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째 복수의 기회 (259/270)
  • 두 번째 복수의 기회

    ‘지난 경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점은 공을 가지고 있어도 효과적인 공격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거야. 우리가 더 공을 잡았고, 더 많은 패스를 주고받았지만 제대로 된 찬스를 만들지 못한 이상 공을 가지고 있기만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동민은 차가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주현의 결장, 반드시 두 골 이상 득점해야만 하는 상황,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머릿속에서 내려두고 그는 최대한 단순히 생각하려 애썼다. 지난 경기에서의 패배 원인은 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수비벽을 효과적으로 뚫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시간과 기회를 날려 버린 탓이었다. 물론 공을 돌리면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수비의 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잘되지 않은 이상 아쉬운 점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우리는 스톡포트 시티가 아니야. 공을 돌리면서 틈을 찾아내고, 그 틈으로 비어져 들어가는 침투로 수비를 무너뜨리는 것은 실패했다. 그렇다면 다음 2차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동민은 차근차근 베이포트 FC의 장점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어떤 전술에도 빠르게 녹아들 수 있는 적응력, 그리고 언제든 상대의 허를 찌를 수 있는 의외성. 그것이 베이포트 FC의 장점이었다.

    그리고 그 무기들 덕에 동민과 베이포트 FC는 지난 시즌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하자마자 4위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선 처녀 출전에도 불구하고 8강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적응력, 의외성… 그 장점들을 활용해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 자랑하는 철벽 수비를 무너뜨려야만 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 중에서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해.’

    동민은 그러면서 굳은 얼굴로 다시 한번 수첩에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스테이터스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 선수들의 스테이터스를 적어가면서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어떤 선수를 이용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상대 선수를 파고들 것인지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조그맣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 아예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고. 지금은 그것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눈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일념으로 타고 있었다.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갔다.

    베이포트 FC는 박주현이 없는 상황에서도 애버포스 원더러즈를 2 대 0으로 잡아내며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지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경기에서 제대로 상대의 수비를 공략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울분이라도 토하듯 에딘 페트로비치와 잭 하워드, 야야 둠베흐로 구성된 베이포트 FC의 공격진들은 경기 내내 상대 수비를 쩔쩔매게 만들었다.

    애버포스 원더러즈의 입장에서는 2 대 0이라는 결과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정도로 일방적인 베이포트 FC의 승리로 끝난 경기였지만, 동민은 결코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미 며칠 후로 다가온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이 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라커 룸에서 승리의 기쁨을 나누는 선수들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오늘 경기에서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이번 시즌에 주로 쓰던 것과는 다른 전략에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일부 선수들은 요즘 비교적 적은 기회를 받았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에딘 페트로비치와 잭 하워드를 보았다. 그들은 이번 시즌 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각각 최전방 스트라이커와 우측 미드필더로 자리 잡으면서 최근에는 전보다 출전 시간이 줄어든 선수들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불만을 가지진 않았고 오히려 출전 시간이 줄어들면서 경기력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훌륭하게 본인들의 장점을 보여주었다.

    에딘 페트로비치는 여전한 공중볼 장악 능력을 선보였고, 잭 하워드는 이제는 31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를 자랑하며 훌륭한 크로스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경기가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며칠 뒤 더욱 중요한 일전을 앞두고 있고,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죠. 이제 우리의 눈은 그곳으로 향해야 합니다.”

    동민의 말에 베이포트 FC 선수들은 방금까지 나누던 승리의 기쁨을 빠르게 삼켰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라는 거대한 벽과의 싸움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물론 방금 말했던 것처럼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격 옵션 중 한 명이 없이 경기를 치러야만 하고, 그 상황에도 두 골 이상을 득점하며 경기에 승리해야만 합니다. 그것도 이번 시즌 리그 최소 실점 팀을 상대로 말이죠.”

    동민은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수비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처럼 느껴졌고, 그런 그들을 100퍼센트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은 가슴에 무거운 짐을 얻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주먹을 힘주어 쥐면서 그 떨림을 억지로 몰아냈다. 그는 부상을 당한 주현에게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전을 복귀 무대로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의 이 난관을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했다.

