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카포 (Da capo) (50)화 (50/84)

50화.

카일은 블레어가 손님방의 문을 닫고 나간 후, 얌전하게 이불을 고쳐 덮고 어둠에 잠겨 눈을 깜빡거렸다. 아까 조금 놀라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정신이 조금씩 흐려졌다. 카일이 옅은 잠에 가물가물 빠져들었다.

‘블레어?’

꿈속의 자신이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불렀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블레어의 지금 머리카락보다 훨씬 길었다. 남자는 지금의 블레어보다 키도 훨씬 컸다. 하지만 꿈속 자신은 그를 블레어라고 확신했다. 어째서지? 의문이 들었는데도 정신이 흐려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블레어라고 불린 남자가 카일을 돌아보았다.

흑발에 또렷한 자안. 카일이 알고 있는 어린 블레어와 꼭 같은 색깔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본 남자는 지금의 자신보다도 훨씬 나이가 많고 성숙해 보였다. 카일을 돌아본 남자가 싱긋 웃었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승전?

웬 승전이람. 카일이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블레어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꿈속 자신이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자신의 얼굴인데, 자신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있었다. 꿈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장면이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카일은 황궁 안에 있었다. 자신이 서류 뭉치에 둘러싸여 서명을 날인하고 있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블레어였다. 꿈속 자신이 고개를 들어 블레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꿈속 자신이 들뜨는 게 느껴졌다.

‘들어와.’

‘폐하, 고생이 많으십니다. 바쁘신가요? 병무부에서 올리는 것이니 천천히 보십시오.’

카일의 옅은 잠은 수많은 환각 같은 꿈들을 보여 주었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블레어, 블레어, 블레어. 수많은 블레어가 각기 다른 모습과 표정으로 나타나 카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장군이기도 했으며, 공작이기도 했고 관료이기도 했다. 작위를 받는 수여식의 블레어도 지나갔고, 말을 달리고 있기도 했으며 서류 뭉치를 잔뜩 들고 궁을 종종 오가고 있었다. 검을 잡고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모습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는 늘 자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서 온기가, 애정이 몽글몽글 뭉쳐져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것이 자신이 아님에도, 카일은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선을 받는 꿈속 자신은 조금 우쭐하기도 했고, 조금쯤 기쁜 것 같기도 했다. 꿈속의 자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어렴풋하게 카일에게도 느껴졌다.

꿈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조심하십시오!’

‘경하드립니다, 폐하.’

‘고생이 많으십니다.’

‘나중에 시간 나시면 아론과 함께 한잔하시죠.’

‘오랜만입니다 폐하, 레너드 경.’

자신은 그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덩달아 기뻤다. 어른인 블레어가 다정하게 웃으며 미소 짓는 것만큼 그를 바라보는 꿈속 자신의 얼굴도 부드러웠다. 자신의 얼굴이니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저것은 분명 애정을 품은 상대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부드럽고 따뜻하던 장면이 이어지던 순식간에 전환되었다. 삽시간에 어두운 분위기가 어렸다.

‘이제 퇴직하려 함이니 윤허해 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꿈은 특이했다. 자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블레어의 목소리만 남겨 놓고 모든 소리를 차단해 버린 것 같았다. 분명 분노한 자신이 필사적으로 뭔가를 외치고 있는데도 꿈을 꾸는 카일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퇴직이라니.

블레어의 얼굴은 지나치게 단호했다. 그가 알고 있는 블레어 같지가 않았다. 당신은 대체 누구야? 하나는 확실했다. 꿈속 자신은 퇴직을 말하는 목소리에는 배신감과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아파 왔다. 꿈인데도 격통이 느껴졌다.

얌전히 누워 잠을 자고 있는 카일의 눈꺼풀 위로 눈물이 어렸다.

무거운 분위기는 얼마 가지 않아 금세 전환되었다. 청량한 분위기가 어렸다. 어딘가의 숲인 것 같았다. 말과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 있었다. 아, 어딘지 알겠다. 황궁 사냥터인 모양이었다. 멋진 흑마를 몰아 꿈속 자신에게 다가온 블레어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정말 그는 끝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마무리 짓고 미련 없이 훌훌 떠나가려는 사람 같아 보였다.

‘무두질을 해서 호피를 황좌에 걸쳐 두면 제법 멋이 날 겁니다.’

사냥터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문득 불안해졌다. 블레어가 말을 몰아 사라졌다. 손을 뻗어 그가 가지 못하도록 잡고 싶었다. 꿈을 꾸고 있는 카일이 손을 뻗어 보았지만, 꿈속 자신의 몸을 조종할 수는 없었다. 왠지 억울해졌다.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그가 겪는 것을 자신도 보고 있는데, 자신은 저 몸을 다룰 수가 없었다.

전의 꿈들은 순식간에 장면이 전환되곤 했는데, 사냥터의 꿈은 지나치게 길었다. 왠지 점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훑어보고 싶은데 꿈속 자신은 여전히 어른인 블레어가 떠나간 자리만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호의 가죽을 가지고 온 블레어가 웃으며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제 성의이니 이것만큼은 다른 이에게 주기보다 전하께서 가지셨으면 합니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 갔다. 그 때였다.

