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카일이 밤중에 그의 침대에 들어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블레어는 놀라지 않았다. 블레어가 카일을 불렀다.
“응, 블레어. 일어났어?”
“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블레어가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찍 일어나 깨우러 들어왔다고 변명하기에는 카일의 옷차림이 지나치게 흐트러져 있는 상태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으응, 잘 잤어. 블레어는?”
블레어는 굳이 카일이 왜 잠옷 차림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방에 들어와 있는지 지적하질 않았다. 딱 봐도 퉁퉁 부어 충혈된 눈이며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이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또렷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블레어가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준 것이지만, 카일은 블레어가 눈치채지 못했나 보다, 하고 안도했다.
“저도 잘 잤습니다. 세수하고 오십시오. 배고프실 텐데, 아침 식사 하셔야죠.”
카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지 않은 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 카일이 총총 손님방으로 돌아갔다. 잘 훈련된 하녀들은 비어 있는 손님방에도 놀라지 않고 의복과 세숫물을 준비해 두었다. 얼굴에 차가운 물을 끼얹자 정신이 확 돌아왔다.
어젯밤 꾸었던 꿈에 다시 생각이 닿았다. 대체 그 꿈은 뭐지? 카일이 표정을 굳혔다.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했다. 꿈속의 자신은 황제였고, 블레어는 그의 신하였다. 고작 재미난 꿈일 뿐이라면 다행이었을 텐데, 꿈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느껴지던 불안감과 슬픔 같은 부정적이고 깊은 감정이 아직도 짙게 남아 있었다. 꿈속의 자신과 마음이 동화된 모양이었다.
카일이 고개를 흔들어 허튼 생각을 지워 냈다. 그저 낯선 곳에서 흉흉한 일을 겪어 꾸게 된 악몽일 뿐이다. 괜히 신경 쓸 것 없다. 카일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옷을 갈아입은 카일이 다시 블레어의 방에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상의의 단추를 채우고 있던 블레어가 카일을 돌아보았다.
“빨리 돌아오셨네요. 괜찮으니 들어오세요.”
블레어가 잔잔하게 웃으며 카일을 맞아 주었다. 혹시나 싶어 유심히 블레어의 표정을 살피던 카일이 마음을 내려놓고 안심했다.
주인의 허락에 카일이 쪼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괴이쩍은 꿈을 꾸고 나니 괜히 블레어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졌다.
“아침 식사를 하러 가시죠. 따로 일러두었으니 먹거리가 풍성할 겁니다.”
블레어의 장담대로 아침은 지나치게 화려했다. 식탁에는 모네터리 백작 부부와 테오도르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카일이 자신을 맞아 주는 백작 부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잔뜩 부은 눈을 가라앉히느라 세수를 하며 눈을 만지작거린 보람이 있는지, 백작 부처는 카일에게서 이상함을 찾아내지 못했다.
“너도 앉거라, 블레어. 아침 먹어야지.”
“예. 누님은요?”
드르륵, 의자를 빼서 앉으며 블레어가 물었다.
“클라라는 어제 상단 건물에서 잤단다. 오늘 낮에나 돌아온다더구나.”
“그렇군요.”
블레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블레어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느라 분주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와 블레어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테오도르와 시선을 나눈 블레어가 앞에 놓인 음식에 집중했다. 클라라가 장부와 의원을 확보하면 곧장 일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블레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테오도르가 그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뗐다.
“많이 드십시오, 황자님.”
블레어가 카일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었다.
“예. 잘 먹겠습니다.”
카일도, 블레어도 어제저녁을 제대로 먹지 못해 굉장히 허기진 상태였다. 쇠도 소화할 나이인데 배가 고프지 않을 턱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걸신들린 듯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난 후 카일을 서재에 데려다 놓은 블레어가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백작에게 보고할 일이 있었다.
“어서 오너라, 블레어.”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모네터리 백작이 막내아들을 맞아 주었다. 블레어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기사들에게 전후 사정은 전달받으셨지요?”
“오냐, 들었단다. 잘했다.”
모네터리 백작이 블레어를 칭찬했다. 손속이 과하다고 혼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황자인 카일이 엮여서 그런 모양이었다.
“영지의 치안에 한번 신경을 더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확인하도록 하마.”
“예.”
고개를 끄덕인 블레어가 집무실을 떴다. 블레어가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작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내 아들인데도 저 아이를 잘 모르겠어. 내 품에서만 끼고 키운 녀석인데. 고작 2년 아카데미에 떼어 놓았던 게 저렇게 큰 변화를 가져오는가?”
“글쎄요, 저는 아직 아이가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구석에 서 있던 백작의 호위가 대답했다.
“하하, 그렇지. 하지만 테오도르는 전혀 그렇질 않았는데 말야. 클라라도 도통 이해하기 어렵게 굴더니, 블레어가 한 수 위인 것 같아. 테오도르 같은 애는 발로도 열을 키우겠던데, 블레어와 클라라는 영 어려워.”
