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63)화 (63/84)

63화.

[그럼, 이제 …… 시작합니다.]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충분히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오늘이 매매 시장이 열리는 당일인 모양이었다. 운이 좋았다. 경매에 부치려고 둔 피해자들을 모두 데려간 모양이었다. 물론 대어 중의 대어일 카일까지도.

“거기 뭐냐?”

복도에 쩌렁쩌렁 소리가 울렸다. 남자의 품 안에 뛰어 들어간 블레어가 순식간에 가슴팍을 단도로 찔러 쓰러트렸다. 그에게 인간 망종들을 봐줄 자비심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크…… 크윽.”

남자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쓰러진 남자의 품을 뒤적이니 열쇠 꾸러미가 튀어나왔다. 남자가 차고 있던 칼과 열쇠를 챙긴 블레어가 더욱 깊은 곳을 들어갔다. 소음이 일어나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사람들이 안에 들어 있는 철창들이 보였다. 블레어도 전신을 검정 옷으로 감싸고 있으니 이 곳을 관리하는 사람인 줄 안 것인지, 사람들이 최대한 몸을 옹송그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안쪽을 들여다본 블레어가 얼굴을 찌푸렸다.

모네터리가에서 가축을 관리하는 것보다도 더 처참한 모습이었다. 식사조차 제대로 배급되지 않은 것 같았다. 청결하지 못한 환경에서 사람들의 상처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곳곳에 존재했다. 헝클어진 머리, 오물이 잔뜩 묻어 있는 차림새. 끔찍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블레어가 열쇠를 찾아 자물쇠를 모두 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블레어를 쳐다보았다.

“뭐죠?”

“문을 열어 드릴테니 이곳에 납치된 분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기다리도록 하십시오. 이 열쇠로 다른 분들도 풀어 주도록 하시고요. 나중에 군대가 들어오면 바로 몸을 의탁하시고요.”

블레어가 개중 눈빛이 살아 있는 여인에게 열쇠 꾸러미를 넘겼다. 지저분하고 깡말랐지만 얼굴이 퍽 고왔다. 이 여인도 이곳에 팔려 왔거나, 납치되어 왔겠지. 얼마나 이곳에 갇혀 있었는지, 여인이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구명줄이라도 된 것처럼 메마른 손으로 열쇠 꾸러미를 꽉 쥐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교환한 블레어가 여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하나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무…… 무엇을?”

“지금 밑에서 경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게 맞나요?”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오늘이에요.”

여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일반 노예가 아니라 귀족들의 악취미를 위한 아름다운 노예를 파는 날이에요. 그래서 철창이 많이 비었어요.”

블레어가 그녀에게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동그스름한 폭탄을 내밀었다.

“제가 사라지고 경매장에서 큰 폭발음이 나면, 딱 열까지 세고 이것을 최대한 멀리, 입구에 가깝게 던지십시오. 멀리 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던지기만 하면 되니까. 모네터리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죠. 오늘이 이곳에 갇혀 있는 마지막 날일 겁니다.”

블레어가 여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칼을 빼든 블레어가 순식간에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여인이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잠겨 있는 철창의 자물쇠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복도 끝으로 달려 나가자 육중한 문이 보였다. 순식간에 뛰어든 블레어가 양옆을 지키는 보초를 베어 넘겼다. 소리가 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소란을 일으키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문을 쾅 열어젖힌 블레어가 순식간에 경매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경매장 한복판에 카일의 치마가 흐트러진 채로 서 있었다. 아름답고 처연한 미인의 얼굴 한쪽이 퉁퉁 부어 있었다. 뺨이라도 호되게 맞은 모양이었다. 카일을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침입자에게 꽂혔다. 꼴에 당당하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는지, 사람들은 작은 가면을 쓰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쓸데없을 정도로 체계적이군.”

블레어가 내부의 화려한 모습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만한 공간을 지하에 만들려면 돈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을 텐데, 역시 돈이 썩어 나는 모양이었다.

“잡아라! 웬 놈이냐!”

블레어가 씩 웃으며 챙겨 두었던 품 안에 챙겨 두었던 폭탄을 곧장 터트렸다. 쾅! 경매장이 쿵 울렸다. 사실 폭탄은 살상 효과라곤 조금도 없이 커다란 소리만 나도록 만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흩어지며 우왕좌왕했다. 조금 후에 아까 여인에게 건네준 폭탄이 밖에서 하나 더 터질 거고, 신호를 받은 병사들이 곧 뛰어올 것이다.

블레어가 챙겨 온 검을 꺼내 들었다. 이제 이 거지같은 장소를 정리할 때였다. 쾅! 복도 멀리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아까 만났던 여인이 똑똑하게 일을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블레어와 카일이 끌려간 곳은 건물들이 다 엇비슷하게 생겨서 조금이라도 집중을 푼다면 어느 건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일부러 그렇게 지었을 테지. 물론 이 비슷비슷한 건물들이 모두 인신매매 시장의 소유일 것이며, 지하가 모두 합쳐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한정적일 게 뻔했다. 클라라가 빌려준 잘 훈련된 까만 개 두 마리가 위풍당당하게 삼각형 모양 가슴을 펴고 카일에게 묻혀 놓은 추적향을 쫓았다. 블레어와 카일이 끌려가고 난 후, 정확하게 삼십 분 후에 모든 병력들이 건물들을 에워쌌다.

