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함의 싸움(1)
베이포트 FC와 바르셀로나 CF의 충격적인 1차전이 끝나고 3주 뒤, 이번에는 베이포트 FC의 홈인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 8강 진출을 건 두 팀의 싸움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바르셀로나 CF의 팬들은 그들의 파란색과 붉은색의 줄무늬를 가진 홈 유니폼을 입고 브리큰돈 스타디움에 왔고, 그들에 맞서 베이포트 FC의 홈팬들은 흰색과 검은색의 물결로 그들을 맞이했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그리그 토너먼트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8강 진출을 바라보고 있는 베이포트 FC 팬들의 사기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홈에서 자존심을 구겼지만 원정에서 그것을 뒤집고 8강에 진출하길 바라는 바르셀로나 CF 팬들과, 구단의 역사를 더욱 써 내려가길 바라는 베이포트 FC 팬들은 서로 절실하게 자신들의 팀이 승리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팬들의 그런 절실함은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경기는 잊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정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상대의 주축 선수가 징계로 결장한다는 사실은 지금부터 머리에서 지우세요.”
동민은 선수들을 앞에 두고 그렇게 말했다. 지금껏 바르셀로나 원정에서도,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에 집중하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리가 유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8강 진출을 좌절시킬 수 있고, 한 번의 패스가 우릴 승리로 이끌 수도 있죠. 상대는 세계 최강의 팀입니다. 마음을 풀지 말아요.”
그는 선수들이 저번 경기에서 만들어낸 유리한 점들을 생각하다가 자만하고 무너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게다가 상대가 비록 루테로 알론소를 잃은 상태라고 해도 세계 최고의 공격력을 가진 바르셀로나 CF인 이상 경기는 언제나 뒤집어질 가능성이 존재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심판의 휘슬이 불릴 때까지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으면 안 됩니다. 이 경기는 더욱 절박한 팀이 승리를 거둘 테고, 그 팀은 우리입니다.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 첫 토너먼트 진출, 그리고 다음은 8강. 우리는 승리가 절박한 팀이에요. 그것을 상대에게 보여줘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눈은 승리를 향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다.
같은 시각, 바르셀로나 CF가 있는 원정 팀 라커 룸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가 이기는 것이 당연한 경기다. 지난 경기에서 상대를 가볍게 보고 고전했다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그때보다 더욱 준비했고, 그때보다 절박하다. 이겨야만 하는 경기를 놓치지 않도록.”
마르코스 히메네즈는 지난 홈경기에서의 굴욕을 떠올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게 지난 1차전은 몇 배는 덩치가 차이 나는 쥐에게 콧잔등을 깨물린 고양이의 모습과도 같았다.
방심해서, 선수들의 컨디션이 생각만큼 좋지 못해서, 실수 때문에, 상대에게 일격을 허용할 수는 있다. 하지만 쥐가 고양이를 한 번 물면서 위협할 수는 있어도 잡아먹을 수는 없다.
그만큼 마르코스 히메네즈에게 이번 경기는 당연히 이겨야만 했다. 과정이 어떻듯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듯, 지난 1차전을 고전했다고 해도 이 경기를 이기고 8강에 진출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는 오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바르셀로나 CF를 지휘하는 그의 방식이었고, 지금까지 그는 이 방식으로 다비드 페레즈라는 거물의 뒤를 이어 바르셀로나 CF를 우승으로 이끌고 있었다.
“원정 골이 어떻고, 루테로가 결장하는 게 어떻고 하는 핑계는 필요 없다. 우리가 지고 있는 이름의 무게를, 우리의 유니폼에 있는 엠블럼을 기억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그는 그렇게 말을 끝냈다. 그 말을 듣는 바르셀로나 CF의 선수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프리메라리가와 챔피언스리그를 넘나들며 모든 곳에서 우승컵을 노리는 사냥꾼이자 어떤 상대를 만나든 철저하게 짓밟는 폭군, 그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CF였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한 경기에서 고전했다고 불안함을 느낀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리 지난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하고 흔들렸다고 해도, 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하면 탈락한다는 사실에 흔들리지 않았다.
반드시 골을 넣고, 반드시 이긴다. 바르셀로나 CF 선수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경기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똑같이 하면 될 뿐이었다.
베이포트 FC의 홈구장인 브리큰돈은 큰 경기장이 아니었다. 3만 석이 조금 안 되는 관객석은 바르셀로나 CF가 자랑하는 에스타디오 데 바르셀로나의 10만 명에 가까운 관객석에 비하기는커녕, 스톡포트 시티의 우드뱅크 스타디움에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역사와 홈경기 승리의 당연함에서 나오는 원정 팀을 향한 압박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만큼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 대부분의 원정 팀이 느끼는 무게감은 에스타디오 데 바르셀로나의 압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브리큰돈 스타디움은 원정 팀인 바르셀로나 CF에게 배정된 원정 팀 좌석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좌석이 검은색과 흰색의 줄무늬로 뒤덮여 있었다. 브리큰돈 스타디움을 가득 채운 검은색과 흰색의 물결은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의 거대한 파도처럼 그라운드를 덮치고 있었다.
“이야, 이거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겠는데.”
