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를 뒤집어라
“이걸로 후반전에는 좀 편해지려나. 아니면 이 상황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까.”
위르겐 뮐러는 전반전에만 세 골을 몰아치는 대단한 경기력을 보여주고서도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화끈한 경기 스타일을 보여주면서도 세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를 장점으로 삼는 그답게 베이포트 FC가 이대로 가만히 무너지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었다.
‘생각한 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안심하긴 일러. 강동민과 베이포트 FC는 하프타임에 팀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후반전에 전혀 다른 경기력을 보여준 적이 있으니까.’
그는 베이포트 FC가 AC 로마의 홈에서 전반전에 1 대 0으로 질질 끌려가던 경기를 후반전이 되어 2 대 1로 뒤집었던 것을 기억했다. 전반전만 해도 선수들 모두 챔피언스리그라는 커다란 무대에 적응하지 못한 듯 뻣뻣하게 굳어 있었지만, 하프타임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경기를 뒤집었다.
베이포트 FC의 그런 모습은 위르겐 뮐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지금의 3 대 0의 결과에도 안심하지 못하도록 했다. 전반전에 세 골을 넣으며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었지만 후반전에 상대가 어떻게 반격을 해올지 모르는 이상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우리가 분명 유리한 것은 맞지만 그 점수 차에 안주하기보다는 더 확실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해.’
위르겐 뮐러는 그렇게 생각하며 날카로운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베이포트 FC의 라커 룸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상대에게 전반전에만 세 골을 내주면서 무너진 것은 동민이 베이포트 FC를 맡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FC 마드리드에게 원정과 홈에서 각각 3 대 0, 3 대 1로 대패를 했을 때에 허용했던 골을 고작 45분 만에 허용했다는 사실은 선수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상대에 맞는 전술을 들고 나와 승리를 거두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반대로 상대에게 완벽히 파악당했다는 사실 또한 충격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껏 베이포트 FC가 패배하는 경우는 실수나 개인 능력의 너무나도 큰 차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오늘은 완전히 그들이 어떤 식으로 경기에 나설지 FC 에르푸르트 측에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었다. 전반전의 대량 실점과 상대에게 파악당했다는 두 충격적인 사실은 선수들과 동민에게 침묵을 가져왔다.
그런 충격으로 가득한 라커 룸에서 동민은 입을 열었다.
“…전반전의 무기력한 패배는 내 탓이에요. 그렇지만 당장 사과는 할 수 없습니다.”
동민은 졸전이라고 부를만한 전반전을 치른 선수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술이 위르겐 뮐러에게 완벽하게 파악당하고 역으로 이용당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수들의 잘못이 아닌 동민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사과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가라앉아만 있던 선수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껏 그들이 알던 동민은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해야 할 것은 이렇게까지 우릴 밀어붙인 FC 에르푸르트에게 한 방 먹여주는 거지, 전반전의 처참했던 경기력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니까요. 내 실패에 대한 이야기나 전반전의 경기력에 대한 이야기는 경기가 끝나고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상황을 바꾸는 것에만 집중해줘요.”
동민은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지금껏 베이포트 FC에서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그리고 그 전에 전술 코치와 비디오분석관, 전술 담당관을 지내면서도 이런 식으로 전반전에 일방적으로 밀린 경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동민은 그런 상황에 큰 충격을 받으면서도 이대로 경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손을 놓는 순간 선수들은 완전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동민은 그 생각만을 계속 되뇌면서 후반전의 전술을 설명했다.
“전술의 전반적인 수정을 가하겠습니다. 먼저 수비 라인에서는…….”
동민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어 있던 베이포트 FC의 라커 룸에 울려 퍼졌다.
‘역시 긴장을 풀지 않는 게 정답이었어!’
위르겐 뮐러는 후반전이 시작되고 5분도 되지 않아 자신의 조심성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 소리가 관객들에게서 채 잊혀지기도 전에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만회 골이 터진 것이다.
그들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역습을 노리던 전반전의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맞불 작전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파격적인 동민의 교체 카드에서 시작되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동민은 골키퍼인 토마스 스톤스, 수비형 미드필더인 이안 페트로프, 최전방 공격수인 에딘 페트로비치를 빼고 폴 맥마흔과 아르센 디아라, 그리고 박주현을 투입했다. 교체 카드 세 장을 한꺼번에 다 써버린 동민의 무모해 보이는 선택은 베이포트 FC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예전 경기에서 보았던 후방에서부터 패스를 돌려가며 상대를 깎아나가는 것도, 긴 패스 한 방으로 골을 노리는 것도 아니야. 어떻게 보면 우리의 움직임과도 비슷해.’
베이포트 FC는 FC 에르푸르트처럼 강하게 최전방부터 압박을 하고, 공격 시에는 FC 에르푸르트 선수들이 미처 대비하기 전에 최대한 빠른 템포를 유지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반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이끄는 선수는 부상에서 돌아온 박주현이었다.