개들이 정확하게 통로가 연결된 건물을 골라내자 잘 훈련된 정예병들 삼백이 그 앞을 지키고 섰다. 사천이 조금 안 되는 병력이 준비되어 있었다. 통로가 좁아 한꺼번에 안으로 쏟아질 수 없는 것이 흠이었다. 안을 청소하는 데 천이 들어가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쥐새끼들을 잡는 데 나머지 인력이 배치될 것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단 한 번도 입어 보질 못했던 편한 활동복을 입은 아드리아나가 어두움에 잠긴 건물을 노려보았다. 긴장이 되긴 하는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테오도르가 아드리아나의 떨리는 어깨를 두드리며 안정을 시켜 주었다.

“다 잘될 겁니다.”

“그래. 크게 걱정되는 것은 아닌데 떨리네.”

“잘될 겁니다, 황녀님.”

군부에 계시는 시이첸 공작가의 인척이 아드리아나를 달랬다. 아드리아나가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때였다.

“쾅!”

건물 내부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었다. 장군이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신호였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이 크게 소리 높여 외치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게 준비가 돼 있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 수천이 감당하지 못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큰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양손을 곱게 앞으로 모아 포개고 있던 카일이 몸을 홱 돌려 사회자의 턱주가리를 걷어찼다. 사회자의 키는 카일보다 한참 작았다. 덕분에 다리를 길게 뻗지 않아도 충분히 턱을 걷어찰 수 있었다.

뻐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사회자가 나가떨어졌다.

다른 여인들을 팔아 치우던 성희롱과 음담패설을 듣고 있기 얼마나 짜증났던가. 비록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더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턱을 움켜쥐고 쓰러진 사회자를 버러지 바라보듯 쳐다본 카일이 훌쩍 단상을 뛰어내려 우왕좌왕한 군중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목표는 이곳의 총관이었다. 과연 카일은 상등품 중의 상등품으로 분류됐는지, 끌고 오자마자 관리인에게 그 모습을 보였다. 비대하고 뚱뚱한 몸을 가진 남자였다. 제 스스로가 신발이라도 고쳐 신을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꼭 뱀의 혀가 몸을 핥고 지나가는 것처럼 기분 나쁜 눈동자가 순식간에 전신을 샅샅이 핥았다.

‘키가 너무 큰 게 흠이지만, 그런 취향도 있으니까. 확실히 대단한 미녀군. 심지어 금발 벽안으로 클래식하네. 팔아넘기기엔 아까울 정도인데. 당장 오늘 경매에 올려.’

‘예, 알겠습니다.’

‘판매액의 삼 할을 특전으로 주지.’

‘감, 감사합니다. 대장님.’

뚱뚱한 남자의 눈에서는 정염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돈에 대한 욕망만큼은 무척 선명하게 느껴졌다.

분명히 이런 소란을 느끼고 다른 루트로 달아날 게 뻔했다. 이렇게 수상한 지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데 탈출로 한둘을 따로 구비해 두었을 게 뻔했다. 어쭙잖은 따까리들을 잡을 게 아니라 머리를 잡아야 했다. 블레어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총관의 집무실의 위치를 아는 것은 카일뿐이었다. 가녀린 여인이라고만 생각해 눈을 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카일이 총관의 집무실 문을 걷어차며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총관이 앉아 있던 책상 뒤의 벽이 뚫려 있었다. 워낙 몸이 비대한 데다 커다래서 어지간한 통로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딜 가시려고?”

카일이 허벅지에 블레어가 꽂아 준 단검을 꺼냈다. 그중 가장 긴 것을 드니 검날의 길이가 카일의 큰 손으로 딱 한 뼘이었다. 블레어는 자신을 엄청 여리고 지켜 줘야 할 가녀린 무언가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카일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다.

피지컬적인 이점을 십분 활용해 무술 수업에서도 언제나 나쁘지 않은 성취를 얻고 있었다. 경력이 짧은 기사와는 맞붙어도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도 있었다.

단검을 뽑아 든 카일이 순식간에 도주하려는 총관의 뒤를 노리고 뛰어들었다. 거의 둥근 공이 굴러가는 모양새였다. 카일이 일으킨 소란 덕에 도망을 가지 못한 총관이 벽에 걸려 있던 보검을 빼 들었다.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어 살 상무기로서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보검의 날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보검의 길이는 총관의 굵고 짧은 팔보다 훨씬 길었다. 단검과 장검은 리치 차이가 지나치게 많이 난다. 총관의 몸은 굼떴지만, 그만큼 엄청난 체중이 실려 파괴력이 있었다. 지구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으니 속전속결로 이 상황을 해결 보아야 했다. 단검을 든 카일이 몸을 숙여 휘둘러지는 칼을 피한 후 남자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카일의 단검을 막았다. 단검은 손을 어렵지 않게 뚫었지만 워낙 살찐 손이라 두껍다 보니 몸까지 닿지는 못했다. 왼손 하나를 내준 총관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오른손에 든 검을 휘둘렀다. 카일이 서둘러 단검을 버리고 두 번째 것을 뽑아 들었다.

챙!

금속음이 좁은 석실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카일이 든 단검이 뒤로 밀리며 총관이 든 긴 보검이 천천히 카일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긴 검은 체중 전체를 실을 수 있었지만 단검은 아니었다. 카일의 다섯 배쯤 될 것 같은 체중을 단검 따위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카일이 벽으로 밀려났다. 카일을 몰아붙인 총관이 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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