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65)화 (65/84)

65화.

제국 전역에 한바탕 어마어마한 폭풍이 몰아쳤다. 생각보다 인신매매 시장의 규모가 컸다. 규모가 크다기보다는,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면 유지된 기간이 길다 보니 엮인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노예로 거래되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오랫동안 변태에게 특정 목적으로 팔려 나간 사람들도 무수히 많았다. 사람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다행히 장부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어 피해자들의 신병도 꽤나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사람을 사고팔았던 사람들은 엄히 국법으로 다스리기로 했다. 워낙 규모가 커서 의회에서 부랴부랴 특별법까지 제정해서 가져다 바쳤다. 물론 그 의회에도 연관되어 있는, 양심 없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어서 제국민들의 원성을 잔뜩 샀다.

워낙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데다 큰 사건이라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드리아나가 전면에 나서 지휘봉을 잡았다. 납치 사건에 잔뜩 날카로워져 있던 민심이 모두 아드리아나에게 향했다. 물밑 작업도 시작됐다.

여자라고 황제가 되지 못할 이유는 어디 있어?

어설프고 멍청한 남자가 황제가 되는 것보단 자질 있는 사람이 황제가 되는 게 맞지.

아드리아나 황녀님은 첫째시잖아. 충분히 자격이 있으신데.

심지어 돌아가신 황후마마의 유일한 자식이시잖아.

몇 번 밑밥을 깔고 쿡쿡 찔러 주자 여론이 조성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반대하기에는 아드리아나가 걸어온 행보가 무척 뚜렷하게 그녀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완전히 황권을 노리는 행보였다. 정적이 되는 스피렌다가를 쳐 내고, 스피렌다 황비를 제거하고 공을 세운다. 만약 남자인 카일이나 조슈아가 그랬더라면 반론의 여지조차 없이 곧장 후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었다.

지금 군소리가 나오는 것은 모두 아드리아나가 여자라서 그랬다. 하지만 블레어는 믿고 있었다. 아드리아나는 결국 모든 것을 잘 이끌어 나갈 것이다.

* * *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생들이 모두 돌아온 아카데미도 무척 뒤숭숭했다. 작년 가을부터 황실의 일이 소란스럽게 돌아갔다. 제국의 모든 신경이 황실로 집중됐다.

“결국 황녀님이 후계자가 되시겠지?”

아론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블레어는 월반 시험에 멋지게 통과해 곧장 상급반의 수업을 듣게 되었다. 덕분에 아론과 블레어의 시간표가 엇비슷해져 점심을 같이 먹을 때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셋이서 콕 붙어 다니던 시절이 무색하게, 블레어와 아론만 모여 점심을 먹고 있었다. 카일은 블레어를 언제까지 피해 다닐 참인지, 블레어만 발견하면 돌아서서 멀찍이 멀어졌다.

그렇게 방학 내내 치대던 카일이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해 다니는 건 꽤 우스운 일이었다. 어찌나 블레어를 피해 대는지, 중간에 끼어 있던 카일의 생일에 선물을 챙겨 황실로 보냈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카일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심각할 정도로 쿵쿵 뛰어 대서 도무지 블레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심장이 불수의근인 게 문제였다. 도무지 심장의 속도를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많이 좋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지나치게 많이 좋아하게 돼 버려서 문제였다.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전혀 없는 아론조차 쟤 요즘 왜 저래? 하고 언급할 정도였다. 카일은 자신이 더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황녀님은 생각보다 잘 하실 것 같아. 여황제가 지금까지 없었다지만, 황녀님은 형제분들 중에 가장 나이도 많으시고 경험도 많으시니까. 당연히 후계자가 되셔야지.”

아론의 말이 지금 제국 전역에 깔린 보편적인 의견이었다. 물론 강성반대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세력이 약했다. 과거에 자신에게 해코지를 했던 조슈아 쪽을 끝장내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마무리였다.

“네 말대로 황녀님은 잘 하실 거야.”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식기를 내려놓았다. 아카데미며 제국, 사교계며 황실까지 모두 뒤숭숭했지만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연두색 새싹과 색이 엷은 꽃들이 피어나는 계절. 새로운 봄이 태동되는 시기였다. 새로운 일 년의 시작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모든 것이 오랫동안 고여 있던 크라시아 제국에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했다.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블레어의 머리카락을 따뜻한 바람이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블레어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꼭 구름 한 점 없이 파아란 하늘이 카일의 눈동자 같았다. 왠지 조금 설렜다.

10. Fine

한번 분위기를 타자 아드리아나를 후계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게 조성됐다. 애초에 지금 황제는 그렇게 젊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식들도 나이가 많았다. 지나치게 어린 막내 황자인 데인은 차치하고서라도, 카일만 보아도 나이가 성년이 넘은 열아홉이었고, 아드리아나는 나이가 스물일곱에 조슈아는 스물여섯이었다.

귀족가에서도 그 정도의 나이를 가진 장성한 자식이 있다면 슬슬 작위를 물려주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물론 그 나이에 즉위한 황제는 열 손으로 세도 모자랄 정도로 많았다. 카일의 형제들이 황제로 즉위해도 부족하지 않을 나이인데도, 지금은 후계자조차 없었다. 거의 사십 년이 되도록 공석으로 존재했던 후계자 위가 더 비어 있을 이유는 없었다.

