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카데미의 방학이 딱 사흘 남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여 다함께 저녁을 먹었다. 백작가에서 제일 바쁜 클라라까지 집에 와서 저녁을 먹는 날이다 보니 주방장이 솜씨를 좀 냈는지, 유달리 저녁 식사가 풍성하고 맛있었다.
블레어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라라가 식탁 밑으로 발을 뻗어 블레어의 다리를 탁 건드렸다. 음식에서 눈을 떼고 클라라를 바라보자 클라라가 슬쩍 눈짓을 했다. 대충 그녀의 신호를 이해한 블레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오직 두 사람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동작이었다.
식사를 마친 카일이 블레어의 방에 같이 들어와서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처음 블레어의 침대에 몰래 들어왔던 이후로 카일은 매번 자연스럽게 블레어의 침대에 잘도 올라왔다. 무슨 꿈이라도 꾼 건지, 잔뜩 운 게 뻔해 보여 며칠 그냥 넘어갔더니 그 후에는 계속 악몽을 꾼다며 당연하다는 듯 블레어의 침대에 누웠다.
카일은 실제로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 카일을 쳐다보면 뺨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가볍게 흔들어 깨워도 깨질 않았다. 종종 잠에서 깨 자신의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카일 같은 미인이 눈을 그렁그렁 뜨고 부탁하는데 안 된다며 딱 잘라 거절할 만한 간담을 지닌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블레어도 그랬다. 카일이 배시시 웃으며 옆에 누울 때마다 이건 아니라고 정신 차리라며 이성이 부르짖었지만, 그 화려한 미모 앞에서 블레어의 이성은 너무나 미약했다.
블레어가 카일에게 툭 말을 건넸다.
“카일 님.”
“응?”
넓은 침대 위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누워 있던 카일이 고개를 들어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저, 잠시 누님을 뵙고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혼자 잠시만 계십시오.”
“응, 그러도록 해.”
카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늦어진다면 먼저 주무셔도 됩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카일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동물을 유기해 본 적이 없는 블레어의 마음이 괜스레 찔렸다.
“악몽을 꾸실까 걱정되면 기다려 주시고요.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블레어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지, 숙면하지 못하는 카일이 마음 쓰이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그렇게 밤마다 매일같이 울 정도로 힘겨운 악몽을 꾸는 걸까.
“응! 그럼 기다리고 있을래!”
블레어의 말을 들은 카일이 기쁜 듯 웃었다. 뒤에서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블레어가 클라라의 방으로 향했다. 서둘러야 했다.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난 후라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똑똑-
가볍게 노크를 한 블레어가 클라라의 방에 들어갔다.
“누님.”
“왔니?”
클라라가 잘 정리된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클라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블레어가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뭘 고생을 했다고.”
블레어가 천천히 서류를 넘기며 내용을 확인했다. 블레어가 요청한 그대로였다. 스피렌다 가문에서 3년 동안 오고 나간 금전 거래 내역이 전부 적혀 있는 장부와 카르펜의 거래 내역, 그리고 그 카르펜을 스피렌다 가문에 처방한 의원의 재산의 변동까지.
“그야말로 엄청나게도 해먹었네요.”
서류를 읽던 블레어가 혀를 찼다. 스피렌다 남작가의 딸, 스피렌다가 황비가 된 후로 정말 여러 곳에서 야무지게도 돈을 받아 처먹은 흔적이 드러났다. 물론 직접적인 자산이 늘어난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출이 급격하게 몇 배로 늘어났으니 정황은 뚜렷했다.
“그러게 말이다. 적당히 받아먹고 장부를 철저하게 꾸몄더라면 발견 못 했을 텐데.”
“분식회계조차 안 되는 수준으로 받아먹었으니, 장부를 위장할 수 있을 리가 있나요. 하여튼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한심한 것들.”
블레어가 혀를 차며 서류를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의원의 신병은요?”
“물론 확보 완료. 멀리 여행 간다며 소문도 짜하게 내 놨으니 걱정은 않아도 된다.”
“예. 알겠습니다.”
클라라가 블레어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이제는 슬슬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니?”
“아, 예. 그렇죠. 아드리아나 황녀님이 카르펜에 중독된 정황이 드러나서요. 스피렌다 가문에서 손을 쓴 게 뻔해서 경로를 추적해 본 것입니다.”
“아드리아나 황녀님이?”
클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클라라도 큰오빠의 오랜 짝사랑을 알고 있었다. 클라라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클라라와 테오도르는 크게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클라라는 언제나 침착하고 똑똑한 테오도르를 나름대로 존경하는 편이었다. 그런 테오도르가 평정심을 잃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아드리아나가 엮일 때였다. 아드리아나의 생일 때면 최고로 귀하고 좋은 것을 주겠다며 상단을 뒤집어엎기도 했고, 그녀가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면 발품을 팔아서라도 구해다 주곤 했다.
