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그리고
‘정말로 이기는 건가. 형이 말했던 대로……’
주현은 그라운드 위도 벤치에 앉아서도 아닌, 관람석에 앉아 경기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규 시간도 모두 끝나고 추가시간도 이제 2분여가 남은 지금,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홈 경기장인 뉴 퍼스우드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홈팬들의 함성이 아니라 베이포트 FC 원정 팬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해리 맥스웰의 환상적인 패스에 이은 로날드 조던의 멀티 골로 승부는 베이포트 FC 측으로 넘어와 있었고, 아직까지 그 균형은 깨지지 않고 있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은 로날드 조던의 추가 득점 이후 급하게 공격적으로 나서보았지만 급한 마음에 삐걱이는 모습을 보이며 제대로 베이포트 FC의 골문을 공략하지 못했다.
오히려 베이포트 FC가 수비에 집중하다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뒤를 노리는 등, 완전히 전세가 역전된 상태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로날드 조던의 골 이후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홈팬들은 만회 골이 나오길 바라며 열심히 응원했지만 정규 시간도, 추가시간도 거의 끝나가는 지금은 그저 허탈한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베이포트 FC의 원정 팬들은 자신들이 준결승에 간다며 기쁨에 찬 목소리로 응원가를 부르며 어서 게임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정말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이겨 버렸어.’
그 가운데 주현은 멍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경기 전, 동민은 주현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오늘 경기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고 준결승전에서 그가 복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하던 것을 주현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 말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현은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만약 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동민과 다른 동료들은 정말로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
이윽고 경기의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휘슬이 길게 울리자, 뉴 퍼스우드는 베이포트 FC 팬들의 환호와 함성에 파묻혔다. 그리고 주현은 그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몸을 떨었다.
거짓말 같은 말을 진실로 만들어낸 동민과 동료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그의 손등 위에 따뜻한 눈물이 되어 떨어지고 있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 베이포트 FC의 경기가 베이포트 FC의 승리라는 의외의 결과로 끝나자 축구팬들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16강전에서 바르셀로나 CF라는 거함을 침몰시켰던 베이포트 FC지만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까지 잡아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베이포트 FC는 바르셀로나 CF를 잡고 8강에 올라온 것이 결코 우연과 행운이 아니라는 듯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마저 잡아내며 준결승전에 올랐다. 지금껏 베이포트 FC의 돌풍을 그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행운 정도로 생각하던 이들은 이제 그 생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축구팬들에게 놀라운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벌어졌던 FC 마드리드와 FC 에르푸르트와의 경기의 승자는 터무니없게도 FC 에르푸르트였기 때문이다. FC 에르푸르트의 홈에서 열렸던 1차전에서 2 대 1의 승리를 거두었던 FC 마드리드가 자신들의 홈에서 3 대 2의 패배를 당하면서 원정 골 우선 규칙에 의해 떨어지고 만 것이다.
베이포트 FC와 싸우게 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만큼이나 승리가 유력했던,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 팀이 8강전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FC 에르푸르트가 베이포트 FC만큼의 약팀은 아니지만 상대가 FC 마드리드라는 지난 시즌 우승 팀이였기에 누구나 FC 마드리드의 승리를 예상했다. FC 마드리드는 1차전에서도 중원부터 FC 에르푸르트를 압도하며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었고, 2 대 1이라는 점수 차는 그저 더욱 벌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골키퍼와 수비진의 분전으로 막은 수준이었다. 그 때문에 더욱 FC 마드리드가 탈락할 거란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2차전 결과는 달랐다. FC 에르푸르트는 놀라운 집중력과 전방압박을 보여주면서 FC 마드리드의 수비진부터 공략했고, 거센 압박에 당황한 FC 마드리드는 스스로 무너지며 전반전에만 두 골을 내주었다. FC 마드리드가 후반전에 지난 시즌 챔피언다운 뒷심을 보이며 따라붙었지만 결국 한 골을 더 허용하며 결국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베이포트 FC와 FC 에르푸르트 두 팀의 의외의 준결승 진출은 팬들로 하여금 우승 팀이 어디가 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 팀이랑 스톡포트 시티, VFB 뮌헨, 그리고 FC 에르푸르트. 정말 어느 팀을 만나든 쉬운 상대는 없네.”
동민은 아침부터 사무실에 앉아 머리를 긁적였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라는 자신에겐 벽과 다름없었던 팀을 넘어서긴 했지만 아직 웃을 수 없었다. 준결승까지 온 이상 우승을 노리는 것은 당연했고, 만나는 팀들은 누구나 다 우승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진 팀들이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라는 벽을 넘은 것으로 끝이 아닌, 더 강한 팀들과의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스톡포트 시티나 VFB 뮌헨이야 말할 것도 없는 강팀인데… FC 에르푸르트가 FC 마드리드를 꺾고 올라온 건 정말로 의외야.”
