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는 일이 없는 블레어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이야기였다. 황제 폐하 이야기는 한마디도 안 하시더니 언제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진척됐대? 나만 몰랐던 얘기야? 블레어가 입을 떡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하자 테오도르는 그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그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과거를 회상하고 있던 블레어를 현실로 잡아 끌어온 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테오도르가 황궁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테이블 앞에 올려 두곤 블레어를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아휴, 정말 테오도르는 알다가도 모를 애라니까.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게 잘만 키워 놨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이 부모랑은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냅다 결혼을 한다고 통보를 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주 다음에 집에 오면 혼쭐을 내 줘야겠어!”
장신인 세 남매에 비하면 한참 작고 아담한 어머니가 주먹을 불끈 쥐어 봤자 전혀 위협이 되질 못했지만, 블레어는 그저 하하, 웃으면서 어머니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그러게요. 형님이 너무하셨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
“블레어, 너만은 정말 그러면 안 된다. 꼭, 꼭. 결혼할 사람이 생기거든 이 어미한테 제일 먼저 보여 줘야 한다! 테오도르는 통보를 하질 않나, 클라라는 알아서 혼자 잘 살겠다면서 결혼할 생각도 전혀 안 하고 있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니?”
평상시에는 선하고 말간 모네터리 백작 부인의 눈빛이 오늘따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 하, 하.”
블레어가 멋쩍게 웃었다.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소개시켜 달라니요. 어머니,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미 많이 만나 보셨을걸요. 블레어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하여튼 자식새끼들 훤칠하고 멀쩡하게 잘 키워 놓으니까 집을 나가서 돌아올 생각도 않고. 휴우. 내가 다른 귀부인들을 만나면 도무지 자랑을 못 해. 이게 말이나 되니? 이렇게 번듯하게 잘 키워 뒀는데? 다른 집안 자식들 아무리 봐도 우리 아이들만 못한데, 나만 할 말이 없다니까.”
백작 부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각자 잘 하고 계시는걸요. 그러고 보니까 저도 형님을 뵌 지 오래되었네요. 내일쯤 잠시 황궁에 들러 봐야겠습니다.”
블레어가 매끄럽게 말을 돌렸다. 생각이 난 김에 테오도르에게 짐을 좀 챙겨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겸사겸사, 방학을 하고 난 후 제대로 보지 못한 카일도 만나고 오고.
“황궁에 가려고?”
“제대로 밥도 못 드시면서 일하고 계실걸요. 형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좀 챙겨서 가야겠어요. 물론 거기도 다 있겠지만요.”
“그래, 그러렴. 몸에 좋다는 석청이 들어왔으니까 그것도 좀 가져가고. 클라라가 가지고 왔더라.”
“예, 그럴게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주방에 일러서 테오도르가 좋아하는 마멀레이드가 들어간 쿠키도 좀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 내일 그것도 챙겨 가렴.”
백작 부인이 부산스럽게 일어나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머니의 잔소리 폭격에서 벗어나 한시름 돌린 블레어가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말로 여행이나 갈 걸 그랬다.
그 상황을 면피하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대로, 블레어는 그 다음 날 아침에 한손으로 들기 힘들 정도의 짐을 들고 황궁으로 향해야만 했다.
테오도르가 좋아하는 음식이며 선물 따위를 한가득 들고 황궁에 도착한 블레어는 곧장 테오도르의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똑똑-
짧게 노크한 블레어가 문을 슬쩍 열고 들어갔다.
“형님?”
블레어가 멋쩍게 웃으며 테오도르를 불렀다.
“블레어냐?”
테오도르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눈을 떴다. 어디로 봐도 단꿈에 젖어 있을 새신랑의 모습이 아니었다.
“형님, 괜찮으신 거 맞죠?”
블레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코끝까지 내려와 있는 다크서클, 퀭한 눈매, 살이 내린 건장한 체구가 모두 테오도르의 고난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집행부의 관리직은 퇴직하신 것 아니었나요?”
블레어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황제의 남편인 테오도르는 이제 국서(國壻)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지금까지 여자 황제가 제위에 오르고, 그 배우자가 남자였던 적이 없었던지라 황궁의 모든 관리들이 뛰어다니며 기록을 찾아 댔다. 결국 머나먼 과거에 적힌 글들과 주변 국가에서 부르는 호칭을 찾아 헤맨 덕에, 앞으로 황제인 아드리아나의 부군이 될 테오도르는 국서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황후와 황비들은 절대로 국정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이건 국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 말은, 테오도르도 현재 재직 중인 관직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전의 황비나 황후도 관료 출신인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만 한 고위 관료가 황제의 배우자가 됐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모두들 한동안 우왕좌왕했다.
천천히 인수인계를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가 없으면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퇴직한 후에도 매일같이 기존의 집무실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새벽 별 보며 출근해서 저녁 별 보며 퇴근을 하는 나날이었다.
“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아드리아나 님이 워낙 바쁘시잖니. 결혼식까지만 내가 살피고, 그 다음에는 다 넘겨야지.”
“고생이 많으시네요.”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테오도르의 책상에 살짝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세요. 건강도 챙기지 못하고 일할 게 뻔하다고 하시면서 저한테 가 보라고 하셨어요.”
블레어가 짐을 풀어 석청이 담긴 꿀단지를 앞에 내려놓았다.