    동민은 머릿속으로 그것을 되뇌며 배에 힘을 주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목표인 우승은 헛된 꿈이 될 테니까요. 혹시 여기까지면 괜찮다며 만족한 사람 있습니까?”

    동민의 말에 선수들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고, 첫 승리를 거두었을 때, 또 토너먼트에 진출했을 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하던 선수들도 있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그 생각은 사라졌다.

    세리에 A의 오랜 명문 팀인 AC 로마를 상대로 두 번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축구팬들이 절대 이길 수 없을 거라던 바르셀로나 CF를 그들의 홈에서 경기를 주도하며 비겼고,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는 역전승을 거두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실수들로 인해 크게 고전했던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지난 1차전에서도 홈팬들의 성원 아래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동점 골을 노렸다.

    그 시간들을 거치면서 선수들의 마음속에 있던 우승을 향한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이 정도면 잘했다’라는 말 대신 ‘우승컵을 손에 들고 싶다’라는 말이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새어나왔다.

    그것은 비단 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코치들과 구단의 스태프들도 지금의 성적에 만족하기보다는 정말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손에 쥐는 기적을 직접 만들고 싶어 했다.

    어느덧 2부 리그에서 잔류를 목표로 하던 베이포트 FC에게 우승을 목표로 하는 강팀들에게만 존재할 것 같은 열망과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이는 동민이 베이포트 FC를 맡은 지 고작 2시즌도 안 되는 기간 만에 만들어낸 큰 변화였다.

    동민은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젓거나 아니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만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승을 원하는지, 우리가 어째서 우승 후보라는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알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해선 다음 경기에서 지금의 불리함을 뒤집고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잡아내야 하는 거고요.”

    동민의 말에 선수들의 머릿속에서는 오늘의 승리 대신 며칠 남지 않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결전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오늘 승리에 대해 기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정말로 우리가 기뻐할 시기는 아직 이릅니다. 모두들 뉴 퍼스우드에서 승리를 축하할 때까지 조금만 참아주길 바랍니다.”

    동민은 그 말을 남기고 라커 룸을 떠났다.

    뉴 퍼스우드에서의 결전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오직 4일뿐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진출을 건 베이포트 FC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경기가 벌어지기 전 날, 동민은 경기 전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기자들은 지난 1차전에서 베이포트 FC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강한 수비와 역습에 당했던 만큼, 이번 원정경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나설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에게 크게 고전하셨는데요, 이번 경기를 앞두고 따로 준비하신 것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동민은 잠시 말을 골랐다.

    “이번 경기를 위해 선수들이 열심히 땀을 흘리며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지난번과 같이 열심히 준비했어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동민의 뻔한 답변에 질문을 한 기자는 빠르게 동민의 답변을 받아 적으면서도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기자로서는 더 흥미로운 대답이나 자극적인 말을 기대했지만 오늘의 동민은 평소보다도 더욱 조심스러운 답변만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 이후 몇 번의 질문이 더 동민에게 날아들었지만 동민은 모두 안정적인 답변만 하면서 질문들을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그것이 반복되자 혹시나 지난 바르셀로나 CF와의 경기가 끝난 뒤처럼 흥미로운 답변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던 기자들은 모두 그 기대를 놓고 있었다.

    그런 뻔한 말만 오고가는 자리에서 결국 누군가 참지 못했는지 입을 열었다.

    “이번 경기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전에 올라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 질문에 몇몇 기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이번에도 ‘그런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식으로 적당히 넘길 것이 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감독이 자신의 팀이 질 것이라는 전망을 입 밖에 낼 것이며, 극강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상대로 2골 이상의 득점이 필요한 마당에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할 리도 없었다. 어린아이가 봐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 유리한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민이 그 질문을 적당히 흘려 넘길 것이라 생각했을 때, 동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축구는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스포츠인 이상 그런 예상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경기가 확률대로 흘러갈 리가 없으니까요.”

    기자회견장 안의 모두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 어이없는 질문을 넘기는 동민을 보며 다른 기자들은 정말 멍청한 질문이었다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동민은 이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경기에서 승리하고 준결승에 오르는 팀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 아닌, 우리 베이포트 FC라는 것 말입니다.”

    동민은 차분한 목소리로, 하지만 힘 있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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