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끔찍한 경기
쾰른 07과의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고, 동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베이포트 FC에게는 운이 따른 경기였고, 반대로 쾰른 07에게는 지독하게도 운이 따라주지 않던 경기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고 말았다.
‘좀 아쉽긴 하지만… 생각보다 크게 힘 빠진다거나 화가 나는 건 아니구나.’
동민은 눈앞에 있던 승점 3점이 1점으로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차분한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일부러 경기의 템포를 늦추고 상대의 의도대로 경기가 흘러가지 않게만 하면 쾰른 07 스스로 자멸할 거라 생각했지만, 쾰른 07은 그 생각을 뒤집어 버렸다. 그들은 경기 초반부터 예상을 뒤엎는, 선이 굵은 축구를 선보였고 후반전에는 체력 싸움으로 베이포트 FC의 수비를 결국 무너뜨렸다.
오늘 경기의 무승부는 베이포트 FC가 못했다기보다는 쾰른 07이 그의 생각을 뛰어넘는 경기력과 정신력을 보여준 결과였다.
‘16강 진출이 걸린 경기,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홈이라는 장소, 주장이 빠지면서 오히려 단합된 선수들, 그 모든 게 합쳐져서 나온 결과인가.’
이번 경기에서 비기면서 16강 진출을 확정짓지 못해 아쉽지만 베이포트 FC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실책까지는 아니었다. 같은 시각 벌어진 AC 로마와 FC 마드리드와의 경기가 2 대 2로 비기면서, 16강 진출을 건 2위 자리를 노리는 레이스는 여전히 베이포트 FC가 앞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로 16강 진출 레이스가 마지막 경기까지 미뤄진 것은 변함없지만…….”
이번 경기에서 베이포트 FC가 승리했다면 3승 2패, 승점 9점으로 승점 13인 FC 마드리드의 뒤를 이어 2위로 16강 진출을 확정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비기면서 승점 7점에 머무르며 승점 4점을 기록하고 있는 AC 로마와 쾰른 07에게 일말의 희망을 내주고 말았다.
‘그래도 AC 로마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대패하지만 않으면 16강 진출 가능성은 제일 높아. 선수들의 부상 같은 큰 변수만 나오지 않으면 충분히 유리한 고지를 지킬 수 있을 거야.’
그는 그렇게 아쉬움을 삼키고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AC 로마와의 일전을 앞두고 만나는 팀들이 비교적 약팀이라는 점이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쾰른 07과 무승부로 마지막 경기까지 경쟁이 이어지기는 했지만 AC 로마와의 2차전은 베이포트 FC의 홈인 브리큰돈 스타디움에서 치러지고, 패하지만 않아도 16강 진출이 확정적인 상황인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AC 로마와의 경기를 닷새 앞둔 토요일, 에버포스 원더러즈와의 경기에서 동민의 희망적인 관측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번 시즌에 챔피언십에서 승격한 애버포스 원더러즈는 프리미어리그의 높은 벽을 실감하고 있었다. 최근 5경기가 1무 4패일 정도로 최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그들과 비교적 안정적인 베이포트 FC의 대결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베이포트 FC의 승리를 점쳤다. 그리고 전반 5분 만에 터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선제골에 그 예상이 들어맞는 듯했다.
베이포트 FC는 AC 로마전을 앞두고 빠르게 경기의 승세를 잡고 선수들의 체력 관리를 하겠다는 듯 애버포스 원더러즈를 밀어붙였다. 쾰른 07전과는 다르게 공격의 고삐가 풀린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와 박주현은 양 측면부터 중앙까지 폭 넓게 움직이며 날카롭게 공격했고, 중원의 아르센 디아라와 필립 포덴은 휴식 차 결장한 해리 맥스웰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베이포트 FC의 페이스로 그들의 손쉬운 승리가 점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악!”
전반 29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외마디 비명이 그라운드를 갈랐다.
아르센 디아라의 인터셉트로 베이포트 FC는 빠른 역공을 시작했고, 그 공을 받아 끌고 가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속도를 애버포스 원더러즈 수비수들은 제대로 따라잡지 못했다. 추가골의 예감에 베이포트 FC의 팬들이 기대감을 담은 함성을 내지른 순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라운드를 굴렀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뒤로 밀리는 듯하던 애버포스 원더러즈의 수비수가 몸을 미끄러뜨리며 태클을 하면서,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발목을 스터드를 들고 강타한 것이다.
곧바로 심판이 휘슬을 불었고 베이포트 FC의 팬들과 선수들은 곧바로 분노를 쏟아냈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드리블을 막기 위해 고의적인 거친 태클을 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스터드를 들고 발목의 옆을 강타한 그 태클은 자칫하면 몇 개월 이상의 큰 부상이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선수 생명까지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태클이었다.
발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이내 일어났지만 태클을 당한 발목이 아픈지 쭈그려 앉아 발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심판은 태클을 한 마틴 로브렌을 부르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그 손에서 나온 카드의 색은 노란색이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양 팀의 선수들은 심판에게 몰려들었다. 애버포스 원더러즈 선수들은 고의적인 태클이 아니었다며 반칙이 아님을 주장했고, 베이포트 FC 선수들은 주어진 카드의 색이 붉은색이 아닌 노란색이라는 것에 분노했다.
“뭐? 아니, 저게 왜 옐로카드야?”
