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1. con tenerezza 우아하게
균형 잡힌 장신의 남자가 황궁의 복도를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이 한 갈래로 묶여 남자의 등 뒤에서 흔들렸다. 늘씬한 체형과 당당한 걸음걸이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었다. 지나가는 남자를 보고 궁 안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남자는 단정하고 위엄 있는 흑색 정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재무대신의 집무실을 지나갈 적,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블레어!”
문을 벌컥 열고 나온 남자는 동그란 외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부스스한 밀짚 색깔 머리는 쥐어뜯었는지 앞머리가 불쑥불쑥 엉망으로 깎인 잔디같이 올라와 있었다. 블레어라고 불린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빙긋 미소를 띠고 익숙한 목소리의 출처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발견한 블레어가 씩 웃었다. 남자를 발견한 블레어의 자주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론!”
블레어가 반갑게 미소 지으며 아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론이 구원자를 바라보듯 블레어를 쳐다봤다.
“블레어, 마침 잘 만났어! 날 보러 온 거지?”
“딱히 너를 만나려고 이곳을 지나가던 것은 아니었는데.”
블레어가 장난기 어린 투로 대답했다.
“알 게 뭐야. 어쨌든 네가 지금 이곳을 지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는 다 똑같아. 지금 폐하의 집무실에 가는 중인 거야?”
블레어의 농담을 가볍게 무시한 아론이 그가 안고 있는 서류 뭉치를 눈짓했다.
“맞아. 폐하께 가는 길이었지. 내가 여길 지나가는 걸 어떻게 알았어?”
“절도 있는 군인의 발걸음 소리는 언제나 듣기 좋은 법이라고.”
아론이 능청을 떨었다.
“황실 복도에 깔린 카펫의 흡음력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던가? 더 도톰한 것으로 바꾸라고 일러야겠군.”
“안 돼. 그러면 내가 할 일이 늘어나잖아? 그냥 지금처럼 내게 일거수일투족을 알리도록 해.”
아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한걸.”
블레어가 빙긋 웃으며 장난기 어린 말투로 대답했다. 웃음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가 복도에 퍼졌다. 울림이 많은 목소리가 듣기 좋게 귀를 간지럽혔다.
“넌 좀 그래도 돼. 그나저나, 폐하를 뵈러 간다고 했지?”
“그렇지.”
블레어가 안고 있는 서류 뭉치를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법 묵직해 보이는 두께였다.
“잘 됐다. 그렇다면 가는 길에 내가 올릴 서류도 좀 같이 가져가 줘. 이것들 전부 폐하께 재가받아야 하는 거거든. 직접 갈 시간이 없네.”
아론이 부리나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집중감사 기간이었다. 여러 부처에서 각종 서류가 잔뜩 올라왔는지, 장정의 양팔 너비보다도 넓은 마호가니 원목 책상 위에는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종이가 아론의 키보다 훨씬 높이 쌓여 있었다. 집무실 안으로 따라 들어온 블레어가 풀풀 날리는 먼지 더미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있어야지.”
“폐하의 응접실은 바로 옆이잖아.”
블레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슬쩍 창문을 열었다. 케케묵은 먼지가 바깥에서 밀려오는 바람에 풀썩 일어나는 게 눈에 보였다. 상쾌한 바람이 집무실의 무거운 공기를 걷어 냈다. 아론이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투덜거렸다.
“멀어, 멀다구! 내가 직접 다녀오면 십오 분이나 사라지는데, 그 시간이면 서류를 한 부 더 읽을 수 있어! 이렇게 읽고 처리해야 할 게 많은데 직접 갈 시간이 어딨겠어?”
“네 보좌관은?”
블레어가 아론이 항상 꼬리처럼 달고 다니는 보좌관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아론을 따라다니던 보좌관이 보이지 않았다.
“걔는 걔대로 심부름을 보낸 지 오래야. 그러고 보니까 이 새끼는 왜 안 오고 있어? 결재받는 대로 곧장 오라고 했더만! 하여튼 뺀질뺀질해 가지고, 도움이 안 돼.”
블레어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엉망인 집무실에 꼭 어울리는 행색. 그 누구도 지금의 추레한 아론을 본다면, 그가 이 크라시아 제국의 재무대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며칠째 철야 중인데?”
블레어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사흘. 오늘로 꼬박 사흘째야.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이 집무실에 딸린 조그마한 방에서 씻고 자고 하면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서류를 붙든 지는 닷새고. 시발, 도대체 이 일은 언제 끝나는 거야? 감사기간이 끝나기는 해? 이 기간은 하루가 48시간 같아. 정말 돌았어, 이 나라는.”
아론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악담을 퍼부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겠어. 일국의 재무대신이라는 자가 입이 너무 험한 것 아니야?”
블레어가 쓰게 웃으며 아론이 넘겨주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블레어가 이미 안고 있는 도톰한 서류 위로 기존 서류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분량의 서류가 풀썩 얹어졌다. 고작 종이 뭉치였지만 무게감이 상당했다.
“네가 내 상황이 돼 봐라. 욕이 나오나, 안 나오나. 전장에서는 나보다 훨씬 더 입이 걸었던 대장군께서 지금 뭐라시는 겁니까. 네가 내 상황이 됐다면 나보다 더 심하게 욕을 했으면 했지 덜하진 않을걸.”
