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누구신가?”
“아.”
시녀가 황급하게 아이를 안아 추어올렸다. 아이가 안기지 않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고 도리질을 쳤지만 시녀는 완강했다.
“싫다 하시니 내려 주게.”
“소백작님.”
블레어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블레어의 눈총을 받은 시녀가 천천히 아이를 내려 주었다. 아이의 선명한 금발 머리를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황실에는 금발 머리가 많았다. 칼슈온 소수민족을 외가로 둔 조슈아만 제외하면, 황실의 세 남매도 모두 금발이었다. 물론 아드리아나의 것은 흐릿한 백금발이고, 카일의 것은 선명한 플래티넘 블론드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색이었다. 아이의 것도 사랑스러운 금발이었다. 블레어는 어렵지 않게 아이의 정체를 추측해 냈다.
“막내 황자님이신가?”
블레어의 질문에 시녀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로 여기서 황자님과 아웅다웅하고 있는가?”
“수업이, 곧 수업이 있으신데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셔서.”
시녀가 곤란하다는 듯 대답했다. 블레어가 쭈뼛대며 서 있는 꼬마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막 블레어의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작은 체구. 고수머리인 카일과 꼭 닮은 머리카락이었다. 블레어가 한쪽 무릎을 굽혀 꼬마와 시선을 맞추었다.
“데인 황자님.”
이름이 불린 꼬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블레어를 쳐다보았다. 이복형제인데도 확실히 카일과 썩 닮은 얼굴이었다. 카일이 어렸을 때 꼭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올리브색 눈동자를 가졌지만, 이목구비가 전체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블레어 슈호 모네터리라고 합니다. 모네터리 소백작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블레어가 아이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최대한 다정하게 웃었다. 잘생긴 얼굴로 잔잔하게 웃자 아이의 경계심이 천천히 풀려 가는 게 느껴졌다.
“데인 황자님이시지요?
블레어가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레어가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아직 아기나 다름없을 정도로 어린 꼬마였다. 블레어가 보기에는 넘어지지 않고 서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아이를 잘 모르는 블레어가 보기에도 데인의 안색은 영 밝지가 않았다. 뺨이 사랑스럽게 포동포동하지도 않았고, 혈색이 돌지도 않았다. 의복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웠지만, 아이에게는 어딘가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이가 쭈뼛쭈뼛 블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를 살피다니. 어린아이, 그것도 제국의 황자가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블레어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눈살을 찌푸렸다. 곧 표정을 갈무리한 블레어가 아이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렇게 뵙게 되네요. 저는 황자님의 형님 되시는 카일 전하의 친구 되는 사람입니다. 황자님의 매형 되시는 테오도르 님의 동생이기도 하죠. 우리는 친인척이겠군요.”
블레어가 웃으며 아이의 경계를 풀어 주었다. 친인척이라는 말에 아이의 경계 어린 표정이 누그러졌다.
“공부하러 가기가 싫으십니까?”
블레어가 다정한 목소리로 어르자 눈치를 보던 아이가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제법 귀엽게 생긴 아이였다.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잠깐 노실까요?”
뒤에서 시녀가 안절부절못했지만 블레어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꼬마가 천천히 블레어의 소맷자락을 붙들었다. 블레어가 아이를 안고 일어섰다. 아이의 몸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아이의 몸이 붙은 몸에서 따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블레어가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주자 아이가 블레어의 목을 끌어안고 답삭 들러붙었다.
블레어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오늘 막내 황자님께서 무슨 수업을 들으셔야 하는가?”
“귀족의 교양을 가르치시는 에스마르흐 남작께서 오실 시간입니다.”
“그렇군. 혹시 공부하러 가고 싶으십니까? 가시겠어요?”
블레어가 묻자 아이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도리질을 쳤다. 블레어가 웃으며 작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이제 겨우 글씨를 뗐을 정도로 어린아이였다. 당연히 공부하기 싫을 것이었다.
“오늘은 남작께 황자님께서 수업을 듣지 못하실 것 같다고 전해 주게나. 남작께서 지나치게 나무라시면 내가 그러라고 했다고 전하고.”
아직 완전히 작위를 이어받은 것은 아니지만 블레어는 국서의 동생이자 모네터리가의 후계자였다.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귀족은 이 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예, 알겠습니다.”
시녀들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황자님은 내가 모실 테니 다과를 좀 내오거라.”
시녀들이 꾸벅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아이를 안은 블레어가 다시 천천히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블레어가 계속 데인의 작은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아이는 꼭 어린 동물이 된 것처럼 블레어의 품에 딱 달라붙어 왔다. 아이의 몸이 따끈따끈했다.
정원 곳곳에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은 블레어가 허벅지 위에 아이를 앉혔다. 아이가 품에서 도통 떨어지려고 들지 않아서 한참 얼러야만 했다. 블레어가 허벅지에 앉은 데인의 앞머리를 슬슬 쓸어 주었다.
“데인 황자님.”
블레어가 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아이의 눈은 카일의 것처럼 선명한 푸른빛 눈동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녹음이 어린 정원 같은 색이었다. 잘 익은 올리브 같은 눈동자가 얼굴에 박혀 있었다. 무척 사랑스러운 꼬마였다.
“공부하기가 싫으셨습니까?”