“귀한 거라고 하니까 형님만 드시고요. 쉬엄쉬엄하세요.”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럴 수야 있나.”
결혼이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테오도르의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사랑의 힘이란. 결혼식이라는 단어에는 다 죽어 가는 사람도 살려 내는 마력이 있었다. 블레어가 속으로 작게 웃었다.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으면 도와드리다 갈게요.”
블레어가 웃으면서 자리에 앉아 서류 더미를 집어 들었다. 물론 어떠한 권한도 없는 블레어가 서류를 처리하는 건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결재권자인 테오도르가 허락했으니 상관없었다.
“고맙구나.”
“장인들의 진행 사항은 제 쪽에서 한번 거른 후에 보여 드릴 테니, 형님은 다른 걸 하세요.”
테오도르를 잠시 도와주고 카일에게 가 보려던 블레어는 꼼짝 없이 붙들려야만 했다. 능력 있는 조수가 생긴 덕분에 테오도르의 일이 한결 줄어들었다.
“얼마 만에 제시간에 퇴근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도와준 덕분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형님.”
두 형제가 테오도르의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슬슬 저녁달이 뜨고 있었다.
“어디로 갈 참이냐? 식사라도 하고 가지 그러니?”
“여기까지 왔는데, 카일 님을 좀 뵙고 가려고요. 저녁은 다음에 함께 하죠.”
“그래. 날이 추운데 조심해서 가거라.”
“형님도요.”
짧게 인사를 마친 블레어가 카일이 머무르는 궁으로 향했다. 궁이 가까워 올수록 그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거의 달리다시피 해 카일의 궁에 도착한 블레어가 방으로 안내받았다. 손님을 맞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블레어가 천천히 준비되어 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손수 의자를 잡아 뺐다.
자리에 앉자마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블레어!”
“카일.”
카일이 문을 닫고 다가와 블레어의 목을 답삭 끌어안았다.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왔는지, 하얀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뭘 그렇게 급하게 뛰어오고 그래요, 천천히 오지.”
“보고 싶어서. 오랜만이잖아. 황궁에는 아까 대낮에 들어왔다면서, 지금 오다니. 너무해. 찾아가려고 했는데 꾹꾹 참았어.”
카일이 어깨에 고개를 묻고 비비적거렸다.
“오랜만입니까?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지난주에도 봤는데.”
“오랜만이야. 일주일 만에 봤으면 오랜만인 거 아니야?”
“그런가요.”
“안 찾아가고 잘 참았으니까 칭찬해 줘.”
카일이 눈을 반짝거리며 빛냈다. 블레어가 천천히 카일의 보들보들한 금발 머리를 쓸어 주었다. 카일이 냉큼 블레어의 옆자리에 앉았다. 블레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일인용이었다. 물론 보통의 일인용 의자보다는 훨씬 폭이 넓었지만, 건장한 남자 둘이 나란히 앉을 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블레어가 슬쩍 카일을 밀어냈지만, 카일은 밀리지 않고 꿋꿋하게 바로 그의 옆에 앉았다. 블레어의 손을 끌어온 카일이 손가락을 조물조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요, 칭찬해 드릴게요. 저녁 식사는 했어요?”
“아니.”
“일단 저녁부터 같이 먹어요. 아무리 봐도 당분간은 형님을 도와 드려야 해서 집에 못 돌아갈 것 같은데, 좀 재워 주겠어요?”
블레어가 부드럽게 웃으면서 카일을 떼어 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물론이지. 얼마든지 머물다 가. 아예 너도 테오도르 형님처럼 눌러앉아도 좋고.”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러면 모네터리가는 누가 잇습니까. 애초에 그 전에 아카데미부터 좀 졸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블레어가 웃으면서 그에게 몸을 한껏 치대고 있는 카일을 떼어 냈다. 테오도르가 국서가 되면, 그는 자연스럽게 크라시아 황가로 편입이 되니 모네터리가의 상속권이 사라진다. 클라라는 상단을 가져갔으니 남은 것은 블레어뿐이었다.
돌고 돌아 모네터리 백작의 후계자가 되다니. 왠지 그 생각을 하면 기분이 복잡해졌다. 물론 아직 공식적으로 공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분명 이번 대의 소백작은 자신이 될 것이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모네터리 백작 위를 잇게 될 것이다.
“저는 가문을 이어야 하니 황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당신이 모네터리 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쪽은 언제나 환영인데요.”
블레어가 씩 웃으면서 말을 뱉었다. 블레어의 말을 들은 카일이 잠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빙그레 웃었다.
“정말 그럴까.”
카일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농담입니다, 농담. 어디 황자님께서 백작가로 들어오시나요.”
“어차피 무늬만 황자인데, 날 백작께서 양자로 삼아 주시면 안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블레어가 카일의 말을 일축하며 작게 웃었다.
“그러면 네가 모네터리 백작이 되고 나면 날 모네터리 가문에 편입시켜 줘.”
“안 된대두요.”
“자꾸만 안 된다고만 하고. 흥!”
카일이 삐친 척을 하며 블레어의 입 위에 입술을 찍었다. 블레어가 웃는 얼굴 그대로 입을 살짝 벌려 주었다. 카일 혀가 미끄럽게 입술 위를 타고 그의 안으로 침입했다. 두 사람의 혀가 장난스럽게 섞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