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68)화 (68/84)

68화.

블레어는 예상대로 그 다음 날도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국혼이 당장 다음 주로 다가와 있는데, 아직 해야 하는 일은 한도 끝도 없이 밀려 있었으니까. 블레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테오도르의 일 처리를 돕기 시작했다.

살아온 세월 덕인지, 고급스럽고 귀한 것을 많이 보고 자란 덕인지, 블레어는 꽤 안목이 있었다. 정신이 없이 일만 하고 있는 아드리아나를 붙잡아다가 제국의 최신 유행이라는 드레스의 디자인을 입혀 보고, 가장 어울리는 장신구의 세공 디자인을 골랐다.

심지어 결혼식은 아직 축문을 낭독할 사람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적당한 사람을 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최종 결정을 내려 줄 사람이 없어 모두 멈춰 있던 결혼 준비가 블레어의 가세로 천천히 진행되기 시작했다.

황족, 그중에서도 황제의 국혼이다. 보통의 귀족들도 결혼식에 드레스 한 벌만 맞추지는 않는다. 예식 때 입을, 드레스가 아닌 예복은 따로. 그걸 제외해도 여러 벌이 필요했다. 예식 전에 입을 드레스, 그 후에 입을 드레스, 퍼레이드를 할 때 입을 드레스. 아드리아나가 당일 입어야 하는 드레스만 다섯 벌이 훌쩍 넘어갔다.

덕분에 지금 황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인들은 드레스를 짓는 사람들이었다. 장인들이 바리바리 싸 온 샘플 드레스 중 아드리아나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을 블레어가 골라내고, 그 후에는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붙어 아드리아나의 사이즈에 맞추어 처음부터 다시 드레스를 제작했다.

덕분에 방 한 칸이 온통 드레스로 가득 차 있었다. 순백색의 드레스부터 화려한 색깔이 들어가 있는 유색 드레스까지. 모두가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옷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잔뜩 쌓여 있으면 아름답다고 느끼기보다는 질리기 마련이었다.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쌩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싶었지만, 이대로 갔다간 국혼 당일까지도 처리가 제대로 안 될 게 뻔했다. 게다가 며칠간은 황제도 휴가를 가야 했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수는 없더라도 분명 짧게 콧바람이라도 쐬러 갈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혼 전에 더욱 많은 일을 부지런하게 쳐 내야 했다.

당연히 카일도 한 손 거들어야만 했다. 외부 인력까지 끌어다가 몽땅 갈아 넣고 있는데, 궁에 노는 인력은 결코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꼬박 일주일간, 황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뿐인 황제의 국혼을 위해 혼과 열과 성을 바쳤다.

* * *

돈과 인력을 갈아 넣은 결혼식은 단연 화려하고 이상적이었으며 아름다웠다. 결혼식인 주인공들도 그랬다. 바짝 긴장한 티는 났지만, 국혼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엄이 그 긴장을 덮어 버렸다. 수많은 생화로 화려하게 꾸민 황도가 몹시 아름다웠고 새롭게 탄생한 부부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결혼식 당일은 날씨도 무척 따뜻하고 온화했다. 날씨가 험하다면 취소하기로 예정됐던 야외 퍼레이드도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그렇게 두꺼운 겉옷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국서의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가장 앞자리에 초대받은 블레어가 무척 흐뭇하게 결혼식을 바라보았다. 꼭 동화책 속 삽화같이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테오도르와 아드리아나가 커다란 마차에 앉아 황도를 돌기 시작했다. 주최 측에서 꽃을 나눠 받은 사람들이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꽃을 흩뿌렸다. 한겨울에 어디서 저렇게 많은 꽃을 구해 왔을까. 꽃을 만지작거리던 블레어가 잠시 의문에 잠겼다.

꽃을 만지작거리던 블레어의 머릿속에 카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블레어가 주머니에 접어 넣었던 쪽지를 꺼냈다.

[보고싶다.]

