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순식간에 달려온 사람이 총관의 소시지 같은 팔뚝을 세차게 걷어찼다. 총관이 들고 있던 긴 검이 쨍그랑 떨어졌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총관의 왼쪽 팔을 잡아챈 사람이 왼쪽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트린 후 자신의 어깨를 뚱뚱한 팔 밑으로 밀어 넣어 어깨로 든 후 뒤로 메다꽂았다. 블레어의 다섯 배쯤 될 것 같은 커다랗고 퉁실퉁실한 몸이 블레어의 몸을 지지대 삼아 넘어가는 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블레어?”
카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쾅!
돌로 된 바닥이 깨지는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났다. 이미 단검에 찔려 왼팔을 못 쓰게 됐다는 것을 깨달은 블레어가 총관의 오른쪽 팔뚝을 쥐고 뒤틀어 탈골시켰다. 몸에 쏟아지는 고통에 총관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꽤액!”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렸다.
“성대에도 살이 쪘나, 소리가 왜 이렇게 탁해?”
블레어가 신랄하게 이야기하며 단검에 찔린 왼손을 지르밟았다. 카일의 단도가 뼈를 가르는 게 신발 밑창으로 느껴졌다. 이런 쓰레기는 동정해 줄 필요가 없었다.
“카일, 조심하라고 여러 번 얘기했잖아요.”
블레어가 카일을 돌아보며 이야기했다.
블레어는 단상 위에 서 있던 카일이 어딘가로 바삐 뛰어가는 것을 보고 카일의 뒤꽁무니를 쫓아온 참이었다. 적당히 앞을 막는 사람들을 베어 넘기거나 때려눕히고 있다 보니 어마어마한 발걸음 소리가 안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 경매장은 뒤에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블레어가 나풀나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카일의 금발 머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방이 몇 개 있어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었다. 덕분에 블레어는 거대한 멧돼지 같은 놈이 검을 들고 카일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고 살짝 눈이 돌았다.
“괜찮으십니까?”
블레어가 카일의 양어깨를 탁 잡았다. 카일은 블레어보가 키가 한 뼘이 더 컸고, 자연히 어깨도 훨씬 높은 곳에 있었지만 카일은 한 번도 자신이 블레어보다 어른이라거나, 크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블레어는 언제나 커다랗게 느껴졌다.
“응.”
“다친 데는요?”
“없어.”
카일이 순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지었다. 카일의 안위를 확인한 블레어가 눈을 뾰족하게 세모꼴로 만들었다.
“제가 여기 들어오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조심하라고.”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라고 했죠? 독단적인 행동하지 말라고 했어요, 안 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자님 본인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라고 말씀드렸죠? 왜 혼자서 위험하게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블레어의 본래 어투는 꽤나 느긋하고 여유롭다. 정확하고 귀족적인 발음은 낭독에도 적합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블레어는 지금 카일에게 화를 다다다 쏟아 내고 있었다.
블레어의 말대로 카일의 행동은 무척 독단적이었다. 블레어가 적당한 타이밍에 도착해서 다행이지, 어쩌면 이 크라시아 제국의 2황자는 이렇게 우중충한 곳에서 절명했을지도 몰랐다. 구구절절 옳은 말만 쏟아 내는 블레어에게 할 말이 없어진 카일이 아까 단상 위에 있을 때처럼 손을 공손하게 앞으로 포개 얌전히 꾸지람을 들었다. 블레어가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을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카일도 알고 있었다.
“후우.”
블레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일 님이 그렇게 독단적으로 움직이시면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방금 전에도 큰일이 날 뻔했고요. 제 생각도 좀 해 주십쇼.”
블레어가 어깨에서 손을 떼고 양손으로 카일의 얼굴을 잡았다. 왼쪽 뺨을 호되게 얻어맞아 뺨이 퉁퉁 부어 있는 것은 아까 확인한 상태였다. 그것 말고는 다른 상처가 없는지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블레어의 눈초리를 받은 카일의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다.
