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60)화 (60/84)

60화.

선물을 바리바리 실은 마차가 모네터리 영지로 향했다. 모네터리 저택에 도착한 카일이 짐을 풀고 블레어를 찾았다.

“저희 도련님은 지금 연무장에 나가 계세요.”

시녀가 연무장으로 가는 길을 일러주었다. 저택을 빙 돌아 나가면 말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연무장이 존재한다고 했다. 백작 부부에게 인사를 한 카일이 블레어를 찾으러 저택을 나왔다.

연무장에 들어가자 블레어가 존재했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묶고 진중한 표정으로 활을 들고 있는 과녁 앞에 서 있는 그를 보자니 왠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카일이 얼굴을 찌푸렸다. 블레어가 활을 쏘는 모습을 분명히 처음 보는데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시감이 들었다.

블레어의 집중력은 놀라웠다. 카일이 들어온 것을 깨닫지 못한 블레어가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순식간에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 이미 꽂혀 있는 화살대를 절반으로 갈랐다. 옆에 놓아두었던 화살 열 순이 금세 바닥났다. 카일이 멍하게 서서 블레어가 활을 다루는 모습을 지켜봤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활쏘기는 블레어의 장기였다. 전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살상 무기인 검을 사용하곤 했었지만, 블레어에게 가장 익숙한 무구는 활이었다. 말을 타면서도 과녁을 꿰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확실히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보다 체력이 많이 붙었다. 화살 오십 대를 쏴도 왼팔이 떨리지 않았다. 활을 내려놓은 블레어가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손끝에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연무장은 실내여서 바깥의 한기가 조금 차단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주 따뜻하지는 않았다. 손끝이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흩어진 화살은 다른 사람들이 정리해 줄 것이었다. 블레어가 활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카일 님?”

연무장에 들어와 있던 사람을 확인한 블레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표정을 풀었다.

“오셨으면 인기척을 내시지 그러셨습니까. 구경하시느라 지루하셨겠네요.”

블레어가 픽 웃으며 카일에게 다가섰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카일이 화들짝 놀라며 박수를 쳤다. 카일의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넓은 연무장에 카일의 박수 소리가 울렸다.

“아냐, 솜씨가 워낙 훌륭해서 그저 바라보고 있었어. 대단한데.”

“별것 아닌 장기입니다.”

블레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연무장을 벗어났다.

“검술 수업만 같이 듣다 보니까 활 다루는 건 처음 보네. 그것도 아카데미에서 배운 거야?”

“음,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아니었지만, 블레어는 대충 말을 돌렸다. 자초지종을 말해 봤자 어차피 카일은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었다.

“블레어는 재능이 많구나.”

“하하, 아닙니다. 그저 좋아하는 것뿐입니다. 추우실 텐데, 어서 따뜻한 실내로 들어가시죠.”

블레어가 먼저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블레어의 팔다리에는 조금씩 근육이 붙어 선이 굵어지고 있었다. 가죽으로 제작된 방한 연습복이 블레어의 균형 잡힌 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걸어가는 블레어의 뒤로 둔근과 배근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별것도 아닌데 괜히 부끄러워져 카일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블레어가 안으로 들어오자 하녀들이 순식간에 들어와 벽난로의 불을 올리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 주었다. 가볍지만 따뜻한 옷감으로 만든 옷으로 갈아입은 블레어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묶었다.

하녀가 서둘러 다가와 식어 버린 찻물을 버려 버리고 따뜻한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도련님, 출출하실 텐데 간단하게 드실 만한 걸 준비해 오라고 이를까요?”

“음, 나쁘지 않지. 손님 드실 것도 같이 내오고.”

블레어가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종종걸음으로 시녀가 물러서자,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실 거라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당장 오늘 오실 줄은 몰랐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응, 잘 지냈지. 블레어는?”

“저 역시 잘 지냈습니다. 어째, 살이 조금 오르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보다는 황궁에서 쉬시는 게 더 편하신 걸까요?”

“그런가?”

카일이 허둥지둥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살이 쪘으면 안 되는데. 카일도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얼굴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리고 블레어가 자신의 얼굴을 꽤 좋아한다는 것도 알았다.

“보기 좋다는 의미입니다.”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었다. 하녀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올리고 블레어에게는 작은 편지를 건네주었다. 카일이 티타임 트레이를 열고 있을 때, 블레어가 살짝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봉투를 다시 접어 갈무리한 블레어가 트레이의 내용물을 카일 앞에 덜어 주었다.

“드십시오.”

블레어가 카일에게 갓 구워진 따끈따끈한 스콘을 권했다. 포슬포슬 부서지지 않고 부드러웠다. 모네터리가의 주방장은 솜씨가 상당히 좋았다. 당연히 황궁의 주방장의 솜씨가 모네터리가의 주방장보다 나쁠 리는 없겠지만, 왠지 카일은 이곳에 올 때마다 모네터리가에서 대접받는 음식이 더 맛있다고 느꼈다.