‘조심하십시오!’

깨질 것같이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선뜩하고 신랄한 경고였다. 평소의 그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을,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 때부터는 꿈인데도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느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누가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꺼내 힘을 주어 터트리는 것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았다.

누워 있는 카일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또르륵 또르륵 흘러내려 베갯잇을 적셨다. 

꿈속의 자신이 난동을 부리며 집기를 깨부수고 있었다. 쨍그랑! 꿈속 자신이 화병을 깨트렸다. 머릿속을 쨍 하고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소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옅은 잠에서 침대에서 몸을 벌컥 일으켰다. 뺨을 타고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관자놀이, 뺨 할 것 없이 얼굴이 모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가슴이 아팠다. 카일이 심장께에 손을 대고 잠옷을 꾹 쥐었다.

“헉, 헉.”

카일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에 울음이 잔뜩 섞였다. 가슴 위에 손바닥을 올리자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어 대고 있었다. 전신에 소름이 달렸다. 카일이 쌕쌕 숨을 내쉬며 이불을 황급하게 더듬거렸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무슨 꿈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블레어가 죽는다. 꿈속 자신의 감정이 그대로 전이되어 남았다. 끝을 알 수 없는 비통과 상실감, 그리고 황망함이 삽시간에 카일을 덮쳤다.

눈물이 계속 뺨을 타고 또르륵 떨어졌다. 너무 깊은 감정이 순식간에 그에게 쏟아져 내렸다. 아직 어린 카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감정이었다.

“허억, 끅, 허엉.”

카일의 입에서 울음이 새어 나왔다. 다친 짐승 같은 울음소리였다. 카일의 울음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채웠다. 흐느끼던 카일이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 당장 블레어를 봐야 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카일은 지금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슬리퍼를 고쳐 신은 카일의 방을 뛰쳐나가 블레어의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호기롭게 그의 방을 뛰쳐나왔지만, 막상 블레어의 방문을 열려니 머뭇거려졌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카일이 드디어 소리 나지 않게 블레어의 방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 안에 블레어의 실루엣이 비쳤다. 카일이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카일이 침대가에 서서 블레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젖살이 남아 있는 뺨은 둥글었지만, 콧대며 반듯한 이마가 도드라졌다.

블레어가 나이가 든다면 꿈속의 그처럼 자랄 것이다. 한참 블레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카일이 손을 천천히 들어 더듬더듬 블레어의 얼굴을 만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카일이 조심스럽게 몸을 말고 꾸물꾸물 블레어의 침대로 올라갔다.

블레어는 잠버릇도 없는지 곱게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숨소리도 거칠지 않아 아주 조용했다. 

설마?

덜컥 겁이 났다. 카일이 부랴부랴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블레어의 얼굴을 확인했다. 깊은 잠을 자고 있는 블레어의 얼굴이 평안했다. 이불을 덮고 있는 그의 가슴팍이 살짝 오르내렸다. 아주 길고 편안한 숨이었다. 블레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카일의 얼굴에 안도가 내려앉았다. 현실의 카일은 살아 있었다.

침입자나 자객인 줄로만 알았지 카일일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블레어의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물론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드러나지 않았다. 카일로서는 그저 블레어가 고단하게 잠을 자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몸을 모로 세워 누운 카일이 조금 더 블레어의 옆에 바짝 붙었다.

카일이 블레어의 잠든-것 같은-얼굴을 바라보았다. 카일의 시선에 제법 익숙한 블레어로서도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눈을 뜨고 반응했다간 서로 간에 더 민망해질 게 뻔했다. 블레어는 꿋꿋이 잠든 척을 하기로 결심하고 잠자는 흉내를 이어 갔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이런 상황에서도 졸음은 몰려왔다. 블레어의 오늘 하루는 꽤 빡빡했으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카일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든 말든, 블레어가 천천히 잠으로 빠져들었다. 블레어의 숨이 점점 더 느려졌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고 블레어를 바라보고 있던 카일의 눈도 점점 감겼다. 깊고 무거운 감정이 느껴지는 꿈을 꾸고 나니 블레어의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만 같았다. 꾸물꾸물 이불 속에서 손을 움직여 블레어의 새끼손가락을 쥔 카일이 그때서야 안심한 듯 몸을 동글게 말고 눈을 감았다.

아침에 먼저 깨어난 것은 카일 쪽이었다. 눈을 뜬 후 자신이 블레어의 가슴팍에 고개를 박고 자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카일이 몸을 훅 튕겨 일어났다. 어제 잔뜩 울어 젖힌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도 눈처럼 붉어진 카일이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깜짝 놀라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머릿속에 남아 있질 않았다. 카일이 허겁지겁 블레어의 방을 나설 때였다.

“으음?”

블레어가 소음에 한쪽 눈을 가늘게 뜨고 깨어났다. 깜짝 놀란 카일이 석고상처럼 몸을 딱 굳힌 채 블레어를 돌아보았다.

“전하?”

[다음 편에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