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8)화 (58/84)

58화.

블레어가 이야기했던 아드리아나 황녀와의 만남은 의외로 빠르게 진행이 됐다. 겨울이 되며 국고의 장작 따위와 식량들을 풀며 제국민들과 인사한 황녀는 곧장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황도에 머물렀다. 그녀는 만날 사람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황녀가 두어 번 주변을 살피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위 관료나 귀족들이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나 이용하곤 하는 고급 식당이었다. 황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안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블레어와 테오도르였다. 블레어가 살짝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자, 앉지.”

자리에 착석한 블레어가 황녀의 안색을 살폈다. 안색이 무척 좋아 보였다. 물론 그런 엄청난 소란 후에 제국민들에게 얼굴을 비춰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유달리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온 덕도 있을 것이었다.

“좋아 보이십니다.”

“그대 덕이지.”

아드리아나가 씩 웃었다.

“앓던 이가 쑥 빠진 것 같아. 속이 다 시원하지 뭔가. 이대로라면 황제가 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아. 그 꼴 보기 싫은 독사 같은 년을 안 보니 정말 십 년 묵은 체기가 다 내려간 것 같네.”

“하하. 그러시면 안 되죠. 여기까지 오셨는데, 끝을 보셔야죠.”

“그래. 그대가 한 이야기는 나도 들어 보았네. 유레호에 있는 인신매매 시장을 정리하자는 이야기였지?”

“예. 그렇습니다.”

“나 역시 타당한 각본이라고 생각한다네. 조부님께 연락해서 시이첸 공작가의 사병을 내 달라고 말씀드렸고. 필수적으로 남겨 둬야 하는 수비대를 제외하고, 삼백 정도는 무리 없이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네.”

크라시아 제국은 사병이 많으면 역모의 원인이 된다며 국법으로 엄금해서, 힘 있는 귀족가라고 할지라도 사병의 규모가 그렇게 크질 못했다. 영지의 치안을 위해 꾸려지는 사병이 전부였다.

“좋습니다. 저희 쪽과 합치면 천이 조금 안 되겠군요. 그럼 확실히 군부에 연락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천에서 삼천은 돼야 한꺼번에 일망타진할 수 있을 겁니다. 클라라 누님이 주신 정보를 확인하니 하룻밤에 수천만에서 일억 골드는 예사로 거래가 된다고 합니다. 장은 매일 서지 않고 일주일에서 보름, 기습적으로 서고요.”

“어마어마한 규모로군.”

테오도르와 아드리아나의 표정이 굳었다.

“아마 그쪽에서도 따로 부리고 있는 인력이 있을 거예요. 인질을 잡고 있는 곳을 관리하려면 보통 규모가 아니겠죠. 인력을 살피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도 해야 할 것이니까요. 이런 일을 대비해서 데리고 있는 용병들도 있을 거고요.”

“완벽하게 전의를 꺾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죠. 세 배는 돼야지 싶네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이리저리로 말이 흘러 들어가서 눈치를 채기 전에 덮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 군부 쪽은 내가 알아보도록 하지. 이천 정도면 내 선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드리아나 황녀가 대답했다.

“든든하네요.”

블레어가 빙긋 웃었다.

“그러면 황녀님은 군부 쪽과 논의를 해 주세요. 세세한 계획은 이쪽에서 짜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럴게.”

“내가 후계자가 되고 황제가 된다면 톡톡히 보답하지. 뭐 필요한 거라도 있으면 말해도 좋아.”

“하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모네터리 백작가의 삼남인 블레어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냐마는, 블레어는 그녀의 약속을 사양하지 않았다. 블레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드리아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일의 화사하고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이복 형제지간인 두 사람은 상당히 많이 닮아 있었다. 남자인 카일 쪽이 좀 더 선이 굵고 화려하긴 했지만, 이목구비며 머리색이 비슷하니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종종 겹쳐 보이곤 했다. 역시, 이러나저러나 블레어는 카일이 일찍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카일에게든, 과거의 그에게든 애증이 한가득 남아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황제가 된다면 형제간에 큰 골육상잔을 치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순리대로 황제가 되는 것이니 조슈아나 카일이 뭐라고 반발할 것도 없었다.

황위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드리아나가 굳이 견제도 되지 않을 정적들을 제거할 이유는 없다. 물론 조슈아만 제거할 수 있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하지만 명분이 없으니 조슈아만 걸고넘어질 수는 없었다. 자리가 준비되었으니 한 번 정도는 카일을 위해 짚고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시진 않을 거라고 당연히 생각은 합니다만.”

블레어가 천천히 밑밥을 깔며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황녀님이 황제가 되신 후에, 만약 형제분들을 좀 정리하셔야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요. 카일 황자님만큼은 절 봐서라도 한 번 정도는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황녀님께 위협이 되는 상대는 아닐 테니까요.”

“카일을?”