“다친 데는요? 뺨 말고.”
카일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블레어의 손에 잡힌 뺨에 열이 올랐다.
“없어, 없어.”
“그렇군요.”
블레어가 카일의 양 뺨에 손을 댄 채로 빙그레 웃었다.
“뺨을 때린 새끼는 누굽니까? 어딜 귀하신 몸에. 그 쓸모없는 손모가지를 잘라 버려야겠군요.”
블레어가 퉁퉁 부은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목소리에 한기가 돌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돼지가 몸을 움찔거렸다. 카일의 시선과 돼지의 반응을 종합해 금세 범인을 알아챈 블레어가 돼지의 오른쪽 손목을 밟았다.
빠각.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렷다. 블레어가 신고 있는 것은 단단한 군화였다. 게다가 블레어는 잘 훈련된 무인이었다. 살이 워낙 겹겹이 뼈를 둘러싸고 있어 물컹거리긴 했지만, 저 정도의 타격이라면 분명히 손목뼈가 바스러졌을 것이었다. 왼쪽 뼈는 카일의 단검에 찔려 신경이 손상됐을 것이고 오른쪽 손목뼈는 잘게 부서져 다시는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쓸모가 없는 손목이니 더는 달고 있을 필요가 없겠지.”
블레어가 냉랭하게 뇌까렸다.
다시 한번 카일의 코앞에 다가와 얼굴이며 상처를 꼼꼼하게 훑어본 블레어가 손수건으로 카일의 먼지 묻은 얼굴을 닦아 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도, 잘 하셨습니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덕분에 이곳 총관도 잡았고, 순조롭게 안에도 잠입했잖습니까. 다 카일 님 덕입니다. 아드리아나 님도 크게 치하하실 겁니다.”
블레어가 싱긋 웃으며 카일의 손에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하지만 카일에게 블레어가 하는 이야기는 귀에 와 닿지 않았다. 이렇게 근거리에서, 블레어가 싱긋 웃으며 칭찬을 해 주자 이유 모를 충동이 온몸을 내달렸다. 카일이 눈을 질끈 감고 블레어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꾹 내리눌렀다.
카일의 손에 닿지 못한 손수건이 팔락팔락 떨어져 내렸다.
뭐지?
처음에 블레어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입술 위에 뭔가 말캉한 게 와 닿았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카일의 몸에 뿌려 놓은 향수와 입술 위에 발라 놓은 붉은색 연지에서 확 향기가 끼쳐 들었다. 지하 석실의 꿉꿉하고 눅진한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달콤한 향이었다.
블레어의 입술 위에 입술을 눌러 붙인 카일은 눈을 질끈 감고만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블레어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 카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카일이 블레어보다 키가 크기 때문에 블레어는 살짝 고개를 꺾어 카일의 얼굴을 보게 됐다. 눈을 질끈 감은 표정조차도 무척 잘생겼다.
블레어가 속으로 한탄을 했다. 진짜 이쯤 되면 중증이었다. 물론 카일이 엄청난 미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석실에 들어와서 총관을 때려눕히고 졸지에 뽀뽀를 당했는데도 머릿속에서는 카일의 얼굴이 예쁘다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블레어의 미의식이 문제였다. 예쁜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예쁜 얼굴에 홀리는 자신이 문제였다. 과거로 돌아왔을 적, 절대로 마음 주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은 모두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다 보니 십 분이 지난 것 같기도 했고, 고작 십 초가 지난 것 같기도 했다. 와아아, 시끄러운 소란이 어느새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때까지도 입술을 붙이고 서 있던 블레어와 카일이 화들짝 멀어졌다.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카일의 귀가 빨개졌다. 그다지 선명하지 않은 불빛 아래에서도 카일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자 전하!”
먼저 제정신을 차린 블레어가 병사들을 맞아들였다.
