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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이 든 성배 (255/270)
  • 독이 든 성배

    ‘이야기는 들었지만… 확실히 그러네.’

    한국에 돌아온 주현은 훈련장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스무 살 때에 비해 많이 밝아진 성격의 그지만 지금 국가 대표 팀의 상황은 그의 밝은 태도로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월드컵 최종 예선 중에 이루어진 신영수 감독의 사퇴, 그리고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물려주고자 했던 뜻과는 달리 찝찝한 은퇴 자리가 된 형만의 빈자리, 모두 대표 팀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 탓인지 훈련장의 분위기는 티는 크게 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전과 달랐다. 거의 농담이 오고 가지 않았고, 주현 또한 장난을 칠만한 분위기가 아님에 침묵을 지켰다.

    ‘아시안 컵 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월드컵 최종 예선의 마무리를 앞두고 감독이 자진 사임하는 경우는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다. 감독인 신영수가 최종 예선의 마무리를 짓지 않고 그만두려 한 것도, 축구협회에서 그 것을 막지 않았던 것도 주현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현의 의문은 식사 시간에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위쪽하고 트러블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우리까지야 확실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건 아니지만 아시안 컵 때 전 감독님 태도도 그렇고 뭔가 있긴 있는 분위기였거든.”

    과거 성남 페가수스의 핵심 미드필더였으며 이제는 수원 블루 데빌즈와 한국 국가 대표 팀의 노련한 노장이 된 장진운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현이 국가 대표 팀에 합류한 이후 동민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두 사람은 꽤나 친밀한 관계가 되었고, 사적으로도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기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위쪽? 협회요?”

    “그렇겠지. 괜히 더 입 열지 마. 안 그래도 지금 감독 대행인 정경수 코치도 그쪽 이야기라면 끔찍이 싫어하니까. 아시안 컵 때 네가 없어서 이야기해 주는 거지.”

    진운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고 밥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주현 또한 더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식사에 열중하기로 했다. 지금의 분위기를 묵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이 굳이 이 이야기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눈치챘기 때문이다.

    결국 주현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밥을 입가에 욱여넣었다.

    “결국 어떻게 된 거예요?”

    훈련을 모두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주현은 곧바로 다시 진운에게 물었다. 주현의 끈질긴 질문에 진운은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세간에는 심형만의 은퇴와 아시안 컵 우승을 통해 유종의 미를 거두려 했던 대표 팀이었지만 그것에 실패했고, 이에 대표 팀의 감독이었던 신영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운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그 전부터 선수 기 용문제와 같은, 축구협회와의 몇 가지 트러블로 흔들리던 신영수 감독이 반쯤 강제적으로 하차했고 월드컵 최종 예선을 치르고 있는 지금까지 축구협회는 그 후임에 대한 파벌 싸움으로 시끄럽다며 그는 말했다.

    “말도 안 되는데요.”

    “그 말이 안 되는 짓을 하는 게 그 양반들인 걸.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다음 월드컵 진출을 위해서는 이제 한 경기, 한 경기 미끄러지지 않고 이겨야 하고. 참 쉽지?”

    이야기를 들은 주현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진운 또한 고개를 저으며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그 또한 반쯤 질린 표정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언뜻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건 말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다음 감독을 둔 파벌싸움도 끝나지 않아서 아예 제3자로 하자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이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으로 일단 채워두고 최종 예선이나 월드컵에서 성적이 안 나오면 욕받이 시키겠다는 거지.”

    “제3자? 누구요?”

    주현은 전혀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강동민, 지금 네가 있는 베이포트 FC의 감독. 지금 당장 소방수를 시켜도 팬들이 죄다 박수를 칠 만한 인기도에, 어느 쪽 파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니까. 덤으로 감독으로 내세워서 잘되어도 좋고, 안 되면 부담 없이 내버리기 편하니까.”

    그 말에 주현은 지금까지 지었던 싸늘한 표정들이 전부 부드러운 미소로 보일 정도로 표정을 구겼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주현은 더 이을 말을 찾지 못했다. 동민은 이용할 생각을 했다는 것보다, 동민이 국가 대표 팀 감독 제의에 응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대표 팀을 구성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팀도 잘나가고 국가 대표 팀에 오고 싶어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잘해봐야 본전, 못하면 독박인 자리인데 오고 싶어 할 리가 없잖아.”

    진운 또한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얼굴을 찡그렸다.

    ‘위쪽 힘 싸움에서 밀려서 예전에 피를 본 적 있는 사람이 그런 자리를 또 맡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명진이 형이 들었으면 엄청나게 화냈을걸. 애초에 나도 그렇고.’

    진운은 성남 페가수스 시절의 동민을 기억했다. 당시 주장이었던 명진이 라커 룸에서 똑똑히 들었다는 그 말대로라면 동민은 주안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좋을 대로 이용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성남 페가수스 시절 주안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던 경험을 가진 동민이 이제 와서 또다시 이런 독이 든 성배를 쥘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미 주안과 성남 페가수스 때 권력싸움에 끼어 희생되었던 동민이다. 지금 국가 대표 팀 자리는 그때보다 더 안 좋으면 안 좋았지, 좋다고 말하긴 힘들었다.