“예. 어쩌다 보니 알게 됐죠. 황실에 출입하시는 테오도르 형님이 직접 알아보면 눈에 띄니까 누님께 비밀리에 부탁드린 겁니다.”
“그래.”
클라라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 갔다.
“곧 크게 사달이 나도 날 거예요. 한바탕 큰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죠. 그때까지 최대한 바깥으로 말이 새지 않도록 함구해 주세요.”
“물론이지.”
“어쨌든 정말 고마워요, 누님.”
다시 한번 클라라의 양쪽 뺨에 입을 맞춘 블레어가 이번에는 서둘러 테오도르의 방으로 향했다. 서류가 손에 들어왔으니 이제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었다.
“형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테오도르의 방으로 곧장 들어간 블레어가 테오도르를 불렀다. 편한 옷을 입고 쉬던 테오도르가 그를 맞아들였다.
“오냐, 블레어.”
테오도르가 블레어가 품에 끼고 있는 서류를 눈짓했다.
“그거니?”
블레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천천히 넘기며 읽는 테오도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클라라는 정말 유능했다.
그녀가 정리한 서류에는 스피렌다 남작가의 지출이 급격히 늘어날 때, 그들과 가까이 교류하는 주변 귀족 집안들의 자산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적혀 있었다. 의심이 가는 집안들과 당시 일어난 일들이 서류에 모두 다 명기돼 있었다. 전체적인 자금의 흐름을 파악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린 모양이었다.
물론 집행부인 테오도르는 이 정도만 보면 그맘때쯤 어떤 가문의 사람이 직책이나 작위를 받아 갔는지 익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거기서부터는 테오도르의 몫이었다.
카르펜을 구입한 정황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물론 스피렌다 남작가도 완벽하게 목록에 대놓고 카르펜 구입이라고 써 놓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녀와 의원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거기서부터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눈을 마주친 두 형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블레어.”
“제가 뭘요. 클라라 누님이 수고해 주셨죠. 그럼 여기서부터는 형님께 맡길게요.”
“그래야지. 내가 손을 써 보마.”
테오도르가 단단하게 입술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는 영리한 사람이니 여기서부터는 그에게 모든 걸 일임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따로 황녀님이 무엇을 하셔야 할지 생각해 둔 게 있어요. 황녀님께 직접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황궁에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듣는 귀도, 보는 귀도 많아요. 아카데미로 돌아가면 제가 주말에 밖으로 나올게요. 스피렌다 남작가의 일이 정리되면 그때 황녀님과 접선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황녀님의 건강은 좀 회복되셨나요?”
“응. 며칠 새에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다. 물론 시녀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여전히 파리하게 분장을 하고 계시지.”
“알겠습니다. 그럼 남작가의 일이 끝나면 뵙는 걸로 하죠. 제가 안부 묻는다고 전해 주십시오. 건강 부지런히 챙기시라고도 전해 주시고요.”
“물론이지. 그때는 우리가 아카데미 쪽으로 이동하마.”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황녀님이 멀리 나오시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젊은 제가 움직여야죠.”
블레어의 너스레에 테오도르가 피식, 작게 웃었다.
“접선 시기와 장소는 나중에 따로 말해 주마.”
“예. 그럼, 푹 쉬세요, 형님.”
블레어가 빙긋 웃고는 방을 돌아 나갔다. 정치 싸움은 블레어의 몫이 아니었다. 물론 과거의 블레어는 모략과 음해, 그리고 물밑 여론 작업과 여론 조성에도 충분히 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떼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 일에 발을 담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테오도르도 슬슬 이런 일에 익숙해질 때가 됐다. 블레어가 볼 때 테오도르는 평생 정쟁(政爭)의 한복판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큰일을 맡아 보는 것도 괜찮았다. 그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것이다.
스피렌다 가문을 쳐 내고 나면 아드리아나 황녀의 운신의 폭이 더욱 넓어질 것이었다. 슬슬 그때부터 여자도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여론 조성에 들어가고, 인신매매 시장까지 일망타진하고 나면 후계자로 정해질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질 것이었다.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니 몸도 피곤할 것 없고, 정신적으로도 지치지 않는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테오도르와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블레어가 빠른 발걸음으로 자신의 방에 돌아갔다.
블레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일이 타다닥 달려와 쏙 안겼다.
아니, 안겼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분명히 안긴 것은 카일이었지만 카일이 체격이 훨씬 크다 보니 정작 블레어가 그의 품에 폭 파묻힌 것 같은 모습이 되어 버렸다. 카일의 품은 크고 따뜻하고 안정적이었다. 부드러운 체향이 블레어의 예민한 후각을 살짝 간지럽혔다. 품에 얌전히 파묻힌 블레어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카일은 꿈을 꾸기 시작한 이후로 블레어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불안해졌다. 꿈속의 그처럼 지금의 블레어도 언젠간 죽어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