그것을 보고 있던 동민 또한 분노와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규정상 스터드를 들고, 고의적으로 상대의 다리나 발목을 보고 들어간 태클은 분명히 레드카드를 줄 수 있었다. 마틴 로브렌의 태클은 분명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발목을 노리고 들어간 태클로 충분히 레드카드가 나올 수 있었고, 나와야만 했다.
‘만약 심판이 그 태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아예 처음부터 휘슬을 불지 않았을 텐데. 저게 반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옐로카드를 준 건 이해가 안 가.’
동민은 당장 주먹을 쥐고 대기심에게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분노를 꾹 눌러 참았다. 과거에 앨런 휴즈가 심판에 대한 항의로 징계를 받았던 것을 동민은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항의의 이유가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FA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심판의 권위이며, 그것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후우… 다시 일어선 것을 보니 지금 당장 못 뛰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가능한 한 빨리 교체를 해주는 편이 안전하겠지.”
예상치 못한 교체카드 1장의 소비와 중요 선수의 부상이 의심되는 상황, 그리고 그런 부상을 만든 태클에 대한 처벌이 고작 경고뿐이라는 복잡한 상황에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를 교체해 주고 부상이 의심되는 발목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로날드! 지금 바로 몸 풀고 출전 준비해 주세요! …그리고 계속해서 이 일에 흥분하는 선수들이 있다면 고참답게 그라운드 위에서 잘 타일러 주세요.”
동민은 분노와 걱정으로 부글대는 속을 애써 눌러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 밑에 깔린 격정과 떨림을 숨기기는 힘들었다. AC 로마와의 경기에서 선발 출전이 예상되어 체력 관리상 벤치에서 대기하던 로날드 조던은 그 말에 조용히 몸을 풀었다.
팀 동료가 선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태클을 받았다는 것, 그러고도 고작 경고 한 장으로 무마했다는 상황은 그에게도 분노를 일으키고 있었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교체로 빠지고, 경기는 갈수록 가열되어 갔다. 베이포트 FC는 거친 플레이를 한 애버포스 원더러즈를 완전히 박살내겠다며 잔뜩 이를 갈면서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전반 44분, 후반 12분에 터진 박주현의 연속 골로 경기는 3 대 0까지 벌어졌다.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주는 베이포트 FC의 모습에 베이포트 FC의 팬들은 환호로 화답했다.
그러나 애버포스는 다른 의미로 경기를 뜨겁게 만들고 있었다. 경기가 일방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그들은 베이포트 FC의 공세를 끊어놓겠다는 듯 갈수록 더욱 거친 플레이를 일삼았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에게 위험한 태클을 했던 마틴 로브렌이 경고를 받는 것으로 끝나자, 그들은 오늘 주심이 상대적으로 자비롭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듯 베이포트 FC 선수들에게 더 강한 태클을 시도했다.
아르센 디아라는 공을 잡고 터닝 동작 중에 다리가 걸려 그라운드에 뒹굴었지만 반칙조차 나오지 않았고, 부상으로 빠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대신 들어간 로날드 조던은 점프 중에 팔꿈치에 명치를 맞아 쓰러졌지만 나온 것은 구두 경고뿐이었다.
베이포트 FC 선수들도 경기가 갈수록 격화되자 감정적으로 변했고, 경기 막판에는 공을 가지고 다퉈야 할 선수들이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으르렁대는 상황까지 오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3 대 0이라는 베이포트 FC의 승리로 끝났지만 찝찝한 승리일 뿐이었다.
“이미 끝난 경기지만,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주심의 역할은 선수들을 보호하고, 경기가 과열되지 않고 잘 흘러가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의 선수 보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경기 진행 덕에 오늘 우리 선수들은 선수 생명을 걸고 경기를 해야 했어요!”
경기가 끝난 뒤, 동민은 애버포스 원더러즈의 감독과의 악수도 대충 하고는 주심에게 찾아가 열변은 토했다. 곧바로 브라운 키드 수석 코치가 와서 그를 말렸지만 동민은 분노를 참지 못했다. 조금 전, 팀 닥터가 정확한 진단을 해봐야 알겠지만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발목 인대 손상이 의심된다는 말에 분노가 폭발하고 만 것이다.
동민의 심판에 대한 분노는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오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거친 태클에 부상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평소라면 그저 짧게 유감을 표시했을 동민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세르히오는 부상입니다. 불행한 부상이죠. 발목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온 태클에 당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선수들은 제 감독 생활 중 가장 끔찍한 경기를 치러야만 했죠.”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얼굴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하지만, 태클을 한 선수에게 비난을 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나중에 어떤 징계를 받는다고 해도 이 말만큼은 해야 합니다. 오늘의 거친 경기는 전적으로 심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수를 보호하고, 경기를 원활하게 진행한다는 가장 중요한 일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정확히 오늘의 주심을 비난하는 동민의 말에 기자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지금껏 아무리 큰 패배에도 재미가 없는 인터뷰가 대부분이던 동민이었으니, 오늘의 경기가 그에게 얼마나 큰 분노를 샀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동민은 말 그대로 심판과 그 뒤의 FA에게 이를 드러낸 것이다.
“앞으로는 이런 경기가 없었으면 합니다. 선수들은 축구를 하기 위해 그라운드에 있는 것이지, 선수 생명을 걸고 도박을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니까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