아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론의 몰골은 무척 처참했다. 코끝까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데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고 얼굴은 초췌했다. 관에서 되살아난 괴물 같기도 했다. 블레어가 아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 분기 감사 끝나면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자. 내가 사지.”
“그래. 어차피 너 녹봉 받아서 쓸 데도 없잖아. 내가 거하게 뜯어먹어 줄게. 이럴 때 쓰라고. 호벌론 50년산은 어때?”
아론이 능글맞게 웃으며 잔을 들이켜는 시늉을 했다.
“또 이상한 데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군. 적당히 하도록 해. 밑에 애들 굴리고. 사람을 그렇게 붙여 주는데도 왜 혼자서 그렇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거야. 애들 놔뒀다 얻다 써?”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으니까! 시험을 그렇게 잘 봐서 들어오면 뭐해! 실무에는 써먹을 수 없는 맹탕 중에 맹탕인데! 걔네 정말로 머리 좋은 거 맞아? 못해도 6급 시험을 합격한 재원이라는 애들이 글도 못 써, 맞춤법도 틀려, 공문도 못 봐. 시발, 아카데미에서 도대체 뭘 배워 온 거야? 졸업한 건 맞아? 진지하게 학력 위조인 거 아니야? 우리 집 애완견에게 부탁해도 할 수 있는 것밖에 못 한다고.”
“그 멍청이들을 잘 제련해서 사람 꼴로 만드는 게 네가 해야 할 일이잖아.”
아론이 짜증을 내며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거 하다 보면 국무를 볼 수가 없다고. 잔뼈가 굵은 실무진이 더 필요해.”
“폐하께 말씀드려 볼게. 어쨌든, 서류는 내가 가져다드릴 테니 걱정 말고.”
블레어가 폭발 3초 전인 아론의 어깨를 다시 탁탁 두드렸다. 검을 쥔 손답게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아론을 진정시켰다. 자색 눈동자가 온기를 띠고 부드럽게 아론을 바라보았다.
“……지나치게 흥분했군. 어쨌든 고마워.”
“이틀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고.”
“전혀 위로는 안 되지만 그래야겠지. 이틀 후에 봐. 진탕 술이나 마시자. 사 줘야 돼. 난 그날 술독에 빠져 죽을 테야.”
“호벌론 50년산 술독에 빠져 죽으려면 내 일 년 치 녹봉을 털어야 할 것 같은데. 너무하는 거 아니야?”
“에헤이, 네가 어마어마한 부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데. 엄살은 필요 없어. 술 마실 입과 지갑만 들고 오면 돼. 돈은 내가 써 주지.”
블레어의 엄살은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도무지 나를 십 년이 넘은 친구로 보고 있는 건지, 호구로 보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블레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 호구는 너무했고. 지갑으로 보는 정도로 해 두지. 나의 지갑이 되어 따라와라.”
이러나저러나 아웅다웅하다 보니 반쯤 산송장 같던 아론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 이십 년 가까운 교분에는 잔뜩 피곤에 젖은 재무대신의 마음도 누그러트리는 힘이 있었다.
“어쨌든, 이만 가 보도록 할게. 바쁜 재무대신님의 시간을 더 빼앗을 수는 없지. 수고해.”
“응. 가 보게. 이틀 후에 연통을 보내지.”
“되었어. 번거롭게 뭘. 직접 오면 되지. 퇴궁하는 시간에 맞춰서 집무실로 오도록 할게.”
“그래 주면 나야 좋지. 퇴궁하고 바로 펍으로?”
아론이 입꼬리를 끌어당기고 씩 웃었다. 아론이 다갈색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집무실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그의 미소였다. 블레어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볼게.”
“가게나.”
아론이 올려 준 것까지 합치면 제법 묵직한 서류 더미가 블레어의 팔에 안겨 있었다. 서류 더미의 수십 배가 넘는 장창이며 칼을 휘두르던 그에게는 나비 깃털만큼 가벼운 무게였지만 재가받아야 할 서류라는 중압감이 더해진 탓이었다.
재무대신의 집무실과 황제의 집무실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았다. 좁은 회랑을 지나가면 곧장 황제가 머무르는 거대한 집무실이 나왔다.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블레어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블레어를 알아본 시종이 황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 글라디우스 공작님.”
“폐하를 뵈러 왔네. 안에 계시는가?”
“예. 계십니다.”
“들어간다고 말씀드려 주게.”
그 말을 들은 시종이 우물쭈물하며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선객이 있는가? 바쁘시다면 추후에 와도 상관없는 일이네. 폐하께서 많이 바쁘시다면 가 볼 테니 자네가 이 서류를 전해 드리도록 하게.”
블레어가 눈치 빠르게 시종에게 서류를 넘겼다.
“아닙니다, 공작 각하. 어찌 제게 이런 서류를 주십니까. 안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종이 손사래를 치며 문 앞으로 돌아섰다. 화려하게 양각이 되어 있는 묵직한 문 너머로 시종이 소리를 쳤다.
“폐하, 글라디우스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들라 하라.”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