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계속
베이포트 FC의 선제골로 승부의 균형은 기울어졌지만 스톡포트 시티는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베이포트 FC가 측면을 넓게 벌리고 순간적인 침투를 이용해 역습을 한다는 것을 다비드 페레즈는 알고 있었다. 그는 중앙에 선수들을 집중하고 침착하게 고의적으로 템포를 늦췄다.
베이포트 FC가 측면에서 수비를 뚫으려 해도 이미 정돈된 스톡포트 시티의 수비진을 전부 제칠 수는 없었고, 자연스럽게 공은 더욱 스톡포트 시티 선수들에게서 돌았다.
공을 오래 잡을수록 스톡포트 시티 특유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더욱 살아나며 마이크 반 데부르와 레오나르도 다 실바가 자신들의 장기인 예리한 패스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계략은 후반전에 결국 결실을 맺었다. 레오나르도 다 실바가 좌측면으로 침투하며 수비를 분산시킨 사이, 마이크 반 데부르가 반대편으로 예술적인 패스를 전달했다. 수비의 아주 좁은 틈을 예술적으로 파고든 그 패스는 최전방 공격수인 카를로스 모레노에게 연결되었다.
공을 받은 카를로스 모레노는 단 한 번의 페이크로 조나단 케인을 속였고, 골문 구석으로 완벽하게 슈팅을 꽂아 넣으며 경기를 원점으로 되돌렸다.
‘역시 이렇게 되나…….’
동민은 스톡포트 시티 팬들 쪽으로 달려가 환호하는 스톡포트 시티 선수들을 보면서 표정을 굳혔다. 동민도 스톡포트 시티가 단 한 골로 무너질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다비드 페레즈가 한 골을 내준다고 기가 죽을 사람도 아니고, 그의 선수들 또한 골을 내준 것에 분노하고 더욱 전의를 불태울지언정 경기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하프타임에 선수들에게도 최대한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했던 건데. 그리고 방금 골 장면에서 우리의 실수는 거의 없었어. 최대한 밀집해서 공격을 막아내려 한 건데 스톡포트 시티가 너무나도 손쉽게 뚫어버린 것뿐이지.’
동민은 씁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실점 장면에서 베이포트 FC는 수비진은 물론 앞에서 공격을 이끌어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와 박주현 등, 최전방 공격수인 로날드 조던을 제외한 모두가 아래쪽으로 내려와 스톡포트 시티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레오나르도 다 실바와 마이크 반 데부르라는 두 괴물은 손쉽게 베이포트 FC의 밀집 수비를 무너뜨려 버렸다.
“다들 정신 차려! 한 골 내준 건 아쉽지만 다시 앞서 나가면 돼! 침착하고 여유를 가지고 움직여!”
동민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그라운드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베이포트 FC 선수들에게 향했다. 동민의 말에 선수들은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다시 정신을 차리고 경기에 집중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동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번 시즌 스톡포트 시티를 상대로 무실점으로 경기를 마무리 짓길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경기 흐름이 완전히 스톡포트 시티 쪽으로 넘어 지도 몰라.’
이번 시즌 스톡포트 시티는 무시무시한 공격력도 공격력이지만 한번 기세를 타면 완전히 상대를 끝장낼 정도로 폭발력이 있는 팀이었다. 동점 골을 넣으며 더 이상 조급할 이유가 없어진 스톡포트 시티는 심리적 부담감을 덜고 더욱 매섭게 공격을 몰아칠 가능성이 높았다.
동민의 불안한 예감은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현실이 되었다.
“이런 젠장…….”
동민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선제골로 기세가 오른 스톡포트 시티가 더욱 공격의 고삐를 당겨 역전골을 뽑아낸 것이다. 이번에도 공격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마이크 반 데부르와 레오나르도 다 실바였다.