“이곳의 총관이니 목숨만 붙여 놓고 엄중히 감시하도록 하라.”
블레어가 아직도 땅에 널브러져 있는 하얀 돼지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예, 알겠습니다.”
고작 열일곱 살인 블레어였지만, 사람들이 그의 지시를 자연스럽게 따랐다. 병사들이 흩어지며 할 일을 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카일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카일이 문 밖으로 쌩하니 도망쳤다.
“……?”
덩그러니 뒤에 남겨진 블레어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뒷수습을 하는 것을 모두 확인한 블레어가 넓은 지하의 공동(空洞)을 훑었다. 가면을 쓰고 있던 손님들도 모두 줄줄이 굴비처럼 엮여 끌려가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가면만은 붙들고 있었다. 뭐 뻔하지, 변태 귀족이거나 변태 부자이거나 그냥 변태이거나. 변태, 변태, 변태. 변태들.
장부며 기록은 모두 따로 챙겨 두었고, 재물을 쌓아 놓은 금고도 찾아낸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휙 이곳저곳으로 뚫린 개미굴 같은 통로들을 점검했다. 혹시라도 놓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철저하게 점검해야 했다. 물론 블레어가 나오더라도 병사들이 다시 한번 확인하겠지만, 블레어는 기왕이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무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병사들이 일 처리들을 깔끔하게 한 모양인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남아 있는 흔적들만이 끔찍했던 환경을 증명했다. 블레어가 혀를 쯧 찼다. 꼼꼼하게 훑어보아도 남아 있는 사람이 없어 블레어가 안심하고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안에 남아 있던 피해자들은 모두 한데 모여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오늘 예쁘게 꾸며져 경매에 올랐던 피해자들도 모두 확보한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드리아나와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블레어가 한걸음 다가갈 때마다 옆에 서 있던 카일이 한 걸음씩 멀어졌다.
“수고했다.”
아드리아나가 블레어의 공을 치하했다.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한 블레어가 고개를 들었다. 카일이 화들짝 놀라 화다닥 멀어졌다. 아니 입술을 찍은 것은 자기면서, 정작 저쪽이 추행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적반하장인 상황이란 말인가. 블레어가 눈썹을 꿈틀거렸지만 지금은 우선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장부는 모두 확보하셨습니까?”
“물론이지.”
“기왕이면 거래된 사람들 중 추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끝까지 찾아내서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아마 고위 귀족들도 여러 명 섞여 있을 겁니다.”
블레어가 가면을 쓴 채로 둘둘 포박되어 있는 인간 망종들을 손짓했다.
“엄히 처벌하고 재산도 뜯어내십시오. 기왕이면 황녀님 쪽을 지지할 수 있도록 포섭하셔도 괜찮을 거고요. 하여튼 인간이 돼 가지고 돼먹지 않은 짓만 고루고루 골라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요. 지지가 필요 없으시면 시간이 남아돌아 그런 모양이니 노역을 시켜도 좋겠죠.”
블레어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쪽은 내가 알아서 하마.”
테오도르가 블레어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저 아기같이 보이던 막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대견하구나.”
“물론이죠.”
블레어가 씩 웃었다.
“어쨌든, 고생하셨습니다. 황녀님. 이 기회를 놓치지 마셔야 하는 건 잘 아시겠죠. 더는 말을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모로 바쁘시겠네요. 후계자로 책봉이 되실 적에 다시 뵙고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어가 살짝 과장된 몸짓으로 꾸벅 인사를 했다. 아드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분명히 좋은 후계자가,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이다.
“그때 보도록 하지. 건강 챙기도록. 들어가서 쉬게.”
“알겠습니다.”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어깨에 걸쳐 주는 케이프를 받아 들었다.
참 긴 하루였다.
주변을 훑어보자 카일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 자신의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황궁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블레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괜히 어림짐작으로 그의 마음을 가늠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보름 후면 다시 아카데미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었다. 블레어가 준비된 마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