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꿈까지 남은 한 걸음 (268/270)
  • 꿈까지 남은 한 걸음

    베이포트 FC와 스톡포트 시티의 결승 진출은 축구팬들, 특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팬들에게는 대단한 소식이었다. 예전에 비해 유럽 대항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던 프리미어리그의 팀들이었지만, 이번에는 12년 만에 잉글랜드 팀끼리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민은 아시아인 감독으로서 최초로, 그리고 최연소 감독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오르게 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이 더더욱 집중되고 있었다. 12년 만의 잉글랜드 팀끼리의 결승전, 선수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린 감독과 이미 다른 팀에서 6관왕을 이룩하며 세계 최고가 된 감독의 대결은 분명 팬들로 하여금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런 상황은 생각 못 했는데. 안 그런가요? 물론 스톡포트 시티는 시즌 초반부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릴 만한 팀이라고 평가받았지만요.”

    동민은 웃으며 말했다.

    결승 진출을 확정 지은 그의 목소리는 차분함과 자신감이 비치고 있었다.

    “글쎄요. 그렇게 평가받는 것과 실제로 결승까지 올라가는 건 다르니까요. 저도 당신과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들고 다투게 될 줄은 몰랐는걸요.”

    동민의 말에 다비드 페레즈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선수들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거둔 성과를 단순히 시즌 초반부터 우승을 노릴 만한 팀이라고 평가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고는 웃음기를 지우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단순히 이런 칭찬 같은 소리만 하려고 연락한 건 아니잖아요. 아무리 시즌이 끝나간다고 해도 가장 큰 경기가 서로 남아 있는걸요. 안 그래요?”

    다비드 페레즈의 말은 친절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한없이 차가웠다. 작년에 동민을 위로하고 슬럼프의 극복을 돕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에게 결승전이 끝날 때까지 동민은 재능 있는 젊은 감독이나 흥미를 끄는 친구가 아닌,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오늘 다비드 페레즈와 동민이 함께 자리한 이유는 결승 진출이 확정되자마자 동민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한 탓이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어도 동민이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는, 얼마 후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상대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신기했다. 그 때문에 이미 우승 경쟁이 끝난 리그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던 다비드 페레즈라고 해도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비드 페레즈의 차가운 말에도 동민은 주눅 드는 모습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그건 그렇죠. 특히 베이포트 FC는 우승이 확정된 스톡포트 시티와는 달리 마지막까지 4위권 경쟁을 해야 하니까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전까지 리그도 신경 써야 하는걸요.”

    동민의 말에 다비드 페레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승전을 앞두고 자신을 상대로 심리전을 거는 동민의 모습은 지난 시즌 슬럼프에 빠져 고민하던 경험 부족한 감독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경기를 이기겠단 열망이 보이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마르코 알베스처럼 숙적이라고 부를 만한 감독의 모습이었다.

    다비드 페레즈는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조금 전보다 더욱 차가운 눈으로 동민을 바라보았고, 동민은 그런 다비드 페레즈의 표정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사실 오늘 만나자고 했던 이유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지난 시즌에 신세 진 게 있어서 말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동민은 그의 말에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다비드 페레즈의 모습을 보면서 이번에야말로 씩 웃었다.

    “지난번엔 고마웠어요. 그리고 미리 사과할게요. 결승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인 당신과 스톡포트 시티를 꺾고 우리가 빅 이어를 들어 올릴 테니까요.”

    동민이 베이포트 FC를 맡은 이후 베이포트 FC와 스톡포트 시티의 맞대결 결과는 지금까지 4전 1승 3패로 베이포트 FC가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민은 이번 결승전에서만큼은 자신들이 이길 거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동민을 보고 다비드 페레즈는 대답했다.

    “자신감은 인정하겠지만 말은 조심하는 게 좋아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두 사람은 그렇게 웃는 얼굴로 핏대를 세우고는 각자의 길로 떠났다. 다음번에 만나는 곳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리는 바그너 아레나이며, 우승컵을 두고 전력으로 맞붙을 때라는 것을 두 사람 모두 확실하게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무섭긴 무섭지…….’

    동민은 어제 다비드 페레즈와 나누었던 말을 기억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이끄는 스톡포트 시티는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는 팀으로, 이미 시즌이 다 끝나기도 전에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리그 컵을 우승하며 2관왕을 확정 지은 상태였다. 만일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게 된다면 그들은 스톡포트 시티의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에 세 우승컵을 품에 넣게 되는 것이다.

    ‘마이크 반 데부르와 레오나르도 다 실바, 이 두 플레이 메이커는 물론 다른 선수들도 역대 급이라고 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어. VFB 뮌헨조차도 총합 스코어 5대 2로 무너졌으니까. 객관적으로 보면 승산이 높을 리가 없지.’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동민은 기죽지 않았다.

    지금껏 만났던 상대들 중 객관적인 전력에서 베이포트 FC에게 밀리는 팀은 없었다. 조별 리그에서도 죽음의 조의 희생자가 될 최약체라는 것이 사람들의 평가였고, 토너먼트에 들어서서는 바르셀로나 CF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FC 에르푸르트라는 강팀들을 연속해서 만났다.