동점 골에서의 상황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마이크 반 데부르가 우측으로 빠져 들어가며 수비수들의 시선을 붙잡았고, 공을 잡고 있던 레오나르도 다 실바는 전방에서 올리비에 나스리와 몸싸움을 벌이는 카를로스 모레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골을 내주었던 것을 기억하는 베이포트 FC 수비수들은 카를로스 모레노 와 침투하는 마이크 반 데부르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레오나르도 다 실바에게는 공간이 열렸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발로 공을 감아 찼다.
그의 슈팅은 골키퍼가 손을 댈 수 없는 코스로 뚝 떨어져 들어가 결국 골문을 갈랐다.
2 대 1, 이제 경기는 분위기뿐만 아니라 스코어까지 완전히 스톡포트 시티에게 넘어갔다.
스톡포트 시티의 역전 골 이후, 베이포트 FC도 결국 더욱 공격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15분 정도였고 연장전이라도 바라보기 위해선 반드시 골을 넣어야만 했다. 2 대 1의 패배나 6 대 1의 패배나 그들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승리하면 우승컵을 손에 쥘 수 있고, 패배하면 우승의 문턱에 주저앉아 상대가 우승컵을 드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동민도 파격적이라 할 만한 방법을 선택했다. 좌측 풀백인 닉 베손을 에두아르도 산체스로 교체하며 측면 공격을 강화했고, 중앙 미드필더인 자크 피레스를 빼고 타깃형 스트라이커인 에딘 페트로비치를 투입하며 최전방의 무게감을 더했다. 그리고 마지막 교체 카드로 크리스 러셀을 빼고 필립 포덴을 투입하며 중원에서의 압박보다는 단 한 번이라도 위협적인 패스가 이어지길 바랐다. 수비와 중원에서의 영향력이 더 적어진다고 해도 그만큼 골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지만 방법이 없어!’
동민은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이포트 FC가 바라지 않는, 중원에서 경기를 움직이는 게임을 막기 위해 세 명의 미드필더로 중원을 구성했었지만 이제는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에딘 페트로비치의 투입은 공격적인 선택이지만 그만큼 스톡포트 시티가 원하는 대로 중원의 영향력을 넘겨주는 선택이었다. 베이포트 FC의 입장에서는 창을 하나 더 쥐기 위해서 방패를 버리는 선택과도 같았다.
‘수비에서의 부담이 더 늘어나지만 잘해주길 바라는 수밖에.’
동민은 긴장으로 흥건해진 손을 쥐고 전광판에 남은 시간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간은 33분, 정규 시간이 끝날 때까진 12분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 42분, 스톡포트 시티의 주장인 빈센트 윌리엄스가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크로스를 차단하려다 발에 공이 잘못 맞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의 발에 맞은 공은 기묘한 궤적을 그리며 스톡포트 시티의 골문을 향했고, 제임스 하트의 손끝을 스치며 골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딘 페트로비치의 투입 후 공격 기회마다 집요하게 측면에서의 크로스를 시도하던 베이포트 FC가 만들어낸 스톡포트 시티의 실책이었
골이 선언되자마자 베이포트 FC 선수들은 모여서 동점 골을 기뻐하지도, 환호를 내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곧바로 공을 들고 하프라인을 향했다. 만약 연장전에 들어선다면 베이포트 FC는 지금까지의 놀라운 막판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패배의 쓴 맛을 볼 가능성이 높았다. 베이포트 FC가 교체카드를 세 장 모두 사용하고 동점 골을 위해 체력적인 부담이 큰 시간을 보낸 반면, 스톡포트 시티는 비교적 체력을 온존한 탓이었다.
박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를 비롯한 몇몇 선수들은 이미 체력이 바닥난 것이 그대로 보였지만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다. 만일 연장전으로 가게 된다면 전반전부터 뛰었던 선수들은 체력 저하로 제대로 경기를 뛰지 못할지 몰랐다.
‘할 수 있어. 선수들도, 나도, 그리고 다른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도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해. 제아무리 스톡포트 시티가 구단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노린다고 해도 절실함에서는 우리가 절대 밀리지 않아. 마지막까지 해낼 수 있어.’
