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7)화 (57/84)

57화.

2학년 수업이 끝나고 학기가 마무리되며 블레어는 최우수 성적상을 수상했다. 물론 과거에도 블레어는 공부를 무척 잘하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독보적이었다. 화려한 성적표를 받아 들자 기분이 굉장히 미묘해졌다.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니 기분이 나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열 살도 더 어린 애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고 좋은 성적을 받았다는 데서 오는 미묘한 정신적 충격은 도무지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너무 좋으니 월반을 해서 같이 수업을 듣자고 아론이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동안은 그저 허허 웃으며 넘기곤 했지만 왠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가 된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은 이제 5학년이 되어 상급자 반으로 올라가게 될 것이었다. 확실히 두어 학년쯤은 올라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번 방학에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과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아카데미의 겨울방학은 한 학년이 끝나면 시작된다. 여름의 짧은 방학보다는 훨씬 길었다. 두 달 동안 학생들은 모두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가거나 날씨가 좋은 지방에 사 둔 별장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아론도, 카일도 이번에는 모두 아카데미를 떠나기로 했다. 여름의 짧은 방학이면 몰라도 겨울까지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아론을 먼저 마차에 태워서 배웅하자 카일과 블레어, 두 사람이 남았다.

이제 성년이 완전히 지난 카일은 어른의 태가 났다. 아론은 물론 성년이 되고 난 후에도 체구가 워낙 작아 어린애 같은 맛이 있었지만 카일은 전혀 달랐다. 이제 카일에게는 수컷의 분위기가 배기 시작했다. 어깨도 훨씬 널찍해졌고, 성장이 거의 마무리되었는지 키며 몸매도 늘씬하고 길쭉길쭉했다. 그 남자다운 몸은 화려하다고 느껴질 정도인 얼굴과도 의외로 위화감 없이 어울렸다. 그 전에는 작고 귀여운 강아지 같기만 하더니 이제는 늘씬한 대형 고양잇과 같은 품위가 가끔 느껴지기도 했다.

블레어와 제법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게 된 카일이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자랐어도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예쁜 얼굴이었다.

“아, 카일 님도 방학 잘 보내고 오십시오. 겨울 건강하게 나시고요.”

블레어가 인사말을 툭 던졌다.

“응, 그럴게.”

카일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하던 커다란 두 세력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갔으니 카일로서도 운신하기 더욱 편해졌다. 확실히 황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카일의 얼굴이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블레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푹 쉬다 와.”

“그러겠습니다.”

유레호 건을 처리하려면 방학 중에도 여러모로 바쁠 것이었다. 블레어는 이번에 모네터리 영지로 돌아가 방학 중에 모든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슬슬 제국도 안정이 되고 있었고, 클라라가 알아서 군부 쪽에도 연을 대 놓았을 것이었다.

테오도르야 굴려 먹을 명분이 있었지만 사실 클라라에게는 일방적인 호의를 요구하는 것이니 조금 미안했다. 물론 아드리아나 황녀가 후계자로 책봉이 된 후 황제가 된다면 자연히 떨어질 콩고물이야 있겠지만, 이미 모네터리라는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클라라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클라라가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돕는 것은 그녀의 순수한 호의였다.

“방학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개학 하면 뵙겠습니다.”

“으응. 모네터리령이랑 황궁이랑 그렇게 멀지 않은데, 혹시 한가하거나 시간이 될 때 놀러 가도 돼?”

카일이 혹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블레어의 눈치를 살폈다. 블레어를 그렇게 오랫동안 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예, 그러십시오.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부모님도 반가워하실 겁니다.”

블레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답을 들은 카일이 화사하게 웃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었다.

“아, 저희 마차가 도착했군요. 그럼 저도 먼저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블레어가 챙겨 놓은 짐을 챙겨 마차에 올라탔다. 카일에게 눈인사를 하고 블레어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카일이 블레어의 마차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름, 괜히 서글프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던 그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에게도 머무를 곳이, 돌아갈 곳이 있었다. 황궁이든, 모네터리 저택이든. 카일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카일이 이번 학기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여름방학을 끝내고 돌아온 후, 두 사람은 같은 수업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나란히 앉았다. 이젠 뚜렷한 용건 없이도 블레어의 방에 찾아갈 수 있었다.

시험 기간에는 아론과 함께 모여 도서관에 자리를 펴고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카일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블레어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커다란 담요를 옆에 앉은 블레어와 함께 무릎 위에 나눠 덮고 공부하던 것은 꽤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눈치 없는 아론은 자신은 혼자서 커다란 담요를 쓸 수 있다며 좋아했지만, 그 자리의 승리자는 카일이었다.

9. risoluto 결연하게

집에 도착한 블레어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가족들이 식탁에 모여 있었다. 근래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테오도르만 없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막내를 모두들 반갑게 맞아 주었다. 특히 백작 부인이 그랬다. 모네터리 백작 부인은 여전히 화사하고 소녀 같았다. 신기할 정도였다. 막내인 블레어조차 올해 가을이 되면 성년이 될 텐데, 자식 셋을 낳은 백작 부인은 도무지 늙지를 않았다. 어쩌면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전혀 없어서 그럴지도 몰랐다.