FC 마드리드의 홈 경기장인 에스타디오 데 에스파냐의 강렬한 홈팀 응원에 익숙했던 올리비에 나스리는 경기 시작 전, 마지막으로 몸을 풀 때부터 사방에서 들려오는 홈팬들의 환호성에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도 작은 경기장에 비해서 열광적인 응원을 하던 베이포트 FC의 팬들이었지만, 오늘은 평소보다도 한층 더 컸다.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 이름을 올린 것에 대한 기쁨, 바르셀로나 CF라는 비교하기도 힘든 거대 구단을 상대로 자신들의 홈에서 8강 진출을 결정지을 거라는 믿음,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거대한 함성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함성은 벌써부터 베이포트 FC의 선수들에게는 자신감과 힘을, 바르셀로나 CF 선수들에게는 이곳이 확실히 상대 팀의 심장 안이라는 생각을 주고 있었다.
“네가 봐도 그 정도야?”
그의 옆에서 함께 몸을 풀던 조나단 케인이 웃으며 말했다. 베이포트 FC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팀의 주장 완장까지 단 그였지만 오늘 팬들의 응원은 그에게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평소의 응원도 절대 빈말로라도 미적지근하다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오늘은 정말 뜨거웠다.
“당연하지. 저 바르셀로나 멍청이들도 가볍게 생각하자다 기 확 죽겠는데? 경기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제일 꼴 보기 싫은 그놈은 안 나왔지만 나머지도 이 경기가 끝나고 침울해져 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상쾌해져.”
“…너도 참 저쪽 무진장 싫어하네.”
올리비에 나스리는 곤란한 듯 웃는 조나단 케인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하면서 사납게 웃었다. 이미 마드리드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그지만 아직도 그에게 바르셀로나 CF의 선수들은 무조건 이겨야만 하는 상대였다.
“당연하지. 지난번에 바르셀로나 원정에서 저쪽 서포터들도 아직 날 기억한다는 걸 화끈하게 보여줬잖아. 그럼 내 쪽에서도 이렇게 받아주는 게 당연하지. 이런 건 정말로 변하기 힘든 거라고.”
조나단 케인은 올리비에 나스리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나중에 베이포트 FC를 떠났을 때 가장 큰 라이벌이던 손우드 FC의 팬들을 만난다면 자신도 크게 다를 게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당연한 문화니까.
“그러네. 어쨌든 오늘 경기에서 이겨야 하는 건 그런 거랑 관계없이 당연한 거지만.”
“그렇지. 8강 진출을 위해선 이겨야만 하는 경기지. 물론 그것에 저 바르셀로나 녀석들을 박살 낼 수 있다는 즐거움을 더한다면 더 좋은 거고.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있겠어?”
어딘가 어긋나면서도 어울리는 베이포트 FC의 두 센터백 콤비는 그런 말을 주고받으면서 씩 웃음을 지었다.
같은 시각, 최전방 투톱으로 나선 박주현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두 사람도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에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이 팀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항상 그랬지만 오늘은 더.”
비록 규모는 에스타디오 데 바르셀로나 홈팬들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지만 분위기와 열정만은 결코 밀리지 않는 관객들을 보면서 주현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팬들을 등에 업고 세계 최고의 팀 중 하나를 상대한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가슴 어딘가가 짜릿한 느낌이 든 것이다.
“참 나, 별 시답지도 않은 소릴 하네.”
반면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그런 주현을 보면서 곧 있을 경기에 집중하라는 듯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차가운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반응에도 주현은 관객석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래도 확실히 그렇잖아.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라는 무대도 그렇고, 이런 대단한 팬들 앞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선수로서 꽤나 가슴 뛰는 상황 아냐? 없던 힘까지 솟아날 것 같다고.”
“꽤나 감독처럼 이야기하네. 친해서 닮은 거 같은데.”
주현의 말에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심호흡을 하면서 경기에 집중하려는 모습이었다. 주현은 나름대로 멘탈이 약한 그의 부담감을 줄여주고자 한 말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며 쓴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그의 귓가에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흘리듯 한 말이 들어왔다.
“이 정도로 그러면 나중에 결승 가서는 어쩌려고? 그때 가서 혼자 가슴 부여잡고 난리치지 말라고.”
고개를 돌리고 슬쩍 흘린 그의 말이지만 주현의 귓가에는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러네. 그때를 생각하면 너무 일찍 감격에 빠지면 안 되겠어.”
주현은 그렇게 대답하며 웃었다.
동민이 모두에게 말했던 거짓말 같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컵, 그것은 아직 멀고 먼 상황이었지만 적어도 지금 베이포트 FC 선수들에게는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그저 선수들을 영입하기 위한 말도, 선수단의 사기를 위한 입에 발린 말도 아닌, 그 자체가 사실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경기를 이기고 더 위로 올라간다. 우리가 꿈꾸는 빅 이어(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의 별칭. 우승컵의 손잡이 모양이 큰 귀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를 손에 쥘 때까지. 상대가 바르셀로나 CF든 세계 최고의 팀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승리를 절실히 원한다.’
모든 베이포트 FC 선수들의 머리에 담겨 있는 생각이었다. 아직은 자신 있게 입 밖에 낼 수 없는 희망이지만 그들은 확신했다.
이 경기를 승리하고 8강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우승까지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갈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