동민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를 비롯한 벤치에 있는 선수들과 코치들 또한 단 한순간도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긴장감에 가슴을 졸이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방금 터진 골로 경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그 누구도 이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정규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대기심은 시계를 높이 들어 올렸고, 그곳에는 4 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추가시간은 4분이라는 뜻이었다.
단 한 골, 경기가 끝나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그 한 골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스톡포트 시티는 베이포트 FC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몇몇 선수들의 체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것을 눈치챈 다비드 페레즈가 선수들에게 시간을 끌 것을 지시했다. 연장전에 가기만 하면 체력이 남아 있는 스톡포트 시티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 동안 경기는 모두가 공격에 나서는 베이포트 FC와 안전하게 시간을 끌려는 스톡포트 시티의 대결이 되었다.
추가시간도 끝나가는 가운데 주현의 돌파를 마이크 반 데부르가 태클로 끊어낸 것이 깊어져 파울이 선언되었다. 프리킥의 위치는 페널티박스 좌측, 베이포트 FC로서는 마지막 기회였다.
베이포트 FC는 골키퍼인 토마스 스톤스까지도 공격에 가담하며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고, 스톡포트 시티는 모두가 수비에 힘쓰며 이대로 연장전을 노리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프리킥 위치에서 주현은 심호흡을 하며 동료들을 보았다. 모두들 이 마지막 기회를 잡겠노라고 불타는 듯한 눈빛을 하고 그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동료들의 표정을 보면서 주현은 도움닫기를 위해 뒤로 물러섰다.
다리는 떨리고, 피로로 인해 심호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고 싶다는 마음만큼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는 달려가 공을 찼다. 그의 발끝을 떠난 공은 누구도 아닌 골키퍼인 토마스 스톤스의 머리를 향했다. 토마스 스톤스는 날아오는 크로스에 머리를 맞추는 데 성공했고, 공은 골문으로 향했다.
저녁이 됨에 따라 8월 중순의 햇빛도 조금씩 잦아들고 브리큰돈 스타디움에는 황혼의 햇빛만이 남았다. 그 잦아드는 빛 아래 베이포트 FC의 팬들은 리그 첫 경기의 승리를 바라며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베이포트 FC의 팬들은 새 시즌 시작부터 열정적이군요. 역시 그의 귀환 때문일까요?”
스포츠 방송사인 그라운드 스포츠의 캐스터 아담 맥마흔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베이포트 FC 팬들을 보여 말했다. 그의 말에 해설 위원인 리안 스콧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베이포트 FC의 입장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감독이 약속대로 무려 3년 만에 돌아온 셈이니까요. 그의 공백 동안 은퇴했던 앨런 휴즈 감독이 돌아와 팀을 이끌며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역시 그 빈자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 본인은 한국 국가 대표를 맡으며 월드컵에서 4위를 거두는 등 호성적을 거뒀지만, 역시 본인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는 브리큰돈 스타디움의 벤치라며 돌아왔으니까요. 오, 카메라가 샐리 강을 비추는군요. 얼마 전 결혼 소식 때는 베이포트 FC 팬들 사이에서 꽤 큰 이슈가 됐었죠.”
“그가 돌아온 이유가 그녀 때문이라는 말이 꽤나 설득력을 얻을 정도였으니까요.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베이포트 FC의 팬들은 그들의 영웅이 돌아온 것에 행복할 겁니다.”
그들의 말처럼 베이포트 FC의 팬들은 한 사람의 이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의 주인공은 벤치에 앉아 경기가 시작되려는 그라운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익숙한 모습에 아담 맥마흔은 말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연소로 감독직을 맡았던, 그리고 최연소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사람이 그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강동민 감독이 돌아온 베이포트 FC가 첫 경기부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군요.”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심판의 휘슬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동민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우승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또다시 베이포트 FC의 감독으로서, 그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아, 어떻게 나올까.”
전과 같은 목소리로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