아드리아나의 눈썹이 우스꽝스럽게 구겨졌다. 세력이 한미하고 아카데미에서 자란 카일은 아드리아나의 경쟁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대가 그 아이를 어떻게 알지?”

“친구는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아카데미에서 교분이 좀 생겼네요.”

“그렇군. 그러고 보니 그대와 그 아이가 비슷한 또래지.”

아드리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지금은 그럴 생각이 있는 게 아니기도 하지만, 만에 하나 그래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대 말대로 한 번 정도는 재고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셋째가 그대와 친분이 있었을 줄은 몰랐군.”

“딱히 본의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여러모로 일찍 죽기엔 아까운 사람이니까 한번 정도는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카일 황자님은 성품도 바르고 영리하신 데다, 엄청 예쁘기까지 하잖아요?”

블레어가 씩 웃었다. 허를 찔렸다는 듯 멈칫한 아드리아나가 마주 미소 지었다.

“그렇지. 셋째가 좀 곱상하게 생겼지. 알겠어, 그 아이 일은 따로 생각해 보도록 하지.”

카일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조슈아 쪽도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과거에 악연을 맺은 사람이니 너그럽게 보아 넘길 의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승자가 된 자의 아량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아드리아나가 황제가 된 후에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조슈아가 다시 멋모르고 까불대다 반역을 일으켜 숙청당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부터는 블레어가 알 바가 아니었다.

“예. 군부 쪽 상황이 준비되면 연락 주십시오.”

“테오를 통해서 연락할게. 그때도 여기에서 보는 것으로 하지.”

“예.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오늘 여러모로 피곤하셨을 텐데, 푹 쉬시고요.”

블레어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이 식당을 벗어났다. 먼저 아드리아나를 마차에 태운 후 두 형제가 길에 우두커니 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나를 태운 마차가 황성으로 사라졌다.

* * *

오랜만에 황궁에 돌아간 카일은 바뀐 분위기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황궁 전체를 장악하고 황후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굴며 전횡을 일삼던 스피렌다 황비 세력이 모두 숙청당한 덕이었다.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대로 몸을 사렸고, 카일과 같이 속이 시원하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었다.

황제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았지만 건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동안은 스피렌다 황비가 낳은 아이를 후계자로 만들겠다며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닌 탓에 후계자 자리가 비워져 있었지만,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이대가 적당한 황실의 세 형제에게 시선이 모여들었다.

구심점을 잃은 세력은 우왕좌왕하다 순식간에 아드리아나에게로 모여들었다. 아드리아나가 비록 여자이지만 그녀도 충분히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이제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곤 했다. 아직 장자 상속을 우선으로 한다는 국법은 소멸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아드리아나의 모친은 황후였고, 그녀에게는 시이첸 공작가의 비호가 남아 있었다.

아드리아나를 견제할 수 있는 첫 번째 세력은 과욕으로 자멸했고, 조슈아 쪽은 여러모로 아드리아나와 맞설 정도의 규모가 되지 않았다. 정통성도, 명분도, 세력도 모든 게 부족했다. 실권을 잡은 아드리아나는 착착 후계자로서의 일들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녀로서의 신분을 내세우며 의회에 참석하고, 얼굴을 내비쳤지만 황궁 내의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진심으로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조슈아 쪽 사람들은 생각조차 않았던 아드리아나의 도전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저 스피렌다 황비와 그녀가 낳을 자식만 경계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상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일 년 전만 해도 골골대고 침대에 누워 죽을 날만 받아 기다리던 첫째 황녀가 이렇게 기운을 차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 황녀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자신과 대립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세력을 모두 제거했다.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사실 전말을 모두 꿰뚫고 있는 블레어가 아니었더라면 스피렌다 황비의 계획이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운이 지나치게 나빴고, 아드리아나는 운이 지나치게 좋았다.

어쨌든 황실에는 예전과는 다른 전운이 감돌고 있었지만, 카일은 그게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꿈속의 자신은 황제였지만, 카일은 그렇게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다시금 블레어를 그렇게 잃고 싶지는 않았다. 꿈의 정체가 예지몽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카일이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카일은 꿈속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블레어를 똑같이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카일이 생각할 때도 아드리아나는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여인이었다. 처음에는 여자인 그녀가 황제가 된다는 것이 낯설었지만,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드리아나는 첫째였고, 카일 자신이나 조슈아보다 훨씬 모친의 집안도 좋았다. 모친의 집안이 좋다는 것은 정치 싸움에 유리하다는 말과 같았다.

괜히 황위를 놓고 다투다 휘말려서 비명횡사하는 쪽은 사양이었다. 사실 원래 카일은 딱히 삶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카일은 마음을 좀 달리 먹고 있었다. 왠지 조금쯤은 더 살아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죽기에는 그는 지나치게 젊었으며, 해 보지 못한 일이 많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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