휘갈겨 쓴 짧은 문장이 담겨 있는 쪽지였다. 블레어에게 사뭇 익숙한 필체이기도 했다. 바빠서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며, 카일이 쪽지를 시녀의 편에 보내 왔다. 카일은 쪽지 귀퉁이에 작게 울고 있는 얼굴까지 그려 보냈다. 내용은 길지 않았지만 충분한 애정이 느껴졌다. 쪽지를 보고 빙긋 웃은 블레어가 다시 쪽지를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제국민들의 축복과 함께 결혼식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그럼, 다녀오겠다.”

“다녀오십시오, 폐하.”

아드리아나가 살짝 눈인사를 했다. 황실 가족들과 신하들이 화려한 마차를 배웅했다.

화려한 파티는 끝이 났다.

그 파티의 주인공들은 잠시 현실을 떠나 쉬러 갔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원래 일은 벌리는 것보다 뒷정리 하는 게 더 힘든 법이다. 그리고 당연히 블레어는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황궁에서 고용한 인력들이 잔뜩 벌여 놓은 장식들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블레어도 물론 뒷정리를 거들어야만 했다.

블레어가 회수된 장식을 한 아름 안아 들었다. 백작가의 삼남이 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누구라도 손을 거들어야 했다. 자질구레한 장식을 정리하고 있는 블레어의 뒤로 카일이 빼꼼 나타났다.

“블레어!”

카일이 방긋 웃으며 뒤에서 블레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 하고 있어?”

“정리요.”

허리를 놓아준 카일이 자연스럽게 블레어가 들고 있는 장식을 넘겨받았다. 두 사람이 나란히 보폭을 맞춰 중앙궁으로 향했다.

블레어가 중앙궁으로 돌아와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방에 들어갔다. 내일 아침에는 여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들을 정리해서 서류로 만들어 목록을 남겨야 했다. 제국의 황제의 결혼이라며 보내온 선물들이며, 장인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보석과 레이스, 그리고 비단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저놈의 선물들은 언제 다 정리하고 기록하지. 블레어가 흐린 눈으로 선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아, 힘드네요.”

블레어가 털썩 샘플 드레스들이 수십 벌 놓여 있는 의자에 편하게 주저앉았다. 한 벌에 수천 골드를 호가하는 드레스 수십 벌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카일이 그 모습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힘들어?”

“원래 연극이 끝나면 뒷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천천히 하면 되잖아.”

“이 많은 규모를 천천히 했다간, 폐하와 형님이 돌아오실 때까지도 일이 끝나지 않을걸요. 게으름을 부릴 때가 아니에요.”

“네가 관리인 것도 아니고, 남들한테 맡겨. 녹봉 받는 것도 아닌데. 네 일이 아니잖아.”

“그것참, 굉장히 좋은 생각이네요.”

블레어가 이제야 알았다는 투로 대답하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바짝 다가온 카일이 한 뼘 정도 떨어져 블레어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블레어에게는 카일을 밀어낼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블레어의 얼굴을 본 카일이 살짝 시무룩해졌다.

“쉴 수는 없죠.”

“그래도 오늘은 쉬자.”

카일이 씩 웃었다. 어쨌든 카일의 말대로 오늘은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바짝 긴장한 테오도르와 아드리아나만 하겠냐마는, 블레어도 못지않게 피곤했다. 블레어가 나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걸터앉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고급 드레스를 한 벌 집어 들었다.

“제국에서 유행한다는 디자인, 공들였다는 드레스란 드레스는 여기에 다 와 있는 것 같네요. 이거 어차피 버려야 하는 옷들이죠? 전부 가져가다가 드레스샵을 차려 볼까요? 불티나게 팔릴 것 같은데. 의상에만 예산이 상당히 많이 깨졌겠어요.”

“그랬겠지. 그만큼 누님께 잘 어울렸으니까, 뭐.”

