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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결승전의 상대, 그리고 동민의 고민 (263/270)
  • 준결승전의 상대, 그리고 동민의 고민

    “미안해요. 그렇지만 지금은 말할 수가 없는 일이라서요.”

    샐리는 동민의 말에 아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한, 동민은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숨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이야기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더 이상 파고들 이유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나중에 정리가 된다면 이야기해 줘요.”

    샐리는 아주 약간, 아쉽다는 눈빛을 남기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동민은 가슴 한 구석을 콕콕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고민이 그녀에게 한눈에 들킬 정도로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샐리는 순수하게 그를 걱정해 주고 있는데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는 약간의 죄책감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국가 대표 팀에서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동민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침에 왔던 전화는 대한 축구협회에서 온 것이었다. 스스로를 대한축구협회의 부회장인 이영현이라고 밝힌 그는 당황하는 동민에게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이번 시즌이 끝나면 대한민국 대표 팀을 이끌고 월드컵을 준비해 달라니…….’

    그가 말한 것은 한 가지였다. 이번 여름부터 지금 감독 대행인 정경수 수석 코치가 이끌고 있는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감독이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 협회에서는 동민을 차기 국가 대표 팀 감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라면 충분히 대한민국을 이끌고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라고 설득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동민은 저번에 주현이 A매치를 다녀와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갑자기 국가 대표 팀 이야기를 꺼내며 혹시 들은 이야기가 있냐고 묻던 주현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대표 팀 내에서도 이런 소문이 돌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주현이가 먼저 그 이야기를 듣고 나한테 말 했던 거고.’

    동민은 이영현의 제안을 듣자마자 거절하려 했다.

    협회와는 조금의 연관도 없는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면 어떤 상황을 맞을지는 안 봐도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현이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정색을 하면서 물어보던 것을 생각하면 아마 대표 팀의 상황이 굉장히 좋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성남 페가수스 시절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물러난 것을 기억하면, 자신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어떤 상황에 처할지도 예상 가능했다. 만약 그가 대표 팀을 이끌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거나,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지금껏 그를 칭찬하고 원하던 것을 까맣게 잊고 그를 비난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를 감독으로 선택한 협회 또한 그런 상황에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이 리스크 노 리턴, 그에게 대한민국 국가 대표 팀의 감독직은 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을 말하려하던 동민의 입은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머리로 생각하면 곧바로 거절하는 것이 당연한 제의였지만 그의 입에서는 곧바로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동민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럽게 지금은 팀에 집중하고 싶다고 대답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 동민의 대답에 영현은 웃음을 지으며 지금 당장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니 시간을 두고 이번 시즌이 끝난 후에 결정해 줬으면 좋겠단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거절해야 하는 제의인데…….’

    동민은 아직도 자신이 어째서 그때 곧바로 거절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저 거절의 말이 곧바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아직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

    그 점이 아직도 동민의 마음속을 괴롭히는 주된 이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이라고는 없는 제의를 받아 들고 끙끙거리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믿고 최대한의 지원을 해주는 구단도, 그의 밑에서 자신들의 기량을 최대한 펼치며 동민이 원하는 축구를 실현시키고 있는 선수들도, 그리고 그에 대한 큰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팬들도 모두 국가 대표 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자신의 입에서 곧바로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동민은 스스로도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국가 대표 팀, 국가 대표 팀이라……’

    기묘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를 현실로 끌고 나온 것은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 상대의 추첨이었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선수가 나와 추첨을 시작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베이포트 FC의 선수들과 구단 직원들은 긴장감에 사로잡혔다. 그들이 결승전에 오르기 위해서 꺾어야만 하는 상대가 이제 결정되는 것이다.

    그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는 생각에 잠겼던 동민까지도 현실로 돌아오도록 만들었다.

    ‘그래. 어찌 됐든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은 준결승전의 상대가 어디가 되는지, 그리고 그 팀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생각하는 게 먼저야. 당장 중요한 건 그거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고민은 일단 접어두었다. 지금 그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당장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이었지 여름까지 결정할 수 있는 국가 대표 팀이 아니었다.

    동민은 아까와는 다른 떨리는 기분으로 추첨을 지켜보았고, 4개의 팀 중 첫 번째 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결승의 첫 팀은… 스톡포트 시티입니다! 잉글랜드의 챔피언이 될 것이 유력해 보이는 팀이 먼저 자리를 잡았습니다!

    동민은 그 모습을 보면서 베이포트 FC와 스톡포트 시티가 준결승전에서 맞붙는 것을 상상했다. 원정 거리라는 면에서는 가장 최적의 상대지만 선수층으로 보나, 감독의 역량으로 보나 껄끄러웠다. 게다가 가장 동민의 입장에서 골치 아픈 것은 다비드 페레즈와의 서로 물고 물리는 수 싸움이었다.

