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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8강으로 (254/270)

이제는 8강으로

주심의 휘슬 소리로 경기가 끝나자 브리큰돈 스타디움은 홈팬들의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바르셀로나 CF라는 거함을 상대로 역전승에 성공하며 8강 진출에 성공한 것이다. 베이포트 FC의 팬들로서는 흥분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반대로 런던까지 먼 길을 온 바르셀로나 CF의 원정 팬들은 허탈함을 감출 수 없었다. 베이포트 FC라는 약팀을 상대로 자신들의 홈에서 자존심을 구기고, 원정에서 그것을 되갚아주나 했더니 역전패를 당했다. 도저히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충격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그것은 바르셀로나 CF 선수들과 감독인 마르코스 히메네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베이포트 FC의 감독인 동민과 악수를 나누고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그라운드를 벗어났다. 승리를 자신했던 상대에게 역전패를 허용했다는 것과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그들의 행진이 멈췄다는 점,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지난 굴욕을 되갚아주겠다며 이를 갈았던 것이 무색하게 당했다는 것.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반대로 베이포트 FC의 라커 룸은 축제 분위기와도 같았다.

“다들 수고했습니다. 이 경기는 미리 말했듯 어느 팀이 더 절실하냐의 싸움이었고, 여러분은 우리가 더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충분히 우리가 이길 만한, 이길 수밖에 없는 경기였어요. 이제 우리는 8강으로 갑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승리를 만끽해도 되겠죠.”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목소리는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짧게 이야기를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는 승리에 대한 기쁨보다 오늘 경기에서 느꼈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해야 했지만, 선수들은 아니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 만한 경기를 뒤집은 그들은 승리를 만끽할 자격이 있었다.

‘다른 팀들의 결과도 확인해야 하고, 오늘 경기에서 부족했던 점들도 고민하면서 보완해야 하는데 지금 선수들의 분위기를 망칠 필요는 없지.’

뒤돌아본 동민의 눈에는 신이 나서 노래를 틀고 서로 떠들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기자회견장으로 떠났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이목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조금 전 바르셀로나 CF의 마르코스 히메네즈가 굳은 표정으로 짧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빠르게 자리를 뜬 탓이었다. 도무지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딱딱하게 굳었던 그의 표정과는 반대로 동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기자회견장에 들어섰고, 이는 오늘 경기에 대한 두 팀의 반응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먼저 이번 시즌 베이포트 FC의 경기력 중 단연 최고라고 할 만한 경기를 보여준 것에 대한 질문이 포문을 열었다.

“오늘 대단한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바르셀로나 CF를 꺾고 8강 진출을 확정 지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질문을 받은 동민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승리를 거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바르셀로나 CF는 경기 전에도 말했듯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이고, 그들을 꺾고 8강에 진출한 것은 클럽 역사에 남을 일이죠. 오늘 우리 선수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렇게 입을 연 그는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던 그의 표정은 살짝 굳으며 신중하게, 그러나 도발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우연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 스태프들과 선수들이 만들어낸 일이며, 동시에 어느 정도 예정되어 있던 일이기도 하죠.”

바르셀로나 CF가 16강전에서 떨어졌다는, 어쩌면 이번 시즌 챔피언스 리그 최고의 이변을 그는 예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기자들의 웅성거림을 낳았고 시선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지금껏 동민은 무난하게 기자회견을 하다가도 가끔 도발적인 말로 그들의 흥미를 끌었고,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바르셀로나 CF에게 8강 진출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들은 이 대회 최고의 팀 중 하나고 마티아스 루비오나 제수스 모레노, 오늘 경기엔 나오지 않았지만 루테로 알론소와 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있죠. 그러니 챔피언스 리그 8강이라는 자리는 바르셀로나 CF팬들에게 너무나도 당연히 가야 할 자리라고 느껴질 겁니다. 기대를 넘은 부담이죠.”

그 말에 침묵에 빠진 기자회견장을 보면서 동민은 마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린 다릅니다. 우리에게 챔피언스 리그 8강은 꿈이며 이제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자신과 행복을 느꼈죠. 이것은 아마 8강전,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더 강한 팀들을 상대로 우린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거고, 승리를 쟁취해 낼 겁니다. 우승까지요. 우리의 목표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니까요.”

이는 동민의 도발이자 베이포트 FC의 챔피언스 리그에 대한 출사표였다. 이번 시즌 클럽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에 나온 팀이 우승을 목표로 하겠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헛소리로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바르셀로나 CF라는 거함을 침몰시킨 상황에서 그 말은 전혀 다른 울림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 말을 하는 동민의 표정 또한 도저히 농담으로 생각할 수 없는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베이포트 FC는 지금까지 팀 내에서만 목표로 하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목표를 당당하게 세계에 알렸다.

“…그래서 너무 들떠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고?”

“그런 거지 뭐. 다음 날 떠올리고 이불 걷어찰 뻔했다니까.”

바르셀로나 CF와의 경기도 끝나고 어느새 날씨도 풀리는 3월 중순, 동민은 집에서 편안히 앉아 코코아를 마시며 주현과 떠들고 있었다.

