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62)화 (62/84)

62화.

“휴, 알겠습니다. 대신 황자님은 제가 호위합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어요.”

블레어의 으름장에 다들 동의를 표했다. 어지간한 호위 기사들 수십 명보다는 블레어 한 명이 더 믿을 만했다. 게다가 블레어는 눈에 띄는 미남이었다. 남자도 작은 규모로나마 거래된다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잘 훈련된 미남 기사라는 존재는 변태들의 구미를 당기게 할 것이다. 아마 블레어까지 같이 끌려갈 확률이 높았다. 카일 혼자 보내는 것보다는 블레어가 위험을 분산시키는 게 여러모로 낫다.

미끼가 정해지자 일은 순조롭게 진행이 됐다. 정확한 날짜를 잡고 모두들 흩어졌다. 저택에 도착한 블레어가 카일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방으로 훌쩍 올라갔다. 단단히 화가 난 듯한 그 표정에 카일의 그의 눈치를 살피며 블레어를 쫓아 들어갔다.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며 돌아서 있던 블레어가 카일을 쳐다보며 속사포같이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아니,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야밤에 황자님께서 뒤에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밖으로 나가시면 돼요? 안 돼요? 그래요, 제가 어딜 가는지 궁금하셨다고 쳐요. 그 판에 끼어들길 또 왜 끼어듭니까? 이게 어린애 소꿉장난 같아 보여요? 당신이 어디 보통 사람인 줄 알아요?”

“블레어. 나도 알아.”

잔뜩 혼이 난 카일이 찔끔 풀이 죽었다. 블레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냅다 나섰는데, 그에게 꾸중을 들으니 속이 상했다.

“아는 사람이 그랬다는 게 더 이해가 안 되네요.”

블레어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화를 가라앉히려고 해 봤자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카일이 이렇게 천방지축인 타입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나도 네게 좀 도움이 되고 싶어서.”

“도움은 무슨……!”

늘 블레어에게는 도움만 받아 왔다. 이쪽이 두 살이나 위인데도 블레어는 카일을 꼭 어린 동생처럼 챙겼다. 카일도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자신은 블레어가 보호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었고, 그보다 연장자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계속 카일을 혼내려던 블레어의 눈에 카일의 표정이 들어왔다. 어머니에게 잔뜩 혼난 아이처럼 눈가가 붉었고, 블레어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우물쭈물했다. 도움은커녕 방해만 될 거라고 잔뜩 혼을 내려던 블레어의 입이 딱 다물렸다.

“하아…….”

블레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이미 결정된 일이니 더는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대신 하나만 약속하시죠. 모든 상황에서 황자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겠다고요.”

“그건 당연하지.”

카일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무슨 생각으로 끼어들었는지 이해가 돼서 문제였다. 안 됐더라면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냈을 텐데. 역시 자신은 카일에게 지나치게 물렀다.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안전이 제일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응. 물론이지.”

카일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뒤에서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것 같았다. 블레어가 이마를 짚었다. 저렇게까지 좋아하는데 더는 뭐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이제 블레어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 * *

모네터리가로 봉제사를 따로 불러 카일의 몸에 맞는 드레스를 맞췄다. 화사한 하늘빛 드레스는 금세 완성이 되어 저택으로 전달되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편인 카일이라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화려한 미모는 모든 걸 덮어 버렸다. 금색 가발을 씌워 화려하게 손질한 후 화장을 더하자 어디에 내놔도 아름답다는 찬사를 들을 여인이 완성되었다.

인형같이 하얗고 투명한 피부, 푸르고 또렷한 눈동자가 담긴 아몬드형 눈, 쭉 뻗은 콧날과 화사한 입술색. 풍성하게 떨어져 내리는 금발 머리카락.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인형 같았다. 어린 귀족 아가씨들의 침대 머리맡에 놓일 자기 인형 같았다.

카일의 변신을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블레어가 치장이 끝난 후 가까이 다가왔다. 블레어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은 다음 풍성한 스커트를 걷어 올린 후 카일의 하얀 다리를 쓸어 올렸다.

“블레어?!”

맨다리를 잡힌 카일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블레어는 카일의 하얗고 긴 허벅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에 손길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가죽띠를 두른 다음 단검을 세 개 꽂아 주었다. 카일의 얼굴이 복숭아색으로 곱게 물들었다.

“물론 제가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거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황자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십시오.”

“응, 알겠어.”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준비가 되었다. 클라라가 구해다 준 추적향이 담긴 주머니를 드레스 안쪽에 매달았다. 잘 훈련된 개라면 말이 하룻밤 동안 달리는 거리도 쫓아갈 수 있다는 추적향이었다.

“그럼, 이제 가실까요?”

블레어가 자리에 앉아 있는 카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일이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화려한 금발 머리 아가씨가 투명한 레이스로 짜인 장갑을 낀 손으로 하얀 레이스 양산을 들었다. 귀한 비단으로 만들었다는 티가 나는, 하늘하늘한 하늘빛 드레스가 멋을 더했다. 위에 걸쳐 입은 흰색 담비 코트가 아주 멋스럽게 어울렸다.

여인치고는 키가 지나치게 큰 것이 아주 작은 흠이었지만, 워낙 얼굴이 예뻐 모든 게 상쇄될 정도였다. 모든 사람이 카일을 지나치지 못하고 한 번씩 홀린 듯 그 아름다운 얼굴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유레호 근처의 도시의 번화가를 골라 알짱거렸다. 물론 주변에 충분히 많은 사병들이 숨어 있었다. 까만색 정복을 입고 눈에 검을 패용하고 있는 블레어가 카일의 옆을 지켰다. 카일도, 블레어도 눈에 띄는 용모였다.