블레어가 이번에는 베일을 집어 들었다. 거미가 짠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레이스가 촘촘히 짜여 긴 베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게요. 정말 아름다우셨어요. 역시 아름답고 화려한 옷은 사람을 더 예쁘게 만든다니까요.”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옷가지를 차차 헤치며 아름답고 화려한 옷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래? 드레스가 예뻐?”

“드레스요? 당연히 예쁘죠. 엄청나게 화려하고, 공을 많이 들인 옷이잖아요. 예쁘지 않을 리가요.”

“흐음, 그런가?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어서.”

카일이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블레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카일의 매끄러운 뺨을 살짝 건드렸다.

“하하, 뭘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도 돌아가서 슬슬 자죠. 나 먼저 씻고 올게요. 먼지가 많이 묻어서 씻어야겠어요.”

“응, 다녀와.”

카일이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어깨 위에 걸쳐 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에 돌아온 블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이 지나치게 깜깜했다. 왠지 달콤한 향기가 감도는 것도 같았다. 시녀가 들어왔다가 나갔나. 블레어가 벽을 손으로 더듬으며 불을 켰다.

“불은 왜 끄고 있어요?”

불이 환하게 켜지며 방이 눈에 들어왔다. 블레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어, 음. 어, 어.”

방을 확인한 블레어가 말을 더듬거렸다. 블레어는 무척 대범해 어지간하면 놀라는 일이 없었는데, 지금 방 안의 풍경은 정말 놀라웠다. 그런 블레어를 보고 카일이 미소 지었다.

“뭐 해?”

“당신이야말, 로 지금 대, 대체 무엇을.”

카일이 그의 침대 위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은 채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한겨울에 얼어 죽을 일이 있냐며 기각시켰던, 어깨를 훤히 드러내는 웨딩드레스였다. 다소곳하게 어깨를 좁히고 있었지만, 떡 벌어진 골격은 그런 가상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감춰지지 않았다.

어깨를 덮는 디자인의 옷은 몸에 맞지 않아 차마 입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진주를 한가득 박아 넣고, 치맛자락이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 카일은 심지어 하얀색 레이스로 짜인 초커까지 하고 있었다. 몸에 맞지도 않을 웨딩드레스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몸을 욱여넣을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였다. 곧고 예쁜 쇄골이 블레어의 시선을 빼앗았다.

카일은 아까 블레어가 만지작거렸던 베일까지 쓰고 있었다. 제법 본격적인 차림새였다. 카일이 베일을 머리 뒤로 넘겨 얼굴을 드러냈다. 곱슬곱슬하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 위로 하얀 베일이 미끄러지듯 넘어갔다.

몸에 맞을 리가 없는 웨딩드레스. 뒷부분의 단추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로, 어설프게 혼자서 낑낑대며 입었을 웨딩드레스. 분도 하나 바르지 않은 얼굴 위로 떨어지는 베일, 꽉 끼는 웨딩드레스 위로 튀어 나와 있는 팔뚝 근육과 가슴 근육들이 전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들이 신기하게도 나름대로 조화를 이뤄 쓸데없이 잘 어울렸다.

분명 웃음이 나와야 정상인데, 카일과 웨딩드레스는 상당히 잘 어울렸다.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탈이었다. 블레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블레어의 표정을 확인한 카일이 화사하게 웃었다.

“뭐예요, 도대체?”

“아까, 드레스가 예쁘다고 했잖아.”

베일을 걷고 다가온 카일이 블레어의 허리를 안았다.

“물론 예쁘죠. 그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블레어가 카일을 밀어냈지만,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은 단단했다. 근육이 잘 잡혀 있는 팔은 근육의 갈라짐이 또렷하게 보였다. 카일이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근육의 움직임, 따뜻한 체온이 옷 너머로 느껴졌다. 블레어는 이렇게 맞닿아 있을 때마다 인간의 체온이란 건 생각보다 무척 강렬하고 뜨거운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곤 했다.

“나도 예쁘잖아. 오늘은 더 예쁘고.”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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