“들뜬 김에 그런 소리를 기자회견장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대단하네. 우리 앞에서는 냉정한 척 유지하고 있더니만.”

놀리듯 말하는 주현의 말에 동민은 창피함에 머리를 긁적였다.

바르셀로나 CF와의 경기가 끝나고 기자회견장에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노린다고 말했던 것을 두고 주현은 그를 놀리고 있었다. 주현을 비롯한 선수들 앞에서는 크게 들뜨는 모습 없이 조용히 웃던 동민이 기자회견장에서는 그런 폭탄을 터뜨렸다는 것을 뒤늦게 안 것이다.

동민의 발언 이후, 사람들의 의견은 두 가지였다. 일부는 바르셀로나 CF라는 거함을 잡아냈으니 충분히 자신감을 보일 만하다, 라는 평가를 했고, 많은 수는 그래봐야 결국 챔피언스 리그 첫 출전인 팀이 우승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 과도한 자신감이 아닌가, 라는 이야기를 했다.

게다가 그 발언 이후 결정된 8강전의 상대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라는 상황은 더욱 동민의 자신감이 부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베이포트 FC를 맡은 이후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동민인 만큼 이번 8강전이 더욱 중요시되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동민이 바르셀로나 CF전 이후에 한 말은 여러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말이었다.

“너도 그렇고 다들 축제 분위기나 마찬가지인 곳에 있었는데 나도 전염될 수밖에 없지. 거기에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둔 상황에서 나도 흥분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렇다고 선수들 앞에서 나도 신나서 분위기에 올라탈 수는 없으니까.”

냉정한 척하는 동민의 말에 주현은 당시 라커 룸 상황을 떠올렸다. 흥분의 도가니나 마찬가지였던 그때의 라커 룸은 그를 포함한 선수들의 노랫소리로 가득 찼었고, 다른 스태프들마저 리그 4위를 확정 지은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보다도 더 기뻐했다. 그런 상황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때 한 말은 오버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렇게 말하며 코코아를 입에 대는 동민의 얼굴은 아직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여간 감독도 참 고생하는 자리라니까.”

주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언제나 함께 승리에 기뻐하면서도 또 다음 경기를 준비하며 선수들과는 선을 긋는 동민의 모습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자신들은 기뻐하며 잠시 다음 경기에 대한 생각을 접어둘 때에도 동민은 애써 냉정을 되찾고 다음 경기를 준비했다. 그것이 비록 감독이 해야 할 일이라지만 예전의 한 경기, 한 경기마다 함께 웃고 떠들던 그의 모습이 조금은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주현이 그런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동민은 어느 정도 그의 뜻을 눈치챈 듯 말을 돌렸다.

“됐고, 내일 국가 대 표팀 가서 다쳐서 오지나 말아라. 세르히오가 부상에서 복귀한 것도 엊그제 같은데 이번에 네가 빠졌다간 정말 끔찍한 결과가 나올지 몰라. 안 그래도 8강전 상대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인데 걔네 수비를 뚫기 더 힘들어진다고. 날 허언증 있는 감독으로 만들지 마.”

동민은 일부러 엄살을 부리며 말했다.

바르셀로나 CF를 넘고 나니 그다음 상대가 자신들의 천적인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이라는, 누군가 일부러 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대진이었다.

“당연하지. 지금껏 못 이겼던 걸 이번에야말로 갚아줘야 하니까. 그런데 국가 대표 팀이라…….”

주현은 동민의 엄살 섞인 말에 슬쩍 표정을 찡그렸다.

“왜?”

“아니… 요즘 대표 팀 분위기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진 않아서. 형도 뉴스 봐서 알잖아?”

“응?”

동민은 곤란한 듯한 주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챔피언스 리그와 리그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다른 곳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뭐야, 난 안 갔지만 아시안 컵에서 영 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신영수 감독님 나갔잖아. 그때부터 좀 잡음이 많은 것 같아서.”

“아…….”

주현의 말을 듣자 동민의 머릿속에선 저번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뉴스가 떠올랐다. 아시안 컵에서 8강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었던 한국 국가 대표 팀에서 신영수 감독이 자진 사퇴를 하던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던 것이다.

“언뜻 뉴스에서 봤는데 아예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아무튼 아직 확실히 보진 않았지만 상황이 좀 안 좋은 모양이야. …형만 선배가 은퇴하고 나서 구심점이 없는 것도 맞는 것 같고.”

주현은 그렇게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형만의 뒤를 이어 한국 국가 대 표팀의 핵심 선수로 완전히 자리 잡은 그였지만 아직 형만처럼 팀의 중심이 되진 못했다. 그리고 그런 형만의 부재는 감독의 사임과 맞물려 대표 팀의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다.

“내년 월드컵 생각하면 얼른 잘 마무리 지어야지. 너도 잘해주고. 지금이 최종 예선이잖아.”

동민은 조금 침울해진 주현을 보면서 그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는 베이포트 FC의 감독이지 국가 대표 팀의 감독이 아니었고, 베이포트 FC에서의 일이 아니라 국가 대표 팀에서의 일로 주현이 고민한다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 것이 경기 외적으로 영향을 주던 형만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라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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