 바빠져 왕래가 거의 없어진 후에야 자식을 낳았다. 그러니 이렇게 작고 가녀린 생명체는 블레어에게도 몹시 낯설었다.

물론 블레어는 언제나 카일을 작고 약한, 그가 보살펴 주어야 하는 뭔가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카일은 근본적으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성인 남자였다. 정말 블레어의 무릎 위를 겨우 넘는 키를 가진 어린애와는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간절히 매달리는데 외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뭐라고. 태어나서 오늘 고작 하루를 만났던 사람인데. 뭔가 대단한 일을 해 준 것도 아니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과자를 먹인 게 다일 뿐인데.

또 한편으로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얼마나 황궁 안에서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으면 이 정도로 사랑을 갈구할까. 블레어와의 짧은 만남에서 느낀 온정이 좋았던 탓이리라. 그러니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 자그마한 애정이, 작은 호의가 얼마나 좋았으면 이럴까.

“형님, 그러면 오늘은 제가 황자님을 모셔 가겠습니다. 이렇게까지 고집을 피우시는데요. 괜히 주무시다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르잖아요.”

“괜찮겠니?”

테오도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자신이 알고 있는 막내는 유능하고, 뭘 시켜도 잘할 정도로 야무진 아이였지만 어린아이를 온전히 돌보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어쩌겠어요.”

블레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여전히 표정은 곤란해 보였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데인이 이 정도로 매달릴 줄은 몰랐으니까.

“얌전하신 분 같으니 괜찮을 겁니다. 마침 주말이라 다행이네요.”

“어디로 갈 거니?”

“어떻게 해야 하려나요. 일단 본가로 돌아가는 게 좋겠죠?”

블레어와 테오도르가 눈짓과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에 잠잠해지면 다시 황궁으로 모셔 오렴.]

[네, 알겠습니다.]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짓을 이해한 테오도르가 블레어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하고. 짐은 따로 꾸리지 않아도 괜찮으려나 모르겠구나.”

“설마 짐이 따로 필요할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바깥에서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폐하께는 제가 모셔 간다고 따로 말씀 전해 주세요.”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나는 네가 걱정이 되는구나.”

“어떻게든 되겠죠. 너무 심려 마세요.”

“조심히 들어가거라.”

테오도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따라 나왔다. 여전히 데인은 블레어의 품에 답삭 안겨 있었다. 마차에 올라탄 블레어가 데인을 다리 사이에 앉혔다. 조금이라도 떼어 놓으면 아이가 불안해했다.

이렇게 사람과 붙어 있는 것을 좋아하는 애인데, 도대체 어떤 식으로 지금까지 양육을 해 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이 됐다. 지금은 곧장 모네터리가로 가서 머무르다가, 며칠 후에 아이가 안정이 되면 황궁으로 돌려보내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카일에게 오늘 저녁에 돌아올 것이라고 언질을 하고 온 참이라, 섣불리 모네터리가로 향할 수도 없었다.

‘빨리 와야 해.’

블레어의 머릿속에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레어가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 카일이 블레어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고 어깨에 고개를 괸 채로 한참을 칭얼거렸었다. 꼭 애기처럼 군다며 타박을 했지만, 블레어는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약속을 어기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렇지만 육아 초짜인 블레어와 카일이 어린아이를 케어할 수는 없었다. 계획을 변경해 도움을 줄 만한 사람들이 많은 모네터리 저택으로 가는 게 가장 좋았다. 블레어는 결정을 내렸다. 일단 곧장 모네터리가로 가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아카데미에는 월요일이나 화요일쯤 돌아갈 생각이었다. 마지막 학기인 블레어는 수강 중인 수업이 두 개밖에 없어서 상당히 여유로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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