한 달 정도를 햄스트링 부상으로 결장했던 그는 공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뛰어난 모습으로 베이포트 FC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순식간에 미드필드 지역에서 좌우를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수비 틈 사이로 파고들며 FC 에르푸르트를 혼란에 빠뜨렸고, 반 박자 빠른 패스로 동료들의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주현의 출전은 전반전 동안 수비의 짐 때문에 붙잡혀 있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날뛰는 결과를 낳았다. 중원과 전방을 오고가며 공간을 만드는 동료가 생기자 그의 장기인 드리블을 할 공간이 생겼다. 그의 만회골 또한 주현이 수비수 두 명을 끌고 골문 앞으로 쇄도하면서 슈팅을 할 수 있게 공간을 열어준 덕이었다.
‘역시 저 13번 선수가 골칫거리였어. 들어오자마자 베이포트 FC 공격진들이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움직이고 있어.’
위르겐 뮐러는 눈을 찌푸리며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부상으로 인해 벤치에는 앉아 있어도 경기에 출전할 확률은 적다고 생각했던 주현이지만, 경기에 나서자 동민의 전술 교체와 더불어 동료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었다. 전반전동안 일방적으로 당하던 베이포트 FC가 빼어 든 반격의 칼이 본격적으로 그를 겨누었다.
그러나 위르겐 뮐러 또한 그에 대한 대비를 해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경기에 나설 확률이 적다고는 해도 베이포트 FC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인 주현에 대한 준비를 안 해둘 리 없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위르겐 뮐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동민이 있는 상대 팀 벤치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지만 위르겐 뮐러는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90분의 경기 시간이 모두 끝난 후 전광판에 떠있는 스코어는 3 대 2, 베이포트 FC는 결국 전반전 동안 내준 세 골을 따라잡지 못했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첫 번째 골과 후반 37분 코너킥에서 나온 조나단 케인의 헤딩 골로 3 대 2까지 따라붙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다. 늦은 시간에 나온 조나단 케인의 골은 베이포트 FC 선수들이 더욱 강하게 공격에 나설 용기를 주었지만 남은 시간은 이미 너무 적었던 탓이다.
하지만 위르겐 뮐러는 경기의 결과보다도 그들이 두 골이나 넣으며 악착같이 따라붙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반전에만 세 골이 터지면서 분명히 우리가 이기는 경기였다. 거기에 그 세 골만 믿고 주요 선수들을 교체하면서 휴식을 취하게 한 것도 아니고, 마지막까지 우리 경기를 펼치려고 했어. 선수들도 방심을 한 것도 아니야. 그런데…….’
전반전이 완벽한 FC 에르푸르트의 페이스였다면, 후반전은 반대로 베이포트 FC의 반격이 뚜렷한 시간이었다.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골로 스타트를 끊은 베이포트 FC는 FC 에르푸르트가 강하게 압박하는 것을 풀어내며 공격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위르겐 뮐러가 중앙 미드필더를 더 투입하며 주현이 침투할 공간을 제한했지만 그 방법 또한 큰 효과가 없었다.
동민은 주현을 좌측으로 더 치우쳐 움직이게 만들고, 야야 둠베흐와 닉 베손을 중원 싸움에 가담시키면서 좁은 공간에서 수적 우위를 지켜냈다. 그 덕분에 베이포트 FC는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조나단 케인의 골로 이어진 코너킥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두 감독의 치열한 싸움은 후반전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위르겐 뮐러에게 후반전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경기였다.
이른 시간에 터진 세 골로 분위기는 완벽히 FC 에르푸르트에게 넘어와 있었다. 자신은 자만심을 경계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 선수들을 추스르고 강한 반격을 준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상대의 공격이 조금 더 날카로웠다면, 혹은 두 번째 골이 조금 더 일찍 나왔다면, 아니면 상대에게 조금 더 운이 따랐다면 도리어 역전까지도 나왔을지 몰랐다.
‘혹시나 AC 로마전처럼 뒷심을 발휘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베이포트 FC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한 팀이었다.’
경기는 FC 에르푸르트의 승리로 끝났지만 위르겐 뮐러는 상대의 맹공과 뒷심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뒤에 있을 2차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안 됐나…….’
동민은 심판의 휘슬이 불리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후반전의 모습을 보면 어쩌면 동점이나 역전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정신적으로도 무너졌던 전반전과는 달리 후반전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았다. 하프타임에 했던 이야기가 효과가 있었는지 선수들은 지난 바르셀로나 CF전이나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전처럼 절실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마지막까지 따라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뛰었다.
그리고 그 결과 3 대 2라는 패배를 당했지만 홈에서 열리는 2차전을 생각하면 3 대 0과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 스코어를 얻었다.
‘그래도 이걸로 오히려 결승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2차전에서 1 대 0으로라도 이긴다면 우리가 진출할 수 있어.’
그러나 후반전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하프타임 때 라커 룸에 가득했던 답답한 침묵과 절망감이 지금은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에서 3골을 내주고도 2골을 따라잡으며 강한 의지를 보인 것은 선수들과 팀에게 앞으로를 위한 큰 본보기가 된 것이기도 했다.
‘남은 건 2차전이다. 할 수 있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먼저 위르겐 뮐러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다. 하프타임 때와는 정반대로 위르겐 뮐러는 믿을 수 없다는 충격과 자책감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고, 동민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비쳐 보였다.
두 감독은 90분을 둘로 나누어 서로 자신들의 능력을 선보이며 곧 있을 2차전에 대한 기대를 더욱 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