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9)화 (59/84)

59화.

이제 상급반으로 올라가는 아카데미도 졸업하고 싶었고, 멋지게 자신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어른도 되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듯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마음을 나눠 보고 싶기도 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랑 이야기가 담긴 통속소설을 읽던 카일이 혼자서 뺨을 붉혔다. 

왠지 머릿속에 몽글몽글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하얗고 깔끔한 얼굴과 길고 곧은 체형,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 이제는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그 모습.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부끄러워진 카일이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문 밖에서 노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일 황자님.”

“응?”

베개에서 고개를 떼어 낸 카일이 대답했다.

“오늘 밤 황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만찬 자리가 있습니다. 참석하시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음, 알겠다.”

카일이 일어섰다. 블레어를 생각하느라 충만해졌던 마음이 식어 버렸다. 카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황실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는 자리는 주기적으로 만들어진다. 그동안은 아카데미에 있으면서 자리를 피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황궁에서 지내고 있으니 카일도 참석을 해야 했다.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선명한 금발 고수머리를 달군 쇠붙이로 직접 다듬어 모양을 내고,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리는 푸른 공단을 사용한 외투를 입었다. 카일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단장을 직접 하곤 했다. 연회에 참석하는 게 아니니 그렇게 과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었다.

칼슈온 황비부터 카일의 어머니인 오웬트리 황비, 조슈아, 카일, 아드리아나가 모두 모인 자리였다. 아직 지나치게 어린 데인은 유모가 돌보고 있으니 참석할 수가 없었고, 가장 상석에 황제가 앉았다. 지나치게 딱딱하고 불편한 자리였다. 괜히 블레어가 보고 싶었다.

황제는 가족애라고는 조금도 없으면서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가족들을 종종 둘러보며 위세를 부리는 것을 상당히 좋아했다. 다들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꼭 주기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들곤 했었다. 맞아들였던 황비들이 모두 대단한 미인이니 자식들도 상당히 인물이 훤칠하다는 것도 그의 허영심에 한몫했을 것이었다.

카일이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몰래 훑어보았다. 스피렌다 황비를 잃은 충격일까. 황제는 삽시간에 훌쩍 늙어 버린 느낌이 났다. 총기가 모두 사라진 눈, 푸석푸석한 피부. 언제 죽을지 모르겠군. 절반의 피를 물려준 사람이었지만, 황제를 바라보는 카일의 시선은 무감각했다.

식사 자리는 그렇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황제의 말이 먼저 나오면 적당한 사람이 적당한 대답을 이어간다. 황궁의 주방장이 가장 신경 써서 내온 식사일 텐데도 조금도 맛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카데미가 이곳보다는 열 배쯤 마음이 편했고, 모네터리 백작가는 이곳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편했다.

식사를 마친 황제가 먼저 자리를 빠져나갔다. 조슈아와 칼슈온 황비는 그 다음에 자리를 떴고, 어머니인 오웬트리 황비와 카일이 나갈 때였다. 카일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카일.”

아드리아나가 카일을 찾는 것을 알아챈 오웬트리 황비가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먼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카일과 아드리아나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가까운 남매지간은 아니었다. 나이 차이가 적지 않게 나는 것도 한몫했고, 카일이 어릴 적엔 아드리아나가 아카데미로 떠나 있었고 카일이 좀 자란 후에는 그가 아카데미로 갔기 때문에 접점이 없었던 것도 컸다.

“예, 누님.”

아드리아나의 자세는 곧고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지배자로서의 위엄을 갖춰 가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먼저 방을 나섰다. 아드리아나의 눈짓을 본 카일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황궁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할 이야기가 있는 걸까? 카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찬이 끝난 직후 어머니를 만나 뵈려 했는데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아카데미는 다닐 만하니?”

그녀의 물음에 카일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즐겁습니다. 배우는 것도 많고, 황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죠.”

“그렇지. 나 역시 아카데미를 졸업하지 못한 것은 꽤 아쉽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셨습니까.”

카일이 조용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리아나가 화제를 돌렸다.

“좋은 친구를 두었더구나.”

“예?”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카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너만은 살려 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무…… 슨 말씀이십니까, 누님?”

“모네터리의 가의 셋째 말이다. 내가 그에게 신세를 진 바가 있지. 답례로 바라는 것을 말해 보라고 했더니 그걸 말하더구나. 여러모로 참 재미있는 녀석이야. 그 아이와 가까운 사이니?”