    그런 끔찍할 정도의 대진에서도 베이포트 FC와 동민은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며 올라왔고, 그 결과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한쪽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지금껏 그래왔듯 상대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전술로 경기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결승까지 그들이 오를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자 결승전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뭐, 다비드 페레즈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한창 고민하고 대책을 짜고 있겠지만.”

    동민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처음 프리미어리그 무대에서 다비드 페레즈와 맞붙었을 때엔 승격 팀과 우승 경쟁 팀의 대결이었다. 그 경기에서 베이포트 FC는 승격 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패배했다.

    그다음 맞붙었을 때엔 동민은 지난 패배를 설욕하겠다며 이를 갈았고 그 결과 승리할 수 있었다.

    이번 시즌의 두 경기는 베이포트 FC가 모두 챔피언스 리그에 더 초점을 맞추었고 스톡포트 시티가 리그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비교적 싱겁게 두 번 모두 패배했지만, 동민은 지난 시즌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동민은 반드시 승리할 것을 다짐했다.

    “응?”

    동민은 울리는 전화기를 꺼내 액정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또인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받자 들어본 적 있는 걸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 강동민 감독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소식에 한국도 지금 들썩들썩하던걸요.

    전화를 건 이는 저번에도 연락을 했던 대한축구협회의 부회장인 이영현이었다. 동민은 그의 말에 준결승전은 이미 며칠 전이었다며 툭 말을 내뱉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한국에서도 이야기가 나오는 줄은 잘 모르고 있었네요.”

    -어휴, 당연히 이야기가 나오죠.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연소 감독이자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라간 아시아인 감독이지 않습니까?

    동민의 말에 그는 아부를 하듯 떠들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동민이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 찰나, 그는 말을 이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 뭐하지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까지 경험했던 젊은 감독이 국가 대표 팀을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꽤나 나오고 있어요. 게다가 기자들이 어디서 냄새를 맡았는지 강동민 감독님하고 국가 대표 감독직을 가지고 이야기 중이라는 사실도 슬슬 떠들어대지 뭡니까.

    동민은 그 말을 듣고 코웃음을 칠 뻔한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런 여론에 부채질을 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기자들에게 정보를 흘린 것은 분명 축구협회 측에서 했을 확률이 높았다. 시즌이 끝날 때까지 여유 있게 결정해도 된다고 이야기했으면서 챔피언스 리그에 결승까지 올라가니 점점 더 무시할 수 없어진 탓일지도 몰랐다.

    동민이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자 이영현은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좀 해보셨습니까? 국가 대표 팀 감독이란 자리에 대해서? 원래 더 오랫동안 시간을 드리고 싶었는데 여론이 점점 더 거세져서요.

    귓가를 파고드는 듯한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며 동민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국가 대 표팀 감독 자리는 달콤한 꾐에 불과했다. 잘되면 영광은 축구협회에게, 자칫 좋지 않은 결과를 냈다간 그 책임은 모두 동민이 뒤집어쓰는 불공평한 계약은 그들에겐 나쁠 점이 없었다. 마치 달콤한 냄새로 벌레를 끌어들이는 식충식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동민은 이번에야말로 마음속으로 지난번에 내지 못했던 결론을 내고 입을 열었다.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한다면 국가 대표 팀 자리를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소속 팀에서 승낙만 해준다면 시즌이 끝나는 즉시 부임할 수 있을 정도로요.”

    동민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식충식물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겠다는 무모한 생각을 확정 지은 것이다.

    “형 미쳤어?”

    동민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주현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영현과의 통화를 마치고 만약 국가 대표 팀에 부임하게 된다면 소속 팀 감독과 선수가 아닌, 국가 대표 선수와 그 감독으로 계속 함께하게 될 주현에게 털어놓았지만 그의 반응은 격렬했다.

    “안 할 거라며! 내가 저번에 혹시나 하고 물어봤을 때 그럴 생각 없다며! 그 독이 든 성배를 좋다고 처마시는 인간이 어디 있어!”

    걱정과 분노를 한 번에 드러내는 그를 보면서 동민은 대답했다.

    “네 말대로 독이 든 성배도 맞고, 잘못하면 내가 전부 뒤집어쓰는 것도 알아.”

    “그럼 대체 그딴 걸 왜 수락했냐고! 그것도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면 수락하겠다는 조건까지 달면서. 뭐야, 그거? 우승 못 할 것 같아서 한 소리야?”

    얼굴까지 붉어지면서 열변을 토하는 주현에게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결승전은 반드시 이길 거야. 그리고 내가 수락한 이유는 하나야. 예전에는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의 나라면, 그리고 우승까지 경험한 나라면 그 독이 든 성배를 쥘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내가 거절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을 테고, 그 사람이 희생양이 될 거 아냐? 그러느니 내가 하고 싶어. 독이 든 성배든 뭐든 내가 잘하면 다 괜찮은 거잖아.”

    동민의 말에 주현은 할 말을 잃었다.

    “…미쳤어, 진짜.”

    주현은 힘없이 그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도, 그리고 그 이후의 국가 대표 팀 감독도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그러려면 네 활약도 당연히 필요하고. 그러니까 잘해달라고. 이미 결정한 일이니까.”

    결국 주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