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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치 않은 기회 (238/270)
  • 흔치 않은 기회

    ‘결국 유스 팀에서 적당한 선수를 끌어 올려 그 자리를 채울 수도 없다. 이러면 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한정되는구나.’

    제임스 워든과의 대화가 끝나고 동민은 혼자 사무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처럼 유스 팀에서 끌어 올려 내세울 선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지금 있는 선수들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뿐이었다. 다른 선수의 포지션을 변경시키면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빈자리를 채우거나, 혹은 전체적인 전술을 다시 손봐서 상대의 밀집 수비를 뚫을 방법을 만들 모색해야만 했다.

    ‘어느 쪽도 쉬운 일은 아니지. 시간도 촉박하고… 이럴 때는 EPL도 겨울 휴식기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바라봐야 아무 소용없겠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12월 말부터 1월 초까지 박싱 데이에 돌입하지만, 오히려 겨울 휴식기를 가지는 리그들도 있었다.

    얼마 전 그가 상대했던 쾰른 07이 속한 독일의 분데스리가는 12월 중순이 넘으면 한 달 가까이의 긴 겨울 휴식기를 가진다. 그 긴 시간 동안 분데스리가에 속한 팀들은 전반기 동안 잃은 체력을 회복하고, 전술적으로나 팀 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후반기를 맞이한다.

    FC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CF가 속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또한 2주 정도의 겨울 휴식기를 통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팀을 정비하고, AC 로마가 있는 세리에 A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오히려 겨울 휴식기가 없는 프리미어리그가 오히려 드문 경우였다. 다른 리그의 팀들은 지친 체력을 회복하고 팀을 재정비하는 동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 소속된 팀들은 3일에 한 번 꼴로 경기를 치루며 더 급박하게 달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일부에서는 EPL 팀들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른 리그의 팀들에 비해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를 이 박싱 데이에서 찾으면서 EPL에도 겨울 휴식기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민 또한 그 두 가지가 그리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가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뭐, 없는 걸 바라봐야 어쩌겠어.”

    선수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은 감독의 책임이며, 치열한 박싱 데이를 넘겨야 하는 것은 베이포트 FC뿐만이 아니었다. 동민은 더 생각해 봐야 핑계 거리일 뿐이라며 스스로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해. 다음 경기인 버턴 유나이티드와의 경기 전에.’

    동민은 자리에 앉아 끙끙대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제가요?”

    크리스 러셀은 도무지 믿기지가 앉는다는 반응이었다. 동민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동민은 사뭇 진지했다. 그것을 보면서 크리스 러셀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지금까지 중앙 미드필더 역할만 수행하던 그에게 갑자기 최전방에 서라는 요구를 했으니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동민은 다시 한 번 그에게 말했다.

    “네, 다음 경기에서 당신이 최전방에 섰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감독님, 저는 지금까지 미드필더밖에 서본 적이 없고 팀에는 다른 공격수들이 있는걸요. 조나단이나 에딘, 그리고 박도 중앙에 설 수 있고요.”

    크리스 러셀의 말은 타당했다.

    베이포트 FC에는 두 명의 전문 스트라이커가 있었고, 요즘에는 박주현 또한 중앙에 서는 일이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크리스 러셀이 스트라이커로 서는 것은 비상식적인 인력 낭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정석적인 스트라이커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면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나는 당신이 정석적인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맡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역할에 가장 적합한 것이 바로 당신이니까 꺼낸 이야기입니다.”

    동민의 말에 크리스 러셀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정상적이지 않은 스트라이커 롤? 거기에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그런 크리스 러셀의 반응을 보면서 동민은 말을 이었다.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거 알잖아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래요?”

    동민의 말에 크리스 러셀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최대한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찬스를 만드는 일이나 공격을 마무리 짓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일일뿐, 평소 하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당신의 가장 큰 장점인 활동량을 이용하는 일이니까요.”

    동민은 크리스 러셀에게 그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평소 그의 플레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며 그를 설득했고, 계속된 그의 설명에 크리스 러셀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동민의 물음에 크리스 러셀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해보겠습니다. 감독님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동민은 미소를 지었다. 선수 본인에게서 확실한 대답을 들은 이상 충분히 그가 생각한 것처럼 활약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요. 버턴 유나이티드전에서 활약을 기대하죠. 난 당신이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요.”

    동민의 말에 크리스 러셀은 주먹을 꾹 쥐었다.

    버턴 유나이티드와 베이포트 FC 사이에는 이렇다 할 관계가 없었다.

    연고지가 같아서 어느 팀이 그 지역을 대표하느냐를 두고 다툰 적도 없었고, 과거 경기 중의 충돌로 관계가 안 좋아진 적도 없었다.

    두 팀은 애초에 만난 적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중위권을 오르락내리락거렸어도 계속 잔류에 성공하며 오랜 터줏대감이던 버턴 유나이티드와 달리, 베이포트 FC는 작년에야 겨우 프리미어리그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팬들에게 두 팀의 대결은 큰 의미가 있었다.