“그렇습니까?”
“아이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 그냥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 같아서 그런 걸세. 왠지 조금 낯설어, 저 아이가. 훌쩍 어른이 되어 버린 것만 같군.”
호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의 감은 예리한 법이었다. 블레어가 나간 자리를 한참 보고 있던 모네터리 백작이 다시금 서류에 집중했다.
백작의 방을 빠져나와 천천히 복도를 걷던 블레어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앞으로의 일을 정리했다. 일단 카일이 저택에 머무르고 있으니, 카일을 우선하되 테오도르와 일을 진행시키는 것도 빠트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재로 다시 돌아온 블레어가 얌전하게 책을 구경하고 있는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놀라셨을 테니 오늘은 집에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카일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조금 피곤한 참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곤했다.
“저택 안은 안전하니 마음대로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물론 너무 멀리 가시면 안 되겠지만요. 혹시 읽고 싶으신 책이 있으면 마음대로 보셔도 됩니다.”
“응. 블레어는?”
“저도 전하와 함께 있어야죠.”
블레어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하라는 호칭을 들은 카일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꿈속 블레어가 불렀던 그 수많은 전하, 폐하라는 호칭들. 꿈속의 자신은, 꿈속 블레어는 대체 누구였을까. 아니, 그 꿈은 대체 뭐였을까. 그 얼굴을 본 블레어가 움찔 놀랐다. 자신이 전하라고 불러서 카일이 서운해진 줄 안 모양이었다.
“아, 카일 님.”
블레어가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어쨌든 오늘은 푹 쉬도록 하십시오. 이따가 해가 좀 떨어지면 산책을 나가거나 말을 타셔도 좋고요.”
“응. 그럴게.”
“아버지께서 당분간 영지의 치안을 강화할 거라 하셨으니, 아카데미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정도 시장엔 다시 나가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이 방긋 미소를 지었다. 어제 여러모로 기분 나쁜 일을 당하긴 했지만, 카일은 모네터리 영지도, 영지의 큰 시장도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약간 좋아진 카일이 책을 한 권 뽑아 들고는 자리에 앉았다. 꿈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았자 머리만 복잡해질 것 같았다.
모네터리 백작가의 장서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테오도르가 책을 좋아해서 이리저리 수집한 귀한 고서도 여럿이었다. 황궁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는 책들이 가득했다. 주변에 놓여 있는 푹신푹신한 쿠션을 카일의 무릎 위에 올려 준 블레어가 책상에 앉았다.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는 종이에 블레어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블레어가 사각사각 깃펜으로 중요한 요소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드리아나 황녀, 유레호, 테오도르, 블레어, 카일, 황위, 스피렌다 황비.
이제 모든 배우가 준비되었으니 연극의 막을 올려야 했다.
* * *
아카데미의 짧은 방학은 금세 절반이 지나가 버렸다. 카일은 당연히 아직까지도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않고 모네터리가에 머물고 있었다. 객 하나 오래 머문다고 재산이 거덜 날 턱이 없는 모네터리가에서는 당연히 쌍수를 들어 카일이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을 환영했다. 모네터리 저택에서의 생활은 완벽했지만, 정작 지금 블레어가 모르는 카일의 속은 무척 어수선했다.
카일은 처음, 그 예지몽 같은 꿈을 꾼 이후로 꾸준히 비슷한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의 자신은 이 크라시아 제국의 황제였으며 블레어는 자신의 신하였다. 블레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다정했고 멋있었으며 이상적이었다. 그 수많은 달콤한 꿈의 끝은 늘 똑같았다.
‘조심하십시오!’ 블레어가 경고를 하고, 그가 화살을 맞고, 그 모습을 보는 꿈속의 자신이 오열한다. 처음엔 블레어의 경고만 들려왔지만 꿈이 반복될수록 점점 그 뒤가 보였다. 꿈은 늘 블레어의 다른 모습을 보여 줬지만 마지막 장면은 항상 똑같았다.
사냥터에서 그가, 죽는다. 내 대신.
블레어가 자리를 비워 혼자 남겨진 카일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몸에는 엄청난 상실감과 고통이 남았다. 그 꿈을 꿀 때마다 꿈속의 자신의 감정이 전이됐다. 지나치게 슬프고 고통스러워서 잠을 자다 깨어나 흐느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옆에서 자고 있던 블레어가 몸을 도닥거려 줬다. 블레어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블레어가 대신 화살을 맞은 이후의 꿈은 꿀 수가 없었다. 그 무수한 고통스러운 죽음만 반복되었다. 카일은 많은 게 궁금했다. 꿈속의 블레어가 화살을 맞은 이유도, 그 이후 자신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곳의 누구도 그 질문에 대답해 줄 수는 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