“어머니.”

“블레어,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니?”

“보내 주신 마차를 타고 오는데 힘들 게 뭐가 있겠어요.”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긴, 그렇지. 오랜만에 블레어가 왔는데 우리 큰아들이 없어서 아쉽구나. 다 같이 저녁을 먹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형님이야 워낙 바쁘시니까요.”

“그래, 그 아이는 그게 문제야! 그러니까 아직까지도 결혼을 못했지. 우리 테오도르를 사윗감으로 탐내는 귀부인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테오에게 말조차 꺼내 볼 수가 없단다. 벌써 나이가 스물일곱인데 그 아이도 슬슬 결혼을 해야지 않겠니.”

블레어가 하하,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 논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클라라가 슬쩍 눈을 피했다. 모든 실드는 이제 블레어의 몫이었다.

“형님께서는 하시는 일이 많으시니 어쩔 수 없죠. 이번에도 황궁에 워낙 큰일이 터졌으니까요.”

“그래. 물론 그 아이가 맡은 바 역할을 잘 해낸다는 건 나도 언제나 자랑스럽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해. 남자는 가장이 된다면 많은 게 변한단다.”

“허허, 그만하시오. 알아서 잘 하겠지. 블레어가 오랜만에 왔는데 자리에도 없는 테오 이야기를 해서 뭣해?”

백작이 부드럽게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아휴, 마음 같아서는 관직도 내려놨으면 좋겠어요. 자식들을 품에 끼고 살 때가 좋았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집에 제때 들어오는 녀석도 없고. 블레어는 심지어 나가 살고 있고!”

“자주 올게요, 어머니.”

블레어가 백작 부인을 달랬다. 부인이 입을 삐쭉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그럭저럭 평화로운 저녁 식탁이었다.

백작 부인의 말대로 테오도르는 자정이 가까워서야 귀가를 했다. 테오도르가 탄 마차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블레어가 방을 나섰다.

“형님.”

마중을 나간 블레어가 테오도르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자고 있질 않고.”

테오도르의 눈이 잠시 놀란 듯 커졌지만 곧 담담하게 웃으며 블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새 좀 더 큰 것 같구나.”

테오도르도 건장한 장신이었지만 이제는 블레어도 키가 부쩍 자라 그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블레어 쪽은 호리호리한 편이어서 홀로 떼어 놓고 보면 더 늘씬해 보였다.

“하하, 성장기잖아요. 성년이 되기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부지런히 커야죠.”

“네가 나보다 키가 클지도 모르겠구나.”

“그럴 수도요.”

“아직 졸리지 않다면 잠시 얘기나 할까?”

테오도르가 웃으며 그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테오도르의 케이프를 받아 들고 졸졸 따라간 블레어가 방 안에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그동안 어떠셨어요?”

블레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카데미에서도 이야기는 대충 다 들었어요. 성공적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다는 것도요. 고생하셨어요, 형님.”

“그래. 다 네 덕분이지. 황녀마마께서도 네게 감사하다고 전하라 신신당부하시더구나. 굵직굵직한 것이야 너도 다 알고 있을 테고, 황녀마마의 발언권이 많이 커졌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황녀님을 지지하는 세력이 좀 형성됐어.”

“제가 뭘요. 저는 몇 마디 말한 게 전부인데요. 다 두 분과 클라라 누님이 고생하신 덕이죠.”

“겸손하기는.”

블레어의 너스레에 테오도르가 피식, 웃었다. 테오도르가 두툼하고 커다란 손으로 블레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클라라에게서 대충 들었다. 유레호 쪽 일을 건드려 보자고?”

“예.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민심을 얻기에도 적당한 일인데다, 알고 난 이상 도의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죠.”

“그래. 나도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그게 가장 적당한 일인 것 같긴 하더구나. 완벽한 후계자 위를 얻으려면 보통 일로는 안 되는데,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전쟁이라는 단어에 블레어가 움찔거렸다. 실제로 과거의 블레어는 그렇게 했었다.

“어차피 황녀님은 대외적인 활동을 꾸준히 하셨던 분이니까요. 큰 공적만 세우시면 무리 없이 후계자로 논의될 겁니다.”

블레어가 매끄럽게 말을 돌렸다.

“그래.”

“시간이 되시면 황녀님을 한번 모시고 황궁 바깥으로 나와 주세요. 얼굴 한번 뵙고 싶네요. 그나저나 건강은 많이 회복되셨나요?”

“그래. 아주 건강해지셨다. 그렇게 몸이 약하시던 분이라곤 생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다행이네요.”

블레어가 씩 웃으며 일어섰다.

“그럼, 쉬세요. 들어가 보겠습니다.”

테오도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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