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와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에 화답하듯, 황도를 꽝꽝 울리는 폭죽이 계속 터졌다. 홀을 받아 든 아드리아나가 오른손에 든 홀을 치켜들었다. 축제의 서막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반짝반짝 행복으로 빛났다.
책봉식이 끝날 때까지 끝까지 앉아서 기다리던 블레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허겁지겁 자리를 뜨려는 카일의 손목을 블레어가 단단하게 붙들었다. 지금 블레어와 마주봤다간 어떤 말이 튀어 나갈지 몰랐다. 심장만 통제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혀까지 마음대로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왜, 왜?”
깜짝 놀랐는지 카일이 말을 더듬었다.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얘기 좀 하시죠.”
“응.”
블레어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그 얼굴에는 기묘한 박력이 흘렀다. 블레어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카일이 그의 말을 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소란의 한복판에서 멀어졌다. 황궁 안에 작게 조성되어 있는 호수에 도착한 블레어가 그때까지도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카일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어째 뵙기야 자주 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무척 오랜만인 것 같군요.”
블레어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로 돌아와 목표했던 일들이 나름의 형태를 띠고 끝을 맺어 가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마음이 평화로웠다.
“잘 지냈지.”
카일이 더는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담담하게 대답했다. 막상 블레어와 마주치고 나니 마음은 생각보다 평안했다. 그저 기분이 좋았다.
“다행이네요.”
블레어가 가볍게 뒷짐을 지고 천천히 호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카일이 그 뒤를 따랐다.
“어떠셨습니까, 오늘 책봉식은?”
“멋졌지. 무척 잘 어울리시더라.”
카일이 잔잔하게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아쉽거나, 그러시진 않으셨습니까?”
블레어가 마음속에 내도록 품고 있던 질문을 꺼내 들었다. 카일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부채감이었다.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왜긴요. 카일 님께서도 얼마든지 후계자 위를 노려보실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블레어가 빙글 돌아 카일을 돌아보았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금빛 고수머리가 선명하게 망막에 박혀 들었다.
“내가? 아니, 전혀. 난 내가 한 번도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걸. 당연히 누님이나 형님의 몫이라고 생각했지. 난 셋째잖아. 게다가, 너도 알다시피 어머니의 배경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카일이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그 꿈을 꾸고 나서, 수백 번도 수천 번도 더 했던 생각이었다. 황제가 될 수 있어도 절대로 그러지 말자. 나는 황제의 재목이 아니다. 그리고 또 다시 그 미래가 반복됐다간 나는 블레어를 잃게 될 것이었다.
카일은 지금까지 겪어 왔던 꿈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자신의 삶이 흘러간다면 꿈속의 일이 똑같이 반복될 것만 같았다. 불안이고, 말도 안 되는 억측이라고 해도 좋았다. 카일은 그저 일말의 가능성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꿈속에서 보았던 미래처럼 이루어진다면, 자신은 끝내 블레어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꿈속에서 느끼던 그 끔찍한 슬픔을 현실에서도 절대로 겪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게 예정된 미래라면, 카일은 자신에게 다른 길을 열어 줄 생각이었다. 카일이 단호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블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요.”
“순리대로 모든 게 돌아갔다고 생각해. 누님은 영리하시고 부지런하시니 분명히 좋은 황제가 되실 거야. 최초의 여황제가 이뤄 가는 업적을 가장 근거리에서 보는 것도 좋겠지. 내가 황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끔찍한걸. 이 나라가 금세 망해 버릴지도 몰라.”
카일의 농에 블레어가 작게 웃었다. 절반 정도는 농이 아니었지만, 블레어가 농담으로 받아들여 주니 다행이었다.
“날 높게 평가해 주는 건 좋은데, 역시 난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카일이 근처에 피어 있는 작은 들꽃을 꺾었다.
“카일 님도 분명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잘 하셨을 겁니다.”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었다. 실제로 그가 봤던 황제 카일은 그렇게까지 엉망진창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자신의 몫은 충실히 이행하던 사람이었지.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네. 그래도 난, 역시 지금이 훨씬 좋아.”
카일이 가까이 다가와 블레어의 손을 잡았다. 블레어에게 꽃을 쥐여 준 카일의 얼굴이 점점 예쁜 색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가까이 다가온 카일이 다시 블레어의 입술 위에 자신의 것을 내리눌렀다. 지하 석실에서 충동적으로 입술을 찍었던 것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블레어가 눈을 감으며 입을 부드럽게 벌려 주었다. 카일의 혀가 블레어의 입 안을 가르며 들어왔다.
꾹꾹 눌러 가둬 두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범람해 블레어의 키를 넘어섰다.