    바로 한국의 축구 팬들이다.

    버턴 유나이티드에는 한국 축구 국가 대표 팀의 핵심인 신형만이 있다. 그는 버턴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이후 꾸준한 활약으로 소속 팀에서도 주축이 되었고, 어느새 서른을 넘긴 노장이 되었다. 베이포트 FC에는 국가 대표 팀의 새로운 핵심 선수로 지목되고 있는 박주현이 있었다.

    두 선수의 맞대결은 언제나 한국 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팀의 승패를 떠나 둘의 활약 여부에 사람들의 눈길이 모아졌다.

    “저놈의 팀은 매번 만날 때마다 머리를 감싸 쥐게 만든단 말이지.”

    버턴 유나이티드의 감독 ,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이제 세 번째가 되는 베이포트 FC와의 맞대결에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두 번의 경기 경과는 1무 1패였다. 시즌 초반에 만난 첫 대결에서는 변화무쌍한 베이포트 FC의 분위기에 휘말려 손쓸 방법도 없이 2 대 0으로 완패하고 말았다.

    그 덕에 그 전까지 무패를 달리던 버턴 유나이티드의 기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에는 비기긴 했지만 그때 베이포트 FC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다. 승리한 경기에서도 위험했던 점들을 먼저 돌아보고, 개선해야 할 점들을 생각하며 다음 경기에 반영시키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버턴 유나이티드가 2차전에서 베이포트 FC를 상대로 비겼을 때는 베이포트 FC가 메이클즈필드 애슬레틱을 만나 패배한 이후 분위기가 확실히 가라앉아 있을 때였다. 그는 그때의 무승부에는 그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확실히 기억했다.

    자신들이 경기를 확실하게 준비하긴 했지만 만약 베이포트 FC가 시즌 초반처럼 무서운 기세를 이어가고 있었다면 비기는 것조차 장담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베이포트 FC라는 팀과 강동민이라는 감독에게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운 태도로 일관했다.

    ‘이번 시즌도 크게 다르지 않아. 여름 이적 시장을 통해서 오히려 전력은 훨씬 더 강화되었고, 분위기는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진출을 확정 지으면서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진 않은 상황이니까. 전보다 좋은 선수단, 전보다 좋은 분위기. 겉으로 보면 확실히 지난번보다도 힘든 경기가 될 수 있어.’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그렇게 생각하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절대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절망이 아닌, 희망이었다.

    ‘하지만 전력의 강화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드리블 능력에 의존하는 면이 커졌고,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지금 부상으로 빠져 있어. 노팅힐 AFC전도, AC 로마전도 베이포트 FC는 상대 밀집 수비를 뚫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가 베이포트 FC라는 팀에게 경외심에 가까운 감정을 지니고 있던 이유는 경기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그들의 전술 탓이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경기마다 모습을 바꾸어대는 그들은 프란체스코 만치니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근래의 베이포트 FC는 달랐다. 전력의 강화로 지난 시즌처럼 매 경기마다 완전히 다른 팀을 보는 듯한 변화는 줄어들었고, 박주현의 침투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드리블 능력 등 몇몇 선수의 비중이 커졌다.

    “만약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멀쩡하게 출전했어도 오히려 지난 시즌의 베이포트 FC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덜 골치 아플 거야.”

    형체 없던 유령이 조금씩 그 모습이 갖춰지면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듯, 베이포트 FC 또한 그러했다. 게다가 지금은 그 주축인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또한 결장한다.

    ‘이번이 기회다. 정말 자주 오지 않는 기회. 첫 번째는 완패, 두 번째는 혼란스럽던 상대의 분위기를 틈타 무승부, 그렇다면 이번이야말로 승리할 수 있는 찬스지. 지금까지 조금씩 나아졌다면 이번에는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거야.’

    첫 대결에서 혼란과 절망에 빠졌던 것을 이번에야말로 복수할 수 있다.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B22

    이후 일정을 생각해도 이번에 베이포트 FC라는 대어를 낚아두면 이후 박싱 데이의 일정은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박싱 데이를 잘만 넘기면 운이 좋다면 5위, 어쩌면 베이포트 FC를 제치고 4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일정이었다.

    ‘지난 패배에 대한 복수, 빡빡한 박싱 데이 일정을 부드럽게 시작할 수 있는 여유, 그 모든 것들이 걸린 경기다. 게다가 나중에 이 정도의 기회가 다시 올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아. 이번 경기는 반드시 이겨야 해.’

    프란체스코 만치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승리를 다짐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심형만의 골로 베이포트 FC를 무너뜨리고 승리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는걸. 내일 이맘때쯤에는 승리의 여운에 잠겨 있길 바라야지.”

    프란체스코 만치니의 입가에는 이제 자신감 넘치는 미소만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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