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무서우십니까? 다치지 않게 잘라 드릴게요. 오히려 자꾸 움직이시면 베일 수 있어요. 가만히 계세요.”
손이 머리에 닿을 때마다 카일이 움찔거리자 블레어가 물어 왔다.
“아니야,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고.”
카일이 우물쭈물 말을 줄였다.
앞머리까지 단정하게 잘라 잘생긴 안와를 드러내자 인물이 더욱 훤칠해졌다.
“와, 정말 잘 자른다. 신기하다. 머리를 잘라 본 적이 있는 거야?”
머리카락을 다 자른 블레어가 목덜미에 둘러놓았던 천을 걷어 주었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던 카일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블레어를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예. 제가 머리 잘라 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왠지 꿈꾸는 것처럼 아련한 블레어의 표정에 카일은 그게 누구냐고 묻는 것을 멈췄다. 묻지 않는 것이 좋겠다. 카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자, 머리도 잘랐으니 이제 돌아가서 주무시죠. 시간이 늦었네요.”
“응, 머리카락 잘라 줘서 고마워. 내가 나중에 꼭 보답할게. 블레어도 잘 자.”
“보답은요. 별것도 아닌걸요. 안녕히 주무세요.”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자신의 방을 떠나는 카일을 배웅했다.
손님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운 카일이 생각에 잠겼다. 목을 만지작거리던 블레어의 손길이 떠올랐다. 카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무도 볼 수 없어서 다행스러울 정도로. 블레어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꿈속의 자신의 감정이 옮지 않았대도 자신은 당연히, 언젠가는 블레어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블레어 모네터리가 좋은 사람이기만 하면 괜찮은데 무척 잘난 사람이기까지 한 게 문제였다. 그는 똑똑한 데다 무예에도 재능이 있고, 좋은 집안의 아들인 데다 용모도 출중했다. 아카데미에서도 귀족 영애들이 줄줄이 따랐다. 재미도 없는데다 권력이라곤 전혀 없는, 봐줄 만한 것은 얼굴밖에 없는 황자 따위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었다.
카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을 뒤척거리던 카일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걸터앉았다. 그믐달이 뜬 밤하늘은 유달리 어두웠다. 불이 모두 거두어진 정원도 어두워서 잡념에 빠져들기 딱 좋았다. 어두운 창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카일이 어두운 창밖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블레어는 언제나 자신에게 친절했다.
솔직해지자. 자신은 블레어에게 적잖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블레어의 마음이 궁금했다. 대체 그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한참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카일의 시야에 까만 로브를 쓰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인영이 들어왔다.
뭐지?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까만 로브를 쓴 사람은 무엇을 살피려는지, 고개를 돌려 저택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 사람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 사람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카일을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카일은 밝은 달빛 덕에 그가 누군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블레어였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
잡히는 대로 옷을 집어 든 카일이 서둘러 방을 뛰쳐나와 블레어의 뒤를 밟았다. 블레어가 저 멀리 저택을 벗어나고 있었다. 블레어가 저택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카일도 곧장 뒤에서 오는 마차를 잡아타고 부지런히 그를 쫓았다.
블레어가 탄 마차는 부드럽게 달려 목적지에 그를 데려다 주었다. 저택을 벗어나기 전, 카일의 방에 불이 꺼진 걸 확인하고 나왔으니 아마 그는 자고 있을 것이었다. 블레어가 천천히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쪽지에 전달받은 대로, 식당에는 테오도르와 아드리아나가 먼저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블레어가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가자 아드리아나가 손을 들어 그를 맞아 주었다. 블레어가 로브를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실 텐데, 내일 아예 저를 황궁으로 부르시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니야. 괜찮아. 내가 나와야지.”
블레어의 뒤를 따라온 카일이 벽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여자와 밀회를 갖는 건가? 카일은 괜히 서운하고 속상해졌다. 마음을 전해 보지도 못했는데 실연을 당한 기분이었다. 괜히 코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홧홧해졌다.
블레어가 여러모로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있는 편이라는 것은 자신도 잘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 사살을 당하는 건 다른 이야기다. 이렇게 몰래 밖으로 나와서 만나야 하는 이유가 뭘까.
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일이 쫑긋 귀를 기울였다.
“관직도, 작위도 마땅히 없는 네가 황궁에 들락거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쉬우니까.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이는 게 좋아. 카일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카일도 모네터리 저택에 가 있으니 불러들일 명분이 없더군.”
“아, 맞습니다.”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일은 뭘 하고 있어? 너희 집으로 갔다던데.”
“주무시는 것을 확인하고 나왔습니다.”
문 밖에 붙어서 내용을 엿듣고 있던 카일이 흠칫 놀랐다. 자신의 이름이 언급됐다. 아무리 보아도 연인 간의 밀회랑은 거리가 있는 것 같은 대화였다. 심지어 여자 쪽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카일이 열린 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카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드리아나 누님이 어째서 이곳에?
“음, 잘됐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본론으로 돌아갈게. 나도 자리를 오래 비워서는 안 되니까. 군부 쪽에 연락을 넣어서 인력을 확보했어. 우리 할아버지께서 젊으실 때부터 키워 주신 분이어서, 믿을 만한 분이야. 유레호 근처에 마침 주둔하고 있는 군부대가 있다고 하네. 그걸 빼 올 수 있을 거야. 인원은 삼천 정도.”
