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72)화 (72/84)

72화.

모네터리가에서는 장남인 테오도르를 충실한 황실의 신하로 만들어 바쳤다. 세 남매 중 희생양으로 테오도르를 황궁에 밀어 넣었으니, 모네터리가에서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도 됐다. 블레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졸업한 후에 네가 관직을 맡아 준다면 정말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할게. 봉급, 휴가제도, 복리 후생까지, 전부!”

아드리아나가 짤랑짤랑 미끼를 흔들었지만 부잣집 아들인 블레어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졸업해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슬슬 가문의 일도 이어야 하고요. 아버지께서 제가 서른이 되기 전에 작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신 것 같던데요.”

블레어가 단호하게 거절하며 차를 마셨다. 늦둥이인 블레어와 손위 형제들은 나이 차이가 제법 났다. 당연히 백작 부부도 연배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 블레어가 서른 전에 작위를 이어받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아드리아나가 기대도 않았다는 듯 쯧,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럴 줄 알았어.”

“그 얘기를 하러 부르신 겁니까?”

블레어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일찍부터 황궁에서 들어오라는 전갈이 오기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싶었더니 고작 이런 일일 줄이야. 기존에도 수백 번 들었던 요청이었다. 아드리아나의 고집도 대단했다. 그 정도 거절당했으면 슬슬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저 근성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카일도 기본적으로 고집이 있는 성격이긴 했다. 하지만 카일은 블레어가 단호히 거절하거나 선을 그으면 더 묻질 않았다. 블레어가 머릿속으로 아카데미에 있을 카일을 떠올렸다. 안 돼! 라고 말하면 꼬리를 말고 시무룩해지는 강아지 같은 카일. 순한 애완견 같은 카일은 어디로 튀어 나갈지 종잡을 수 없는 사냥개 같은 아드리아나와는 달랐다. 블레어는 끈질긴 사냥개에게 먹잇감을 던져 주기로 결정했다.

“저 말고 차라리 카일 황자님은 어떻습니까?”

“카일?”

아드리아나가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드리아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폐하, 황족은 황궁에서 직책을 가지고 근무한 전례가 없습니다.”

테오도르가 아드리아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 번 꽂힌 아드리아나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왜? 국법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것은 없는 걸로 아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테오도르가 뒷말을 흐렸다.

“그럼 뭐, 안 될 거 있나?”

“아무래도 황족이 권력에 중심에 있으면 사달이 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다들 피해 왔던 일일 겁니다. 선대 황제들 모두가요.”

블레어가 별것 아닌 일이라는 투로 대답했다. 테오도르가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지만, 블레어는 그 신호를 모른 체했다. 지금은 자신의 안위를 모색하는 게 먼저다.

“그러면 뭐, 별문제도 아니잖아?”

“예. 정 마음에 걸리시면 폐하께서 좋은 인재들을 더 구하실 때까지만 일을 시키셔도 될 것이고요. 카일 전하께서는 꽤 성실하신 편이시니, 그쪽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오히려 뺀질대는 저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겠네요.”

“호오.”

아드리아나가 아주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선택지였지만, 블레어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카일은 그녀가 찾아 헤매고 있는 인재상에 딱 들어맞았다. 곧 아카데미를 졸업할 재원. 성실하고 순해서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잘 이행할 만한 사람. 블레어의 말대로 뺀질뺀질한 그보다는 카일 쪽이 오히려 황궁의 일에 적합했다. 지금 황궁은 성실하고 유순한 인재를 필요로 했다.

“호오오오. 알겠어. 그쪽은 내가 생각해 보도록 하지. 그러면 오늘 카일도 같이 부를 걸 그랬네. 괜히 오라 가라 하면 번거롭기만 한데.”

“하하, 전하를 부르시는 건 제가 없을 때 해 주세요. 괜한 원망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악역은 나 혼자서 다 하라 이 말이지? 그대는 언제나 아무 책임도 없고?”

아드리아나가 씩 웃었다. 생기라곤 전혀 없던 백금발과 연한 하늘색 눈동자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아드리아나는 저 자리에 썩 잘 어울렸다.

“뭐 그런 거죠.”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어쨌든 그대만 쏙 빠져나가려는 행동인 것은 당연히 알고 있지만, 대신 물려 준 먹이가 마음에 든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군. 확실히 나쁘지 않아. 어차피 그 애도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마땅히 할 일도 없을 거고. 비어 있는 영지로 내려 보내기 전에 황궁 일을 시키면서 여러모로 교육을 좀 하는 것도 좋겠지.”

아드리아나가 깍지 낀 손에 턱을 괬다. 블레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았지? 반 년 정도 남은 건가?”

“졸업은 그렇고, 학기가 끝날 때까지는 삼 개월 정도 남았습니다.”

“드디어 그대와 카일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군. 올해의 졸업생 중에 쓸 만한 녀석들이 많으면 좋겠는데.”

“충분히 마음에 차실 겁니다.”

