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74)화 (74/84)

74화.

“맛이 있으십니까?”

블레어가 묻자 데인이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인이 불쑥 자신이 먹던 쿠키를 블레어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블레어는 단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을 짓던 블레어가 아이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고 쿠키의 귀퉁이를 살짝 베어 물었다.

“친절하시군요. 잘 먹었습니다, 황자님. 나머지는 황자님께서 드십시오.”

블레어의 칭찬에 데인이 배시시 웃었다. 아이와 만난 후로 처음 보는 미소였다. 블레어에게 쿠키 하나를 준 데인이 먹는 데에 열중했다. 과자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니 아이는 카일과 더 닮아 보였다. 카일의 아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닮아 보였다. 기본적으로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졌다는 것이 같았다. 선대 황제는 외모적으로 특출 난 이가 아니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자식들은 모두 용모가 훤칠했다.

과자 하나를 작은 치아로 오독오독 다 씹어 먹은 데인에게 말을 걸었다.

“맛이 있으셨습니까?”

“응!”

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긋 미소 지었다.

“평상시에도 많이 드시지 않나요? 황궁 주방장의 솜씨가 꽤 좋다고 알고 있는데요.”

블레어의 물음에 아이가 시무룩하게 기가 죽었다. 아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렇군요. 앞으로 자주 챙겨 드리라고 이르겠습니다.”

“으응.”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블레어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혹시 황궁에서 지내시면서 불편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있으시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이래봬도 꽤나 능력 있는 사람이랍니다. 말해 주시면 고치라고 말하겠습니다.”

블레어가 아이를 앞에 놓고 너스레를 떨었다. 블레어의 말에 아이는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블레어가 데인에게 다시 쿠키를 물려 주었다. 이번에도 양손으로 과자를 잡고 앞니로 조금씩 과자를 베어 먹던 데인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불편한 점이 없으십니까?”

“응.”

“그러면 힘드신 점은요?”

“으음. 공부? 공부가 싫어. 공부를 너무 많이 해.”

처음으로 아이가 매끄러운 문장을 뱉었다. 말이 어눌한 줄 알았는데, 아이의 어휘력이나 어투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블레어가 살짝 놀랐다.

“공부를 너무 많이 하십니까?”

“으응.”

“그렇군요. 그건 제가 그럼 폐하께 따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아이가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안 돼, 안 돼!”

“안 되나요? 왜죠?”

“폐하께서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

시무룩하게 기가 죽은 데인이 한데 손끝을 모으고 꼼지락거렸다. 블레어가 아이의 손을 풀어 내 꼭 잡았다.

“그러셨군요. 폐하가 무서우십니까?”

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차이야 많이 나지만 하나뿐인 누님이신걸요. 폐하께서는 데인 황자님을 사랑하실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자신조차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본인도 믿지 못하는 사실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이들은 굉장히 눈치가 빨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싫어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이들만큼 빠르게 짚어 내는 존재는 없었다.

적이 될 수 없는 어린 동생이었지만, 아드리아나는 데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아드리아나가 데인을 싫어하는 것은 그녀의 잘못도, 데인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럼 황제 폐하께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부 양을 줄이려면?”

블레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한참 곰곰이 생각하던 데인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공부를 많이 하십니까? 무엇 무엇을 배우시는데요?”

“어학, 글쓰기, 작문, 에티켓이랑 지리까지 배우고 있어.”

블레어의 한쪽 눈이 가늘어졌다. 세 살짜리가 배울 만한 수업은 아니었다. 확실히 과했다. 아이가 싫어할 만했다.

“어울리시는 친구들은 따로 없으십니까?”

데인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데인은 자꾸만 몸짓으로 대화를 이어 가려고 했다. 아이의 말 자체가 어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색해 보였다. 친구도 따로 없다니.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은 황가의 자식들은 또래의 귀족과 어울리며 교분을 쌓는다. 물론 대부분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아카데미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열네 살이 되기 전에도 또래의 친구가 한둘은 존재했다.

끈 떨어진 황자에게 선을 대 봤자, 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에서만은 그렇게 시시콜콜 따지지 않아도 될 텐데. 모두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욕심을 부렸던 스피렌다 전 황비의 잘못이었고, 어머니의 잘못을 아들에게까지 투영시키고 있는 아드리아나의 잘못이었고, 미래를 틀어 버린 블레어의 잘못이기도 했다.

블레어가 혀를 쯧 찼다. 아이에게 무척 미안해졌다. 블레어가 데인을 끌어안았다. 어린아이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아이에게서는 부드럽고 달콤한 우유 냄새가 났다.

“공부하기 싫으시다면 저랑 같이 놀러 가실래요, 전하?”

블레어가 싱긋 웃으면서 물었다. 농담처럼 가볍게 물었지만 완전한 농담은 아니었다. 블레어는 자신이 틀어 놓은 미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소년의 인생을 어느 정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방향을 바꾸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미래와 삶에 영향을 끼쳤지만, 데인처럼 잘못 없는 사람의 인생을 부정적으로 틀어 놓은 적은 없었다.