가장 유력한 아드리아나의 등장으로 모든 지지가 하나로 쏠렸다. 아무리 황제가 아드리아나의 외가인 시이첸 공작가를 싫어하고, 조슈아와 카일을 탐탁지 않아 해 후계자로 그 누구도 세우지 않고 뻗댔더라도 지금은 결정을 해야 했다. 늘그막에 본 사랑스러운 아내, 스피렌다 황비가 낳을 자식을 후계자로 만들 거라는 황제의 계획은 이미 틀어진 지 오래였다.

이쯤 되면 당연히 아드리아나를 후계자로 세워야 했다. 실제로 황제의 건강이 차츰 악화되고 있었다. 블레어가 점성술이라며 농을 쳤던 모든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오랜만에 찾아온 테오도르를 앞에 앉히고 차를 내주었다.

“아바마마가 편찮으셔. 밖으로 내색은 않으시지만, 곧 모두가 알게 되겠지.”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후계자를 곧 공표하시겠습니다. 집행부가 바빠지겠군요.”

테오도르가 빙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쯤 되고 보니 그대의 동생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정말 궁금해지는군. 그의 말대로 점성술사인 걸까? 미래를 본다거나? 신기하단 말이지.”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테오도르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조차 자신의 막냇동생이 어떤 사람인지는 도무지 알기 어려웠다. 하여튼, 신기한 아이다.

“하여튼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와 그대의 덕이야. 이 은혜는 잊지 않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황녀님.”

아드리아나가 빙긋 웃으면서 테이블 위에 놓인 테오도르의 두툼한 손을 토닥였다. 하나는 곰의 앞발처럼 두툼했고, 하나는 작고 가녀렸지만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손 한 쌍이였다.

아드리아나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그녀를 후계자로 공표하는 책봉식의 날짜가 정해졌다. 여전히 칼슈온 황비와 조슈아는 가자미눈을 뜨고 다니며 아드리아나를 볼 때마다 성질을 부렸지만, 기세는 이미 넘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후계자를 정하는 일이다. 절대로 간단히 치르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거의 사십 년 만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크라시아 제국의 모든 일이 멈췄다. 책봉식은 임시 휴일로 정해졌다. 아카데미도 물론 휴강이었다.

대관식도 아니고, 후계자 책봉식일 뿐이니 황실 안에서 간단하게 치르고 넘어가자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기왕 오랜만에 하는 행사이니 뒤숭숭한 분위기도 가라앉힐 겸, 축제를 벌이자는 의견이 더욱 우세해서 결국 황도 한복판에서 판을 크게 벌려 책봉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책봉식이 진행될 광장에는 일주일 전부터 자리를 맡아 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블레어는 책봉식 가장 앞자리에 초청을 받았다. 블레어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모든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기름을 발라 잔머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도록 단정한 이마를 드러내고, 많이 자란 머리카락을 한 줄로 길게 묶어 등 뒤로 늘어트렸다. 검은색 정복을 입고 가슴에 금장에 박힌 보라색 보석을 달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차림새를 보니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과거에, 수없이 많이 보았던 대장군으로서의 모습이었다. 검 대신에 그의 손에 하얀 실크 장갑을 착용했고, 대장군을 상징하는 보라색 브로치 대신 가문의 문장이 조각된 단추를 달았지만 과거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체적인 느낌과 퍽 유사했다. 물론 그때보다 지금의 얼굴이 훨씬 앳되긴 했다.

결국 돌고 돌아 이런 결말을 보게 되다니.

결코 나쁜 결말은 아니었다. 블레어가 빙긋 웃었다. 거울 속의 그가 같이 웃었다.

책봉식은 무척 화려했다. 덕분에 얼어붙었던 소비 심리가 풀리며 소비량이 크게 늘었다며 클라라도 기뻐했다. 그녀는 뼛속까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전체적인 축제 분위기가 황도에 조성되며 멀리 사는 사람들도 황도로 놀러 왔다.

그의 몫으로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은 블레어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뒤늦게 도착한 카일이 블레어의 시선을 피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블레어를 제대로 볼 수 없는지, 최대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카일은 하얗고 부드러운 공단에 금사로 수를 놓아 만든 예복을 입고 있었다. 밝고 빛나는 머리카락과 꼭 잘 어울리는 예복이었다. 곱슬곱슬하게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던 머리카락을 고정시켜 이마를 드러내자 훨씬 어른스럽고 성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어느 곳에 데려다 놔도 눈에 띄는 차림새였다. 오늘도 카일은 예뻤다.

카일을 보자 미묘한 죄책감이 떠올랐다. 그에게 자연스럽게 약속되어 있던 빛나는 미래를 자신이 빼앗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본인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그때도 지금도 자신이 그의 삶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했다. 블레어는 카일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었다. 블레어가 카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과연 자신이 잘한 것일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동시에 폭죽이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당하게 허리를 세우고 사람들의 손으로 뜬 레이스로 된 드레스를 입은 아드리아나가 나타나 단상을 올랐다. 아드리아나의 백금발이 엄청난 인파 속에서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드리아나가 후계자를 상징하는 홀과 관을 받아 들었다. 그녀에게는 지배자가 가져야 할 위엄이 있었다. 그 성스러운 모습에 기묘한 감동을 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들이 존재할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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