    또한 그때의 일을 굳이 동민과 친분이 있고, 그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를 주현의 앞에서 입에 담으며 그의 화를 돋울 필요도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현은 단단히 분노한 표정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지금 분위기가 이렇게 초상집처럼 되어 있던 거예요? 월드컵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결정되는 와중에?”

    “감독 대행인 정경수 코치도 어차피 스스로가 땜빵의 땜빵이란 걸 알고 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팀이 잘될 리가 있냐. 경수 코치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쯤 됐으니 경수 코치를 정식 감독으로 받지 않을 거면 얼른 다른 감독이 오고 이런 분위기를 끝내주면 좋겠다는 게 내 바람이야.”

    진운은 주현의 분노에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방금 이야기를 한건 너 열받고 동기부여 떨어지라고 한 말이 아니야. 우리는 지금 상황이 어떻든 힘내서 경기들을 이기고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지어야지. 그게 우리가 국가 대표 팀에 있는 이유고, 최선을 다하는 게 우리 의무니까.”

    조용하게, 그러나 딱딱하게 말하던 진운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주현을 보았다.

    “강동민 그 사람이 올 거라고는 절대 생각 안 하지만 혹시 모르니 국가 대표 팀 이야기 나오면 말리라고. 나야 그 사람 밑에서 다시 뛰면 좋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한테 여긴 안 맞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하는 진운의 표정은 그리움과 죄책감 등이 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말에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이던 주현은 진운의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지금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상황이라 느끼며 각각 잠자리에 들었다.

    “무슨 소리야? 대표 팀에서 뭐 이상한 일이라도 있었어?”

    동민은 영국에 돌아오자마자 찾아와 국가 대표 팀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냐며 물어오는 주현을 보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A매치 기간 동안 짧은 휴식을 취하면서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과의 8강전을 고민하던 동민은 급작스러운 주현의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독 사임으로 인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라크와 중국과의 2연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고 분위기 반전을 성공시킨 주역이 클럽에 돌아오자마자 할 이야기가 아니어서였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대표 팀 경기 뛰고 오니까 혹시나 해서. 그, 뭐야. 감독 대행으로 경기를 치르고 하다 보니까… 축구 팬들 사이에서는 형을 대표 팀 감독으로 데려오자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더라고.”

    동민의 물음에 주현은 시선을 회피하면서도 더듬더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그의 말에 동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라, 아서. 지금 당장 8강전 준비하기도 바쁜데 국가 대표 팀은 무슨. 안 그래도 이제 2주 정도밖에 안 남아서 골치 아프다고. 당장 모레부터 선수들 다 돌아오고 나면 어떤 식으로 훈련하고 준비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벅차.”

    동민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베이포트 FC를 맡은 이후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상대로 2무 1패를 기록한 그는 매번 마르코 알베스의 선수비 후 역습 전술의 파훼법을 찾는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물론 첫 패배 이후 점점 더 경기 내용이 발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리그 맞대결까지 남은 세 번의 경기를 어떻게 나서야 할지는 역시 큰 고민거리였다.

    그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FA컵 일정 덕에 리그 내에서의 맞대결은 챔피언스 리그 이후로 밀려났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발전하는 것처럼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의 수비 전략도 점점 더 영리해지고 있어. 차라리 챔피언스 리그라는 중요한 무대 이후에 리그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 부담감이 적을 거야.’

    동민의 머릿속은 당장 챔피언스 리그 8강전을 어떻게 나서야 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래? 그럼 됐어. 정말 그냥 별일 아니었어.”

    동민의 대답에 주현은 기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동민은 그런 친구이자 아끼는 선수의 모습에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 때문에 돌아오자마자 내 집에 찾아온 거란 말이야? 하이고, 차라리 나가서 여자를 만… 아, 아니다. 이건 감독으로서 할 말이 아니지. 어쨌든 너희 집에 가서 휴식이나 취해. 나는 지금도 머리가 아프다고.”

    동민은 자신의 실수에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농담이라도 이런 말을 했다가 8강전을 앞두고 괜히 팀 내에서 스캔들이라도 터지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었다. 과거 조나단 케인의 찌라시 기사 때문에 고전했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지금이야 그때보다 대응하는 것도 많이 익숙해지긴 했지만 이런 큰 경기를 앞두고 조금이라도 잡음이 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았어, 알았어. 늦은 시간에 미안했어. 또 뵙겠습니다, 감독님.”

    “어, 어?”

    동민의 푸념 섞인 말에 주현은 정말로 옷을 챙겨 입고 자리를 떴다. 마치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것만 같은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뭐야 저거? 진짜로 그런 황당한 이야기나 하려고 왔던 건가?”

    그리고 주현이 떠난 집 안에는 아까보다 더욱 황당한 표정을 지은 동민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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