동민은 조별 리그에서 FC 마드리드에게 홈과 원정에서 각각 3 대 1, 3 대 0의 대패를 당한 것을 갚아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어떤 팀을 만나도 그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한 적이 없던 베이포트 FC과 그를 완전히 눌러 버린 팀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동민은 그런 FC 마드리드를 누르고 올라온 FC 에르푸르에 대한 놀라움과 경계심이 가득했다.
‘FC 마드리드가 수비 빌드 업부터 완전히 무너졌어. 만날 수 있는 세 팀 중에서 객관적인 전력을 보자면 가장 약하지만 실제로 만난다면 절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애초에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팀보다 약한 팀은 없고.’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기지개를 폈다.
준결승 대진 추첨까지는 앞으로 몇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들이 결승전에 가기 전 만날 상대가 스톡포트 시티가 될지, VFB 뮌헨이 될지, 혹은 FC 에르푸르트가 될지 생각해 볼 만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어느 팀을 만나든 다들 정말 자기 색이 확실한 팀인데.’
FC 에르푸르트는 분데스리가에서 3위에 머물면서 VFB 뮌헨만큼 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강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빠르고 강한 전방 압박과 거기서 이어지는 역습은 이번 FC 마드리드와 같은 강팀도 거꾸러뜨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동민은 그들을 상대하게 된다면 지난 쾰른 07과의 경기에서 느꼈던 강한 압박과 빠른 역습에 대한 취약점을 고칠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VFB 뮌헨은 분데스리가와 챔피언스 리그의 오랜 강팀으로 이번 시즌에도 일찌감치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어 둔 팀이다. 양 측면에서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는 공격은 알아도 막기 힘들고, 거기에 신경 쓰다간 미드필드 지역에서 이어지는 패스에 집중력을 잃고 골을 헌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게다가 일찍이 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만큼 선수들의 체력 관리 또한 수월했다.
그리고 스톡포트 시티는 점유율과 패스, 압박을 중시하는 그들 특유의 경기로 조금씩 상대를 무너뜨리고 틈이 나면 곧바로 상대의 골문을 노렸다.
세 팀 모두 자신들의 색이 뚜렷했고, 동시에 어느 팀이든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팀들이었다.
그런 팀들에 대해 생각하니 조금은 골치가 아파오는 동민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결승에 오르려면, 그리고 우승컵을 들어 올리려면 어느 팀을 만나든 승리를 거둬야지.”
동민이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전화기가 진동했다. 따로 전화가 올 곳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조금은 얼굴을 찡그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누구시죠?”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말은 익숙한 한국어였지만, 목소리는 동민이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목소리였다.
-아, 강동민 감독님 맞으시죠?
상대는 먼저 한국어로 말을 한 점에서 이미 전화를 받은 사람이 동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확인하듯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목을 긁는 듯한, 조금은 불쾌할 정도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동민은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대답했다.
“네. 맞는데 누구시죠?”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대답에 동민은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 대진추첨을 앞두고 베이포트 FC의 선수들과 스태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준결승전인 만큼 모두가 한데 모여서 준결승 상대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2차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 진출의 1등 공신이 되었던 해리 맥스웰이나 로날드 조던, 조나단 케인과 같은 선수들 뿐만 아니라,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주현까지 아직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선수들이 조금은 긴장한 모습으로 어느 팀이 상대가 될 것인지, 어느 팀이 개인적으로는 더 마음에 드는지 작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동민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동민의 옆자리에 앉은 샐리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지난 시즌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린 이후 꾸준히 가까워져 이것저것 속 이야기도 풀어놓게 된 두 사람이었지만, 가끔 동민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 그가 그렇게 생각에 잠기는 경우는 팀에 대한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샐리도 그를 가만히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동민의 표정은 어두워졌다가 찌푸려졌다가를 반복하며 무언가 큰 고민을 하는 듯했다.
동민은 그녀의 질문도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멍하지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는 듯 보였다.
“강?”
“예? 뭐라고요?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에 좀 빠져 있어서.”
샐리가 다시 한번 부르자 동민은 그제야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여전히 밝지 않았다. 그런 동민의 얼굴을 보고 샐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진이 어떻게 될지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어느 팀이든 우리가 지금까지 상대했던 팀들을 생각하면 셋 중 어느 팀을 만난다고 해도 아예 못 이기진 않을 거예요.”
“네? 어… 아, 그래요. 고마워요.”
그녀의 말에 동민은 무슨 말이냐는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서둘러 미소를 지었다.
“혹시 그 일 때문이 아니었어요? 다른 말 못 할 일이 있나요?”
“아뇨, 그게… 개인적인 일이라 나중에 말할게요. 미안해요.”
걱정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동민이 당장 할 수 있는 말을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