블레어와 잡담을 나누며 시시덕거리자 순식간에 해가 저물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오자 블레어가 지난번과 같이 카일에게 손님방을 내주었다. 여름에는 이래저래 핑계를 대고 같이 붙어 잘 수 있었지만, 거의 성년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이 같이 침대를 공유하는 것은 역시 그림이 이상했다.

푸른색 비단 잠옷으로 갈아입은 카일이 똑똑 블레어의 방문을 두드렸다. 답을 기다리는 이 순간조차 설렜다.

“들어오세요.”

노크할 만한 사람을 짐작한 블레어가 읽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고 대답했다. 방문이 끼익 열렸다.

“주무시지 않으시고요. 피곤하실 텐데.”

“으응, 괜찮아.”

카일이 블레어의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블레어가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었다.

“무슨 책이야?”

“아, 아론의 말대로 월반을 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러려면 시험을 따로 봐야 하니까요. 이번 방학 때 좀 준비를 해 두려고요.”

“월반을?”

“예. 확실히 나쁠 것 같지는 않아서요. 월반이 드문 일도 아니니까요.”

“그렇지.”

카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블레어는 지금도 모든 수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그가 생각해도 블레어에게 수업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모르는 것을 배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블레어는 월반을 해도 무리 없이 적응할 것 같았다. 같은 학년이 돼서 지금보다 더 가까이 지낼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블레어는 늘 부지런하네.”

그냥 마음대로 하고 살아도 모네터리가의 아들인 그에게는 안정적인 삶이 약속되어 있을 텐데, 블레어는 매사에 열심이었다. 카일은 그런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좋아하는 일에만 부지런하죠. 사실 저는 꽤 게으른 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것, 이라는 말을 들은 카일의 심장이 거세게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물어보고 싶었다. 왜 누님에게 그런 말을 했어, 블레어? 내가 죽어 버리면 싫을 것 같아?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블레어가 카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블레어의 차분한 자색 눈동자를 바라보자 목 끝까지 올라왔던 말이 덥석 안으로 삼켜졌다.

“왜 그러세요?”

“아니, 아니야.”

입을 꾹 다문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셨네요. 불편하실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블레어가 책을 탁 덮으며 눈짓했다.

“그런가?”

블레어의 말을 들은 카일이 눈썹을 가리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카일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눈을 찌를 정도로 자라 있었다.

“잘라 드릴까요?”

“자를 수 있어?”

카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카일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유독 싫어했다. 뒷머리야 혼자 자를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지만, 앞머리는 되도록이면 스스로 자르곤 했다. 물론 블레어도 타인이라면 타인이었지만, 그라면 괜찮았다.

“제가 또 잡기에 능한 편이죠. 못하는 게 없답니다.”

그렇게 웃은 블레어가 카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들었다. 확실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었다. 머리를 손질한 지 오래됐는지, 머리카락이 뒷덜미를 거의 다 덮고 있었다. 자르긴 해야 할 것 같았다. 워낙 머릿결이 부드럽고 고와 길러서 묶어도 잘 어울리겠지만, 카일은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어서 이마를 어느 정도 드러내는 쪽이 더 어울렸다.

카일을 의자에 앉힌 블레어가 옷 위로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큰 천을 목덜미에 묶어 주었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블레어의 차가운 손이 카일의 목덜미를 살짝살짝 스쳤다. 가위를 가져온 블레어가 익숙한 태도로 머리카락의 한 부분을 집어 들었다.

가위를 잡자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다듬지 않아 지저분해진 머리를 가지고 있는 카일을 앞에 앉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머리를 잘라 주곤 했다. 처음에는 꽤나 엉망으로 머리를 잘라 줬었는데, 반복될수록 솜씨가 늘어 갔다.

블레어가 카일의 머리카락 안에 손을 넣고 살살 쓸었다. 손에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면서 빠져나갔다.

블레어의 손길은 거북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척 익숙했다. 분명히 처음 겪는 일인데도 언젠가 이런 식으로 그가 머리를 잘라 준 적이 있는 것 같다는 데자뷰가 들었다. 블레어가 능숙한 가위질을 하며 카일의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목덜미 뒤로 차가운 날붙이가 오가는 것이 느껴졌는데도 하나도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목덜미를 스치는 블레어의 손 때문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뒷머리를 잘라 목덜미를 시원하게 드러낸 블레어의 손이 이제 앞으로 넘어왔다. 머리카락의 길이를 가늠하려고 만지작거릴 때마다 예민한 귀가 그의 손에 스쳤다. 카일의 귓바퀴가 천천히 붉게 물들었다. 블레어는 모른 척 카일의 머리카락을 마저 잘라 주었다. 익숙한 상황에 손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정수리를 넘어 귓가를 스치자 이젠 심장이 숫제 쿵쿵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블레어의 귀에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