“완벽하네요. 그러면 먼저 이쪽의 사병을 그리로 옮겨야겠습니다. 황도와 제법 거리가 있는 시이첸 영지를 비우기 어렵다면, 그쪽의 인력은 축소시키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알겠어. 그건 외할아버지와 따로 의논해 볼게. 그럼 그건 됐고. 문제는 그거지. 어떻게 인신매매 시장에 접근하느냐. 시간도 규칙적이지 않고, 장소도 찾기 어렵다던데.”
“그렇죠. 일전에 생각해 둔 걸 진행해 보면 어떨까 해요. 잘 훈련된 여기사를 치장해서 그쪽 눈에 띄게 만들어 납치당하게 해, 안으로 자연스럽게 잠입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그 후에 신호를 보내면 이쪽 병사들이 뛰어드는 걸로.”
“여자 기사의 위장 잠입이라. 확실히 나쁘지 않아.”
“물론 남자도 사고파는 것 같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쪽에서 납치를 하면서까지 노리는 건 미형의 여자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수요가 뻔하니까요.”
테오도르가 대답했다.
“확실히 좋은 계획이네. 황궁 수비대에는 여기사도 여럿 있으니까. 능력 있고 괜찮은 인물로 잘 준비해 볼게.”
무슨 대화를 하는 거지? 카일이 문에 더욱 바짝 붙어 섰다. 워낙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니 모든 대화가 또렷하게 들리질 않았다. 그때였다. 문에 붙어 서던 카일의 신발 앞코가 문을 살짝 쳤다.
‘헉!’
카일이 서둘러 몸을 놀렸지만 안쪽에서 알아채는 게 더 빨랐다. 문이 벌컥 열리고 순식간에 목이 잡아 채인 카일이 벽에 쾅 소리가 나도록 밀렸다. 등이 욱신거렸다. 카일의 목덜미에 단도가 닿았다. 카일이 자신의 목을 움켜쥔 손목을 양손으로 잡아떼 냈다.
“블, 블레어. 나야.”
“카일?”
블레어가 어리둥절해하며 손을 풀어 주었다. 소란을 감지하고 밖으로 나온 아드리아나와 테오도르의 눈도 동그랗게 떠졌다. 어쨌든 신원을 확인받은 카일은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 여기에 어떻게 오신 겁니까? 주무시는 걸 보고 나왔는데. 게다가 혼자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일국의 황자라는 분이 위험하게.”
블레어가 눈썹을 찌푸리며 엄하게 나무랐다. 카일이 움찔거리며 시무룩하게 풀이 죽어 블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어딜 가나 궁금해서.”
“뭐,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일이라서 다행이네.”
아드리아나가 빙긋 웃으며 카일의 앞으로 차를 밀어 주었다. 카일이 다시 한번 블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아냐, 괜찮아. 너라면 들어도 큰 문제는 아니니까.”
“정확하게 들은 것은 아닌데, 인신매매단을 소탕하신다고요?”
아드리아나가 편을 들어 주자 기운을 차린 카일이 물었다.
“응. 그러려고.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인신매매단이 존재하고 있고, 거기서 사람을 납치해다 사고판다고 해. 변태인 귀족 나리들에게 팔리겠지. 이미 팔려 나간 명단도 입수해서 뒤집어 놓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게 어렵다면 일단 근원지부터 없애 보려고.”
“여기사를 잠입시킨다는 것까지 들었는데, 아무래도 여러모로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사가 납치되지 않는다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는데요.”
“그런가. 그거야 뭐 솜씨 좋은 사람들이 하면 충분히 눈에 띌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일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 미끼, 제가 돼 보면 어떨까요? 여인처럼 꾸며서요. 그쪽이 더 괜찮지 않을까요?”
“뭐?”
“뭐라고요?”
아드리아나와 블레어의 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격한 반응을 본 테오도르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네요. 위험합니다.”
블레어가 카일의 만용을 자르고 나섰다. 용기는 좋지만 일국의 황자를 그렇게 위험천만한 자리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말이 새나 가지 않아야 한다면서요? 일전에도 그런 위협에 노출됐던 적이 있습니다. 제대로 치장하면 눈에 확실히 띄겠죠. 여기사보다는 여러모로 제가 나을 것 같은데요. 저도 제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안. 됩. 니. 다.”
블레어가 이를 악물고 스타카토로 끊어서 이야기했다.
“혹여나 남자인 것이 발각되면요? 더 큰 변태에게 팔리거나, 그렇지 않다면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을 텐데 카일 님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생각해 봐. 나 그렇게 약하진 않다고, 블레어. 여기사보다는 남자 쪽이 훨씬 낫지. 험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쪽이 나을 거고. 수면독이나 마비독을 푼다고 해도 난 어느 정도 내성이 있으니 들지 않을 거야. 바깥으로 신호하기에도 내 쪽이 훨씬 나아.”
카일의 말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어차피 위험한 일도 아니고, 군대도 작지 않은 규모를 따로 배치할 거라면서.”
테오와 아드리아나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확실히 저 미모라면 여자처럼 치장시켜 놓자마자 단박에 끌려갈 것이었다. 누구보다 믿을 만한 아군이기도 했다. 어설프게 치장한 여기사를 잠입시키는 것보다는,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는 카일 쪽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카일을 지켰던 블레어가 안절부절못했지만, 카일이 여장을 하고 잠입하러 들어간다는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블레어가 몇 번 제동을 걸었지만, 본인의 의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그조차 카일을 말릴 수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