블레어가 묻자 데인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황가의 자식들은 호되게 교육을 받기 마련이다. 자연히 교육이 시작되는 시점이 다른 귀족가보다 빨랐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고작 너덧 살 된 어린아이가 공부를 좋아할 리는 없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데인이 단풍잎 같은 손을 펼쳐 손가락을 꼬물꼬물 폈다. 엄지손가락 하나를 접고 짧고 통통한 손가락 세 개를 뻗었다.
“세 살이십니까?”
블레어가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세 살이나 되셨는데 어째 저와는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저는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편이니 앞으로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블레어가 눈을 맞추고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아이가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블레어에게 더 가까이 앉아 몸을 기댔다. 블레어가 아이의 등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그랬다. 아드리아나가 후계자로 임명된 지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스피렌다 황비가 황녀 시해죄로 폐비되어 쫓겨난 지도 꼬박 4년이었다.
스피렌다 황비가 없으니 당연히 아이는 유모의 손에 맡겨져서 컸을 것이다. 그나마도 세 살이 되면서 교육이다 뭐다 하는 핑계로 길러 준 젖어미를 떼어 놓았겠지. 아드리아나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물론 애당초 귀족가의 여인들은 자식들을 본인의 손으로 기르지 않는다. 귀족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품행이 방정한 유모를 붙여 기른다. 황실의 자식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이를 비호해 줄 어미가 있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아이에게 아무리 관심이 없더라도 친어머니가 있으면 아이에게 베풀어지는 애정의 크기가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블레어가 알고 있는 과거의 스피렌다 황비는 자신의 아들만큼은 끔찍하게 예뻐하는 사람이었다. 괜히 기분이 미묘해졌다.
물론 블레어는 과한 욕심을 부렸던 스피렌다 황비를 쳐 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데인은 어른들의 사정에 휘말린 온전한 피해자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씁쓸해진 블레어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금빛 정수리와 오밀조밀 뻗은 귀여운 코가 보였다.
어미의 손에서 자라질 못했으니 당연히 부족했던 점이 많을 것이다. 황궁의 시녀들이 아무리 충실하게 보필한다고 해도 친어머니가 존재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힘없는 어머니라도 있었던 카일과는 다른 경우였다.
어머니가 정치 싸움에 휘말려 폐비가 된 황자. 외가도 패망해 버려 뒤를 봐줄 곳이 하나도 없는 황자. 현 황제인 아드리아나가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황자. 심지어 나이도 어려 천지 분간이 안 되는 황자. 그런 데인을 세심하게, 정성껏 돌봐 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녀들 간에도 알력 다툼이 있다. 권력에 가까운 주인을 모시는 시녀나 시종이 더욱 힘이 있었다. 끈 떨어진 주인에게 배치된 시녀들이 데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포동포동 살이 붙지 않은 뺨과 팔뚝도, 혈색이 풍부하게 돌고 있지 않은 얼굴만 보아도 그랬다. 의복만큼은 과연 깨끗하고 단정했다. 하지만 세세한 곳에까지 애정 어린 손길이 닿지는 않았다는 것을 아이는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블레어에게 안겨 짧은 시간 얻었던 체온에 매달리는 것만 봐도 아이는 사람의 정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복잡한 기분이었다. 데인은 이 상황에 휘말린 온전한 피해자였고, 블레어는 그에게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과거, 카일이 황제였을 적 데인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그도 잘 알지는 못했다.
과거에는 나이가 지나치게 어려 황권 다툼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던 데인을 데리고 그의 어미는 스피렌다 남작가로 돌아갔었다. 물론 그녀는 욕심이 많은 여인이었지만, 당시는 남편인 황제가 죽은 데다 장성한 조슈아와 카일이 격돌하던 상황이었다.
어린 아들을 앞세워 자신의 욕심을 차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물론 황실에 남아서 황실의 웃어른으로 대우받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카일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아론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위험 요소가 있는 친인척들을 쳐 내는 일이었다. 그 후의 일은 블레어로서도 솔직히 잘 알지 못했다.
대단한 이야기가 귀로 흘러 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특기할 만큼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데인은 그렇게 평범하게 자라 황자로서 살거나, 스피렌다 남작 영지를 이어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홀로 황궁에 남겨져 눈칫밥을 먹는 황자로 크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미래를 뒤튼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온전한 피해자인 데인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일말의 책임감이 들었다. 블레어가 다시 아이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공부하기가 싫으시면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블레어의 질문에 데인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동그란 정수리가 눈에 들어왔다. 블레어가 아이의 머리 위에 턱을 살짝 댔다. 아이의 머리에서 고소한 캐러멜 냄새가 났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아이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블레어가 아이의 몸을 추어올렸다. 타이밍 좋게도 시녀가 아까 부탁한 다과를 가지고 왔다.
“놓고 가거라. 황자님은 내가 돌보다가 모셔다 드리도록 하마. 무슨 일이 있거나 황자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하고.”
블레어의 이야기를 들은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물러섰다.
“알겠습니다, 소백작님.”
시녀를 보낸 블레어가 데인의 입에 잼이 발린 과자를 물려 주었다. 데인이 양손으로 과자를 집어 들고 다람쥐처럼 앞니를 써서 베어 먹기 시작했다. 과자를 먹는 데 열중하도록 내버려 둔 블레어가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주었다.
카일을 닮은 금발 고수머리. 데인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카일이 생각났다. 아마 지금쯤은 아카데미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