풍덩, 마음이라는 물에 블레어가 내던져졌다. 아무리 정리하려고 애써 봐도 그저 마음을 닫아걸고 외면하던 것뿐이었다. 꾹꾹 닫아걸고 있던 빗장이 풀리니 마음이 거세게 범람했다.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epilogue
한참을 입을 맞추던 두 사람이 떨어졌다. 카일이 잔뜩 울망거리는 눈으로 블레어를 쳐다보았다. 가슴 위에 손을 포개 올리는 것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카일은 생각보다 입맞춤에 서툴렀다. 대단히 우습고 귀여웠다. 블레어가 픽 웃자 카일이 왜 그러냐며 고개를 갸웃댔다.
“귀여워서요. 서투시네요.”
카일이 얼굴을 확 붉혔다.
“처, 처음이니까 당연히 그렇지!”
블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거, 카일의 모든 연애사를 줄줄 꿰고 있는 블레어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때의 카일은 서른다섯 살이었고, 지금 카일은 고작 열아홉이었다.
그래도 저런 얼굴을 가지고 열아홉 살까지 입맞춤 한번 안 해 봤을 거라는 생각은 못했는데, 그건 정말로 블레어의 패착이었다. 카일이 울망울망한 표정으로 블레어를 바라봤다.
“너는 해 본 적이 있는 거야?”
블레어가 쓱 카일의 시선을 피했다. 젊고 잘생긴 데다 작위까지 있고, 몸매까지 출중한 대장군을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턱이 없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유혹에 응한 적은 없었지만 반라로 블레어의 침상에 난입했던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육탄 돌격을 해 오는 사람들도 무수히 많았다. 모두 연회나 파티만 열리면 블레어의 옆자리를 꿰어 차려고 호시탐탐 눈치 싸움을 해 댔다.
카일에 대한 신의를 지키는 것도 좋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블레어는 경험이 전혀 없는 숙맥은 아니었다. 그 역시 상대방의 적극적인 어필에 가벼운 만남을 가져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욕구를 해소하는 방편이었고, 실질적으로 깊은 감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어린 몸은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의 일이다. 지금의 블레어가 겪은 일은 분명 아니었지만, 이미 입 밖으로 흘러 나가 오해를 사게 만든 말을 수습할 수는 없었다. 블레어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화가 잔뜩 난 카일이 블레어의 목덜미를 콱 물었다. 꼭 어린 늑대가 제 것이라며 냄새를 묻혀 영역 표시를 하는 느낌이었다.
“하하.”
블레어가 명랑하게 웃었다. 유쾌했다. 블레어가 한손은 카일과 깍지를 끼곤, 카일이 매고 있는 타이를 끌어당겨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눈을 짐짓 동그랗게 떴던 카일이 순순히 눈을 감았다. 금빛 속눈썹이 예쁘게 파르라니 흔들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다.
<完>
외전
Al coda Ⅰ: 웨딩드레스
크라시아 제국 황제의 결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한 날짜와 구체적인 스케줄이 공표됐다. 황실에서는 칠 일 밤낮으로 진행될 연회를 계획했고, 수없이 많은 장인들이 각자의 역할을 분배받았다. 제국 전역이 들뜨기 시작했다. 황제의 결혼식이라니. 분명 대단한 규모의 행사가 될 것이다.
분명히 테오도르의 짝사랑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 두 사람이 그렇게 마음이 통했을까. 블레어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테오도르의 긴 짝사랑은 그렇게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짝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준 블레어로서도 뿌듯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였다.
황실은 겨울 내내 국혼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겨울은 커다란 행사를 진행하기에 적합한 계절이 아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는 최대한 사람들의 생업을 방해하지 않는 국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겨울을 선택했다.
겨울은 대부분의 제국민들이 농사를 멈추고 따뜻한 집 안에서 여유를 즐기는 계절이다. 덕분에 추운 겨울날, 수없이 많은 장인들이 황궁으로 불려 와 레이스를 짜고 보석을 세공했으며 의복을 지었다.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 폐하께서는 너무나 공사다망하시어, 결혼식의 진두지휘는 새신랑이 될 예정인 테오도르가 모두 맡아야만 했다. 테오도르와 아드리아나가 모두 바쁘다 보니, 곧 신혼의 단꿈을 누려야 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본 지도 오래였다.
테오도르는 요즘 모네터리가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황궁에서 내내 숙식을 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어서 결혼을 하라며 테오도르를 달달 볶던 모네터리 백작 부인은, 정작 큰아들이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고 도통 집에를 들리질 못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서운해했다. 그녀는 계속 서운해하는 대신 다른 타깃을 찾았다.
당연히 그 희생양은 저택 안에서 무료하게 쉬고 있던 블레어였다. 클라라는 이미 눈치 빠르게 상단 일을 보러 간다며 집을 뛰쳐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사실 블레어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 졸업을 앞둔 그는 이번 방학 때 전체적으로 크라시아 제국을 돌아보는 여행을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블레어의 야심찬 계획을 자초시킨 것은 다름 아닌 큰형, 테오도르였다. 뜬금없이 얌전히 모네터리 저택에서 잘 놀고 있는 그를 부르더니 얼굴을 잔뜩 붉히고 한다는 소리가,
‘나, 결혼할 생각이란다.’
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