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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남긴 패배, 그러나 (244/270)
  • 상처를 남긴 패배, 그러나

    “자, 자! 크리스! 더 빨리 움직여요! 당신이 움직이는 게 늦을수록 조나단이나 주현이 파고들 곳이 줄어드는 셈이에요!”

    한겨울에도 영상 5도 정도를 오가는 런던의 겨울치고는 쌀쌀한 공기를 동민의 말이 가르고 지나간다.

    지난 버턴 유나이티드와의 경기가 역전패로 끝났지만, 동민은 크게 낙담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보다 더 분노하고 억울해하던 것이 선수들이며, 그들을 달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동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감독으로서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도, 동민은 그 경기에 대한 큰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버턴 유나이티드전에서 노린 것은 세 가지. 하나는 크리스 러셀을 가짜 9번으로 삼는 공격 전술의 성공적인 실험, 두 번째는 다른 팀들에겐 밀집 수비가 능사가 아니란 메시지, 마지막은 박싱 데이의 성공적인 시작. 세 가지 중 두 가지는 나름대로 성공한 거니까.’

    심판의 어처구니없는 오심으로 내준 경기이긴 하지만 크리스 러셀을 이용한 새로운 공격 방식은 충분히 베이포트 FC의 새로운 공격 옵션이 될 만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그 이상의 성과도 있었다.

    후반전이 되어서 로날드 조던이 빠지고 야야 둠베흐가 들어가자 전반과는 달리, 좌측보다는 주현이 있는 우측으로 더욱 공격이 집중되었다. 그런 불균형적인 상황에서도 야야 둠베흐와 박주현, 크리스 러셀로 구성된 공격진은 예상외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예 박주현을 최전방 바로 밑의 프리롤로 두거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돌아오면 박주현 본인을 가짜 9번처럼 이용하는 방법도 고민할 만하겠어.’

    버턴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로 동민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는 자신을 얻은 것이다. 이는 단순한 승점 3점보다도 더욱 큰 것을 얻은 셈이었다.

    ‘다비드 페레즈 그 양반한테 힘들 때마다 도움을 받는 느낌이란 말이지. 이번엔 직접 받은 것도, 그 사람이 의도한 것도 아니었지만.’

    동민은 문득 그렇게 생각하면서 웃었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공백으로 인한 공격진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고민하던 동민은 과거에 바르셀로나 CF에서 다비드 페레즈가 보여주었던 가짜 9번 전술을 떠올렸다. 그가 한국에서 지도자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하던 무렵, 프리메라리가를 넘어 전 유럽을 뒤흔들며 센세이션을 일으키던 다비드 페레즈의 바르셀로나 CF의 모습을 참고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형태로 고친 것이다.

    ‘사적으로 통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유일한 타 팀 감독이라서 그런가.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떠올린 게 천만 다행이야.’

    동민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그때 다비드 페레즈의 가짜 9번 전술을 떠올린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훈련과 지난 경기를 통해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선수들에게 잘 어울리는 공격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두 감독의 전술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록 그 형태와 목적은 달라도, 최전방의 선수가 아래쪽으로 많이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고 다른 선수들로 골을 노린다는 기본적인 개념 자체는 흡사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이걸 통해서 다비드 페레즈 그 양반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으면 통쾌하겠네. FC 마드리드와의 경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다고 해도 지난 1차전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1승 2패가 되었으니까.”

    지난 1차전에서 베이포트 FC의 장기인 빠른 전술 변화에서 스톡포트 시티에게 오히려 밀린 것을 동민은 기억하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와 FC 마드리드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던 탓에 그때는 그냥저냥 넘어갔지만, 자신의 장기에서 따라잡히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가짜 9번 전술로 한 방 먹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지겠어.’

    자신이 바르셀로나를 이끌던 시절 유명했던 전술의 아류에 당한다면 아무리 다비드 페레즈라 해도 속이 쓰릴 것은 분명했다. 그것으로 지난 패배의 복수를 상상한 동민은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려면 어쨌든 전술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니까. 선수들이 더 적응해 줘야만 해.’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훈련에 집중했다.

    이제 시작된 박싱 데이를 최대한 좋은 성적으로 넘기는 것도, 다음번에 스톡포트 시티를 만나 과거 다비드 페레즈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도, 그리고 두 달 조금 남지 않은 바르셀로나 CF와의 16강전도 모두 훈련에 달려 있었다.

    “고작 그런 오심에 주저앉으면 안 되니까.”

    동민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려는 것처럼 그 말을 입에 담았다.

    모리스톤 타운 AFC와 베이포트 FC의 경기는 최근 몇 년 동안 빠르게 열기가 늘어났다. 2부 리그에서 비교적 거대한 자본과 선수층을 가지고 챔피언십의 최종 포식자가 되었던 모리스톤 타운 AFC와, 변화무쌍한 전술을 자랑하는 베이포트 FC는 챔피언십 1위와 3위를 차지하며 같은 시즌에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두 팀은 묘한 관계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챔피언십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이며 1위를 차지한 모리스톤 타운 AFC가 유리하겠지만, 요 3시즌 간 두 팀의 상대 전적을 살펴보면 베이포트 FC가 훨씬 더 유리했다. 이런 상황은 두 구단과 팬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라이벌 의식과도 같은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더욱 폭발하게 된 계기가 지난여름, 명실상부한 모리스톤 타운 AFC의 에이스였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거액에 베이포트 FC로 둥지를 옮긴 일이었다. 그 이후 모리스톤 타운 AFC의 팬들은 베이포트 FC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베이포트 FC와 경기를 한다면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그 계기인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빠진 상태라니, 아이러니하네.’