데인이 블레어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떼고 그를 말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올리브색 눈동자가 블레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블레어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잔잔하게 웃었다.

“싫으십니까?”

블레어가 다시 물었지만 데인에게서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데인이 우물쭈물하며 옷깃을 꼭 잡았다. 단풍잎같이 작은 손에 붙잡힌 옷깃이 얼마나 단단한 힘으로 붙잡혔겠느냐마는, 블레어는 왠지 그 손을 풀어낼 수가 없었다.

“저랑 같이 밖으로 놀러 가시면 카일 형님도 뵐 수 있으시겠네요. 보고 싶으세요? 놀러 나갈까요?”

블레어가 다시 웃으면서 물었다. 데인이 그의 농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일 형님?”

친형제라고 해도 카일과 데인이 자주 마주쳤을 리는 없었다. 카일은 아카데미의 방학일 때나 잠시 잠깐 황궁으로 돌아갔었고, 아카데미나 모네터리 저택에 머무르는 날이 더 길었다.

“으응.”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을 본 블레어가 피식 웃었다.

“우리 황자님, 이렇게 순진하셔서 어쩔까. 모르는 사람이 과자를 준다고 해서 덥석 따라가면 안 돼요. 못된 사람이면 큰일이 난답니다.”

블레어가 과자를 하나 더 손에 들려 준 후 데인을 안아 들었다. 양손으로 데인을 안아 들고 천천히 정원 안을 거닐었다. 데인은 얌전하게 블레어의 품에 안겨 있었다. 한참 그렇게 아이를 안고 정원을 걷다 보니 아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랬다. 아이는 지금 공부할 시간이 아니라 낮잠을 자야 할 때였다.

블레어가 정원을 벗어나 아이를 안은 채로 내궁으로 돌아왔다. 블레어가 지나가는 궁인을 조용히 불렀다.

“소백작님.”

“주무시고 계시니 조용히 막내 황자님의 침실로 안내하거라.”

“알겠습니다.”

블레어가 시종의 뒤를 따라 데인의 침실로 이동했다. 데인을 조심히 침대 위에 내려놓은 블레어가 침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일국의 황자가 머무르는 침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작고 초라했다. 모네터리가에서 블레어가 사용하는 방이 이것보다 다섯 배는 넓었다. 겨우내 난방이라도 제대로 될까 걱정되는 수준이었다. 블레어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아이가 처한 현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이는 방치되고 있었다.

어쩌면 직접적인 학대보다도 더 나쁠지도 몰랐다. 노골적인 무관심. 어른이 겪어도 힘들 판에, 이제 갓 말을 떼고 자라는 아이가 쉽게 버텨 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바람이 들지 않도록 이불을 꾹꾹 덮어 주었다. 황궁에 이런 방이 존재하기나 하던 걸까 싶을 정도로 창문도 부실했다.

방을 빠져나온 블레어가 바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부지런히 이동한 블레어가 도착한 곳은 테오도르의 방이었다.

“블레어 모네터리가 왔다고 국서께 전하라.”

“예. 소백작님.”

말을 옮기러 들어간 시녀가 나오자 블레어가 곧장 테오도르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테오도르가 블레어를 반갑게 맞았다.

“아까 들어간 줄 알았더니 아직 황궁에 있었니?”

“예. 저도 일찍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시간까지 머물러 있게 됐네요.”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니?”

“음, 형님.”

블레어가 머뭇거렸다. 언제나 자신이 넘치고 여유로운 그답지 않은 모습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결심을 마친 블레어가 입을 열었다.

“제가 방금 데인 황자님을 뵈었거든요.”

“음.”

블레어의 말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이 제대로 잘 보살핌 받으시는 게 맞습니까?”

블레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내궁의 일을 돌보고 있단다. 데인 황자님은 아직 어리셔서 충분히 따로 신경을 쓰고 있지. 훌륭한 선생도 여럿 초빙하고, 유모와 시녀들도 전속으로 붙여서 불편함 없이 모시라고 하고 있다.”

당황한 테오도르가 서둘러 대답했다. 블레어는 절대 행동과 말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허투루 행동하는 적이 없는 동생이었다. 그런 블레어가 이곳까지 찾아와 말을 꺼낼 정도라면, 분명히 가벼운 일이 아닐 것이었다.

“그러시군요.”

블레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신경을 더 쓰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으신 황자님께 그렇게 많은 수업이 뭡니까. 형님께서도 그 어린 나이에 그렇게까지 많은 공부를 하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보니까 친구가 없으신 모양이더라고요. 나이가 비슷한 귀족 아이를 황궁에 초청해서 친구도 좀 만들어 주시고요.”

블레어가 테오도르를 나무랐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는 듯, 동생의 질책에 테오도르가 찔끔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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