“가장 황궁 안에 들여놓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지만, 정작 당사자가 그렇게까지 싫다니 더는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좋아, 오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바쁘신 시간 빼앗아서 죄송합니다.”

“공사다망한 사람을 오라 가라 부른 것은 내 쪽이지. 시간 내주어 고맙네. 자주 들러 주고.”

블레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어가 천천히 문을 열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테오도르가 블레어를 뒤따랐다. 앞서가던 블레어가 멈춰 서서 테오도르를 마주 보았다.

“자주 오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기분이구나.”

테오도르가 그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어느덧 훌쩍 자란 막내 동생은 이제 슬슬 어른의 태가 나고 있었다. 훤칠한 용모에 아카데미를 두 번이나 월반해서 졸업하는 수재 중 수재. 적당한 나이대의 딸을 가진 제국의 모든 귀부인들이 사윗감으로 그를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황궁 안에 있는 자신의 귀까지 들려왔다. 최대한 바깥과의 왕래를 삼가려고 하는데도 들려올 정도니, 정말로 블레어를 탐내는 귀족가가 많은 모양이었다.

“형님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었다. 블레어는 역시 테오도르를 좋아했다. 테오도르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뿌듯했다. 물론, 평범한 귀족가의 여인과 결혼해 백작으로서 살아가던 과거의 모습과 국서가 되어 행동의 제약을 받는 지금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삶이냐 묻는다면 어느 한쪽이 확실히 우월하다 답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확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지금 테오도르는 분명히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충만한 만족감이 떠올라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 옆에서, 그녀를 도우며 평생을 살아가는 삶. 비록 전면에 서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그녀의 화려한 그늘에 남아야 할지라도, 테오도르는 그런 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두 형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제법 닮은 분위기였다.

“그럼, 정말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자주 놀러 올게요.”

“그럼, 자주 오렴. 네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서 조카님을 낳아 주시면 한 번 올 거 열 번 오겠습니다.”

블레어의 농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곰 같은 사내가 시뻘겋게 얼굴을 붉히는 것도 참 보기 쉬운 광경은 아니었다. 나이가 서른이 넘은 사람이 별것도 아닌 말로 어쩜 저렇게 부끄러움을 잘도 탈까. 블레어가 하하 웃었다. 더 괴롭히지는 말아야지.

“음, 음.”

테오도르가 헛기침을 하며 먼저 응접실을 나섰다. 블레어가 그 뒤를 따랐다. 테오도르가 복도 끝까지 따라 나와 블레어를 배웅하려고 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마차 타는 것까지는 봐야지.”

“됐습니다, 한두 번 오는 곳도 아닌데요. 괜히 두 번 걸음 마시고 들어가십시오. 혼자서도 잘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허어. 오랜만에 동생과 시간 좀 보내려고 했더니 협조를 않는구나.”

“근시일 내 다시 한 번 들르겠습니다. 들어가세요.”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으며 테오도르의 배웅을 말렸다. 못 이긴 척 돌아서는 테오도르를 보낸 후, 블레어가 황궁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집은 주인의 취향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는 법이다. 과거에 보았던 황궁과 지금의 황궁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블레어의 취향은 단연 이쪽이었다.

육중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무겁고 투박했던 커튼이 모두 걷히고 하늘하늘한 레이스 커튼이 걸렸다. 온 황궁 내에 화사하게 빛이 들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황궁 복도를 통과한 블레어가 정원으로 향했다. 날씨가 지나치게 좋아 잠시 산책을 하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다.

황궁의 정원은 모네터리가에 꾸며 놓은 어머니의 정원과는 다른 맛이 있었다. 물론 모네터리가의 정원도 소박하다는 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황궁의 정원은 저택의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했다. 말을 타지 않고 사람의 걸음으로 걷는다면 하루가 꼬박 걸릴 정도로 넓었다. 잘 꾸며진 정원을 걸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블레어는 풀 내음을 맡는 것을 좋아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잔잔했다.

그때였다. 여유롭게 사색을 즐기고 있던 블레어의 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황자님, 들어가 보셔야 한다니까요!”

“……!”

뭐라뭐라 대답하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휴, 정말 들어가 보셔야 하는데.”

블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잘 꾸며진 정원의 산책로를 지나니 곧 목소리의 주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시녀 두 명과 어린애였다. 어린애? 블레어가 천천히 그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

블레어는 오지랖이 그렇게 넓은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눈에 들어왔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

블레어를 알아본 시녀들이 허둥지둥하며 손을 포개 꾸벅 인사를 했다. 소백작이자 국서의 동생인 블레어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이 황궁 안에 존재하질 않았다. 가볍게 손을 저어 시녀들의 자세를 풀게 한 블레어가 다시 한 번 눈짓을 했다.

“별일이라도 있나?”

“아니, 아닙니다.”

블레어가 시녀들의 뒤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어린애가 낯선 사람의 등장에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황궁에 웬 어린애지? 블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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