    평소보다 더욱 열정적인 응원을 펼치는 리버사이드 스타디움의 홈팬들을 바라보며 알베르토 브루노 감독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팬들이 저토록 이번 경기만은 이겨야 한다며 소리치는 계기가 된 주인공이 부상으로 빠져 있다는 상황 탓이었다.

    ‘본인은 나오는 게 더 좋았을지, 안 나오는 게 더 좋았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밑에서 한 단계 성장하며 기쁨을 주었던 제자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베이포트 FC에서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더욱 향상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알베르토 브루노에게는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아니라 강동민이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더 큰 성장을 도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러니까… 적어도 이번 경기만큼은 확실하게 이겨서 그 녀석이 아주 약간은 후회하도록 만들어줘야겠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승리를 다짐했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를 3,500만 파운드라는 거금에 판 모리스톤 타운 AFC는 우측면에 있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높던 플레이 스타일을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남은 선수들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이적료로 데려온 이적생들과의 결합으로 전보다 더욱 다채로운 경기 방식을 자랑하며 지난 시즌보다 높은 순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민의 분석 능력마저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확실히 감독이 이야기한 대로 저 녀석을 통해 패스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무조건은 아니어도 공격진으로 이어지는 키 패스를 담당하는 선수인 것은 맞는 거야.’

    자크 피레스는 모리스톤 타운 AFC의 중앙 미드필더인 에반 뉴먼을 바라보았다. 지난여름 모리스톤 타운 AFC에 합류한 에반 뉴먼은 공격의 템포를 조정하고 전방의 투톱에게 직접 이어지는 패스를 시도하는 등, 공격에서 꽤 많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파트너인 브레들리 하이드는 비교적 뒤에 머물며 수비에 더 집중하거나, 측면으로 롱패스를 시도하는 등 에반 뉴먼과는 차별화된 플레이 스타일을 자랑했다.

    ‘어쨌든 저 녀석을 괴롭히는 게 내 역할이니까. 저 녀석의 영향력만 줄여도 모리스톤 타운 AFC의 공격은 원활히 흘러가지 않겠지. 오랜만, 아니, 처음으로 다른 동료들의 지원이 아닌, 나에게 따로 내려온 지시야. 해내야만 해.’

    자크 피레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재촉했다. 이번 경기에서 에반 뉴먼을 지우는 것이 그의 역할인 이상 확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는 이번 여름에 팀에 합류한 이들 중 자신만 유일하게 아직 뚜렷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베이포트 FC의 빠질 수 없는 공격 옵션이 되었고, 올리비에 나스리는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이용해 조나단 케인이나 해리 맥스웰과는 다른 면에서 선수단을 이끌고 있었다. 에두아르도 산체스는 확실한 주전으로 경기에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닉 베손과 경기에 따라 번갈아가며 출전하면서 빠른 발과 정확한 크로스로 측면 공격의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아직 자신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크리스 러셀과 함께 나오면서 많은 활동량으로 중원 영향력을 가져가기도 하고, 이안 페트로프나 해리 맥스웰과 함께 나오면서 그들의 지원을 하기도 하지만 함께 여름에 합류한 세 선수와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그는 아직 그만의 역할이 따로 없는 것이다.

    많은 활동량과 비교적 매끄러운 패스, 괜찮은 위치 선정을 가진 그지만 동민은 아직 자크 피레스에게 그만의 역할을 맡기기보다는 다른 선수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박싱 데이가 나에게 주어진 기회야. 많은 경기 수와 그에 따른 체력 문제 때문에 출장이 늘어날 때 내 자리를 확실히 찾아야 해. 감독과 팬들에게 이게 내 역할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하니까.’

    남다른 충성심과 애정을 가졌던 전 소속 팀에서 쫓겨난 이후 베이포트 FC에 합류한 그는 자신만의 역할을 찾아야 베이포트 FC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던 전 소속팀에서 버려지듯 방출당한 충격이 아직 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것이다.

    ‘베이포트 FC의 팬들이 모두 내 이름을 환호성을 지르며 외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어.’

    그는 그렇게 승리를 다짐했다.

    심판의 휘슬 소리로 경기가 끝나고, 리버사이드 스타디움까지 먼 길을 온 베이포트 FC의 원정 팬들은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다. 모리스톤 타운 AFC에게 유난히 강하던 베이포트 FC는 이번에도 1 대 0의 신승을 거두며 그 기록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주역은 자크 피레스였다. 자크 피레스는 모리스톤 타운 AFC 전진패스의 대부분을 맡은 에반 뉴먼을 철저한 압박으로 괴롭혔고, 강한 중거리 슈팅으로 이 경기의 유일한 골까지 뽑아냈다.

    승리의 여신은 더욱 간절하던 자크 피레스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베이포트 FC는 한 경기 패배하기는 했지만 곧바로 승리를 챙기며 박싱 데이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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