귀한 집 아가씨가 호위 기사 하나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온 모습이라고 생각될 것이었다. 물론 잘 벼려져 있는 블레어의 기세나 옷차림이 평범한 집안의 아가씨는 아니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게 만들었지만, 손가락만 빨기에는 카일의 미모가 너무나 눈부셨다.

일부러 주변에 포진시켜 놓은 병사들조차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알맹이가 이 나라의 셋째 황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조차 그랬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감쪽같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겉모습에 홀딱 속아 넘어갔다.

“블레어, 블레어. 이것 좀 먹어 봐.”

카일은 뭐가 그렇게 들뜨고 즐거운지 잔뜩 먹거리를 사다 블레어에게 물려 주었다. 카일은 진짜 블레어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 잔뜩 신이 나 있는 상태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잔뜩 긴장하며 주의하고 있는 블레어가 인상을 팍 썼다. 곧 납치당할 사람이 지나치게 천하태평이었다.

물론 블레어도 자신 혼자만 미끼가 될 예정이었다면 이렇게 긴장하지 않을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경우, 걱정해야 하는 쪽은 납치범들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얘기가 달랐다. 카일은 일국의 황자였으며 블레어만큼 무술 실력이 출중하지도 못했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배운 가락이 있으니 그의 말대로 본인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만, 험한 꼴이라곤 전혀 보지 못하고 자랐을 게 뻔한 카일은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번화가에서 모두의 눈에 띌 정도로 행동하다 보니 천천히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겨울이라 일몰의 속도가 빨랐다. 카일과 블레어가 눈빛을 교환했다. 주변이 어둑어둑해지자 카일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팔락팔락하고 풍성한 치맛자락에 수백 개의 시선이 닿았다.

블레어와 카일이 천천히 미리 봐 둔 골목으로 진입했다. 상점들도 줄어들었고 오가는 사람들도 훨씬 적었다.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카일을 미끼로 삼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골목은 좁아졌고 행인들은 사라져 갔다.

카일이 휙 돌아 입을 열었다.

“우리 잘못 들어왔나 봐. 여긴 아무것도 없네.”

“그러게요. 다시 나가시겠습니까?”

“응, 그러……읍!”

정말 짜고 친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뒤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손수건으로 카일과 블레어의 코를 틀어막았다. 이미 몇 가지 수면향에 대비해 해독제를 먹어 둔 블레어나 카일은 잠에 빠져들지 않았지만 순순히 몸에 힘을 빼고 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쓰러진 척을 했다.

남자들은 블레어의 칼을 빼앗고 팔을 뒤로 돌려 밧줄로 옭아맸다. 두 사람의 몸수색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블레어는 떼놓고 카일만 데려가면 어떡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블레어도 상품성이 있다고 견적을 낸 모양이었다. 만약 카일만 데려갔으면 두 번째로 준비해 둔 계획을 실행해야 했을 것이다.

몸이 들려 옮겨지는 느낌이 났다. 자신을 들쳐 멘 채로 한참 이리저리 골목골목을 이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곳 앞에 멈춰 선 남자들이 대화를 나눴다.

“이번 상품인가?”

“상등품 중에 상등품이야.”

“그럼 바로 대장님께 가.”

신원을 확인받은 남자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기가 유달리 습하고 차가운 것이, 분명 지하가 맞았다. 클라라의 예측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격자 철문이 달린 방 안에 블레어가 혼자 남겨졌다. 한참 동안 쓰러진 체를 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떠 확인하니 좁은 방에는 오직 블레어뿐이었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자마자 블레어가 눈을 뜨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벽에 다가가서 팔뚝에 얇게 묶어 둔 끈을 문지르자 끈이 툭 끊어지며 옷 속에 숨겨 두었던 단도가 손아귀로 떨어졌다. 단도로 순식간에 손목에 묶인 밧줄을 긁어 끊어 낸 블레어가 유유히 격자무늬 창살에 묶인 자물쇠를 확인했다.

잔뜩 녹이 슬이 이도 잘 맞지 않을 것 같은 자물쇠였다. 이 정도까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블레어가 주머니에서 열쇠공들이 사용하는 쇠붙이를 몇 개 꺼냈다. 자물쇠에 쇠붙이를 꽂아 놓고 이리저리 걸리는 곳을 확인하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자물쇠가 풀렸다.

입구만 감시가 삼엄한지, 생각보다 돌아다니는 인력이며 경비가 얼마 없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블레어는 어둠에 숨어들기 용이했다. 입구로 내려오는 경로를 확인한 블레어가 길을 살폈다. 이 정도라면 나중에 폭탄을 던져 신호를 끌기에 적당했다. 이미 카일에게 묻혀 놓은 추적향을 일행들이 따라왔을 것이다. 지금은 이 건물 전체를 병사들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었다. 정확하게 모든 규모가 파악된 후 신호를 터트리기로 약속해 둔 상태였다.

블레어가 발소리를 낮춰 지하 감옥을 훑어보았다. 생각보다 지하 규모의 안은 커다랬다. 입구 쪽에는 납치 피해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꽤나 걸어 들어가도 창살 안에 납치 피해자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다 팔려 나갔나? 블레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겨울의 냉기가 벽을 타고 올랐다. 납치된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곳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맞았을 확률도 높았다. 단순 노동을 하는 노예로 팔려 가는 쪽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카일같이 빼어난 미인을 노린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장의 주력은 아름답고 특이한 용모를 가진 사람들을 변태에게 파는 것일 테다. 카일은 당연히 어마어마한 상등품이니 아마 고위 관리자에게 바로 보내졌을 것이다.

블레어가 꽤 긴 복도를 걸어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최근에 시장이 열려서 전부 다 팔아 치운 건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물론 휘말릴 피해자들이 없으니 마음껏 폭탄을 던져도 된다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때였다.

블레어의 귀에 소란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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