    ‘거기다가 리그 우승컵도 90% 이상 스톡포트 시티 쪽으로 기울어서 리그 경기에 로테이션을 돌리고 체력을 비축할 수도 있고, 그에 반해서 우리 팀은 4위권 경쟁을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싸워야 하니까 불리해.’

    어떤 팀을 만나도 쉬운 경기는 없겠지만 동민으로서는 준결승에서 스톡포트 시티와 다비드 페레즈는 확실히 껄끄러운 상대였다. 특히 상대에 따라서 전술을 바꾸며 최적의 방법으로 맞서는 동민의 방식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그의 전술 변화까지 따라오는 다비드 페레즈는 결승에 오르기 위해선 가능하면 만나지 않는 편이 안심이 되는 상대였다.

    물론 그런 상대를 꺾을 때가 더 벅차고 기분이 좋다는 것은 동민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쉬운 길을 택하고 싶은 것이 동민의 속마음이었다.

    그런 동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면 속에서는 스톡포트 시티와 맞붙는 두 번째 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스톡포트 시티의 상대는… VFB 뮌헨입니다! 분데스리가의 챔피언이 잉글랜드의 챔피언으로 유력한 팀과 맞붙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베이포트 FC의 몇몇 선수들 사이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스톡포트 시티와 VFB 뮌헨이 맞붙는다면 그들이 만날 상대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다음으로 맞붙는 팀은 분데스리가의 강팀이자 챔피언스 리그의 단골손님인 FC 에르푸르트!

    뒤이어 마지막 팀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화면에 펼쳐졌다.

    -그리고 FC 에르푸르트의 상대는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에서 최대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팀인 베이포트 FC입니다! 이것으로 분데스리가의 두 팀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두 팀이 각자 리그의 자존심을 걸고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은 새삼 자신들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최고의 네 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느꼈고, 동민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동민과 선수들은 그렇게 각자 다르게 준결승전 상대인 FC 에르푸르트를 맞이했다.

    ‘FC 에르푸르트라……’

    동민은 볼을 긁적이면서 스태프들에게 부탁해 받은 자료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었다.

    FC 에르푸르트에 대해서는 준결승전의 상대로 정해지기 전부터 어느 정도 조사해 둔 것이 있었다. 경기에 나서는 필드 플레이어들 모두가 많은 활동량을 가지고 상대를 최후방부터 강하게 압박하며 자신의 진영이 아니라 상대의 진영에서 역습을 시작하는 팀, 그것이 FC 에르푸르트였다.

    그들은 젊은 선수단의 혈기왕성함과 체력을 최대한 이용하며 상대를 눌렀고, 후방 빌드 업을 방해해서 공격을 가장 앞쪽에서 차단시킴과 동시에 실수를 유발해 역습으로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런 방식을 만든 사람은 바로 현재 FC 에르푸르트의 감독인 위르겐 묄러였다.

    ‘팀을 맡은 지 2년 만에 분데스리가 2위를 차지하면서 챔피언스 리그 출전, 그리고 6년 차인 지금까지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 계속해서 얼굴을 비추고 지지난 시즌엔 결승까지 오르며 FC 에르푸르트를 강팀으로 만든 사람. 역시 이 사람도 보통은 아니야.’

    동민은 FC 에르푸르트의 경기를 보면서 위르겐 뮐러라는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느끼고 있었다. 위르겐 뮐러는 다비드 페레즈의 축구는 점유율과 패스를 중심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오케스트라와 같다면, 자신의 축구는 헤비메탈과도 같다며 웃으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그 말처럼 그가 이끄는 FC 에르푸르트는 강한 압박, 빠른 속도로 대표되는 위르겐 뮐러만의 색채를 강하게 뽐내며 상대를 무너뜨리는 팀이었다.

    ‘이런 팀을 상대로 어떤 방식을 들고 나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저들을 공략할 것인가.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야.’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위로 기지개를 켰다. 상대를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않고 같은 자세로 영상들을 본 탓에 몸이 굳은 탓이었다. 그런 그의 입가는 굳은 몸과는 다르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상대가 강한 만큼 그런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하는 동민과 베이포트 FC 또한 강해져야 했다. 준결승 1차전이 벌어지는 5월 초까지 남은 시간은 약 2주, 동민은 그때까지 위르겐 뮐러와 FC 에르푸르트를 이길 방법을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긴장과 동시에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준결승전까지 남은 시간은 충분해. 그리고 이 압박감은 상대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우리한테 불리한 점은 없으니까.”

    동민은 일부터 입 밖으로 말을 꺼내며 스스로의 기운을 북돋았다.

    국가 대표 팀의 일로 고민하기도 했지만 준결승전 상대가 정해진 이상 그가 할 일은 하나였다.

    ‘반드시 이긴다. 우승컵을 들어 올리자는 말이 허풍이 되지 않게 하겠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감과 긴장으로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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