“아, 예. 가까운 편입니다.”

카일이 얼굴을 붉혔다. 블레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어쨌든 카일은 그렇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긍정의 답을 했다. 마음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그렇군. 그리고 나는 그에게 진 빚이 있으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저 알아 두라고 하는 얘기다.”

“그러셨군요.”

한참 말을 고르던 카일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하여튼 그 아이는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지만 보고 있으면 참 재밌어. 실제로 능력도 있고. 기왕이라면 옆에 두고 보좌로 삼고 싶지만, 정작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여 무척 안타깝네. 널 두고 뭐라던지 아니? 너는 성품도 바른 데다 얼굴이 예쁘니 살려 두는 게 좋을 거라더구나. 정말 알 수 없는 애야.”

아드리아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드리아나는 스스로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 자부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블레어 모네터리는 그녀보다 열 살이 어린 데도 도무지 어리다고 느껴지질 않았으며,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람만 있다면 정치라는 게 너무나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 다행히도 정치판에 참여하면서 봐 온 사람들 중 블레어 같은 사람은 없었다. 다들 블레어처럼 음흉하고 똑똑하지 못해서 다행이었다.

아드리아나가 옆에 걸어가고 있는 아름다운 동생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꼬박 여덟 살 어린 카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전부 다 꿰뚫어 볼 수 있는데. 카일보다도 어린 블레어는 정말 속내를 알 수가 없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여튼, 여러모로 재밌는 데다 능력 있는 아이니 가까이 지내려무나. 먼저 들어가 보마, 쉬거라.”

인사를 마친 아드리아나가 또각또각 걸어 자신의 궁으로 향했다. 아드리아나를 배웅한 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카일이 어수선하게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어머니인 오웬트리 황비를 만나러 가겠다는 계획조차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블레어가? 나를 신경 썼다고?’

아드리아나와 그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테오도르가 황궁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접점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블레어가 아드리아나에게 보탬이 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확실히 아드리아나의 말대로 블레어에게는 보통의 학생들과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동안 카일은 자신만 일방적으로 블레어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뿐, 블레어는 자신을 데면데면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오늘 아드리아나에게서 들은 정보는 정말 놀라웠다. 카일의 기분이 둥실둥실 들뜨기 시작했다.

혹시, 블레어도 내게 호감이 있는 걸 아닐까?

거기에 생각이 닿자 얼굴이 너무 홧홧해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카일이 양 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너무 거세게 뛰어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워낙 쿵쿵 울려 관자놀이와 결후에서도 박동이 느껴졌다. 이대로 뛰다가 가슴 밖으로 심장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유력한 황제 후보에게 하는 부탁이, 고작 그딴 거라고? 물론 카일도 부잣집 아들인 블레어에게 당장 필요한 게 없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어쩌면 도둑고양이에게 먹이를 적선하듯, 자신에게 필요 없는 것을 휙 던진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희망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기분이 하늘을 날 것같이 좋아졌다.

한껏 들뜬 카일이 모네터리가에 놀러 가도 되느냐며 연락을 넣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갔던 지난여름에는 실수를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모네터리가의 어른들이 인품이 좋으셔서 망정이지. 그렇게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갔는데 열흘이나 머무르게 해 주시다니. 참 좋은 분들이었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난 후, 황궁도 예전처럼 무섭고 싸늘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카일 스스로도 성장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카일을 성숙한 어른으로 만들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입학할 적에는 아무도 지켜 줄 사람이 없는 어머니의 곁을 자신마저 떠난다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섰는데, 오웬트리 황비는 그녀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물론 카일도 어른이 되어 차근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카일 또한 성년이 지났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황제는 되지 못하더라도 또 나름대로의 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황궁을 떠나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다른 일을 모색해 봐도 좋을 것이었다.

당연히 모네터리가에서는 언제든 카일의 방문을 환영한다며 답신을 보내 왔다. 카일이 콧노래를 부르며 선물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물론 뭘 가져가도 모네터리 백작 부부의 눈에는 차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황족이 직접 황실의 물건을 가져간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그날은 반복되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카일은 블레어와 함께 바닷가에서 물장구를 치는 몽글몽글하고 따뜻한 꿈을 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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