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강을 건 단두대 매치(2) (229/270)
  • 16강을 건 단두대 매치(2)

    ‘경기 템포만 늦춰놓으면 된다.’

    동민은 경기를 앞두고 그렇게 되뇌었다.

    빠른 패스 워크를 무기로 삼는 쾰른 07은 그 패스 워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지난 1차전처럼 무너질 것이 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쾰른 07의 선발 명단을 보면서 더욱 강해졌다.

    ‘에릭 바이어가 없다고?’

    경기를 앞둔 훈련에서 그가 가벼운 발목 부상을 당했다는 말은 들었던 동민이었지만, 정말 출전 명단에 없는 것을 보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원에서 쾰른 07의 빠른 패스 워크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선수였다.

    ‘우리 팀으로 치면 해리 맥스웰이 빠진 것과 비슷할 텐데… 빠진다고 팀을 아예 못 꾸리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중원의 패스 길을 만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선수다. 그런 선수가 없다면…….’

    에릭 바이어가 없다면 쾰른 07은 평소보다 패스를 연결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민은 예상치 못한 호재에 미소를 지었다.

    ‘확실해. 이 경기는 이길 수 있어.’

    그러나 동민의 예상은 경기가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응? 뭐야, 이거?”

    동민의 목소리에는 당황이 잔뜩 묻어나왔다.

    쾰른 07은 그가 예상한 것처럼 간격을 좁히고 중원에서의 짧은 패스로 베이포트 FC를 노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베이포트 FC가 뒤로 물러나 중앙에서의 패스 루트를 차단하려는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경기장을 넓게 쓰면서 긴 패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중원에서 이어지는 패스 루트를 막으려고 내려설 것을 예상했던 건가.’

    동민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 이래서는 그가 그리고 있던 그림이 경기 초반부터 어그러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곧바로 선수들에게 양옆으로 벌리면서 크로스가 올라오는 것에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직은 그럴 타이밍이 아닌데…….’

    이곳이 베이포트 FC의 홈경기장인 브리큰돈 스타디움이라면 동민은 주저 없이 선수들에게 전술 변경을 지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경기가 벌어지는 곳은 브리큰돈 스타디움이 아니라 드리스너 아레나였다. 드리스너 아레나의 좁은 경기장에 선수들이 적응하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시간조차 없이 무턱대고 전술을 바꿨다가는 오히려 패스 미스나 선수들의 실수만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에릭 바이어의 결장으로 아예 자신들의 주특기인 중원에서의 빠르고 세밀한 패스 플레이를 포기한 건가. 미하엘 라인하르트 감독이 이렇게 도박수를 택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베이포트 FC라는 극단적인 팀을 제외하고라도, 대부분의 팀들은 자신들의 플레이 스타일에서 크게 바뀔수록 제 실력을 내기 힘들어진다. 물론 베이포트 FC는 동민이 상대하는 팀에 따라 다른 전술을 내세우기 위해서 특정한 색채를 가지지 않았지만 그들을 제외하고는, 다비드 페레즈의 스톡포트 시티와 같은 전술적인 유연성이 뛰어난 팀이 아니라면 대체로 그랬다.

    지금껏 쾰른 07이 보여준 모습은 전혀 그런 팀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플레이 스타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전술적인 변화를 가져간다고 해도 짧은 패스와 빠른 템포라는 큰 틀만은 절대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쾰른 07은 지금껏 하지 않았던 플레이 스타일로 베이포트 FC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 한 방 먹긴 했지만 아직 이 정도면 괜찮아. 우리가 밀리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를 할수록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크니까.”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눈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익숙하지 않은 플레이는 선수들의 실수를 낳기 쉬웠다. 지금 쾰른 07이 넓은 간격과 롱패스라는 생소한 플레이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16강 진출의 희망이 걸려 있는 이번 경기에서만큼은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열정과 홈경기장이라는 이점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는 집처럼 익숙한 이곳이니만큼 평소에 하지 않던 방식으로 플레이를 해도 큰 실수 없이 넘길 수 있었고,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 또한 그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시간만 지나면 해결책이 보일 거야. 선수들이 확실히 적응이 되고 나서 우리가 전술을 바꾸든, 혹은 상대가 무리한 변화에 혼자서 미끄러지든. 침착하자. 경기의 승리는 시간문제일 뿐이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먹을 쥐었지만, 경기의 첫 단추부터 묘하게 예상에서 엇나갔다는 점이 그에게 한줄기 불안감을 주고 있었다.

    ‘이번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16강은 물거품이 된다. 절대 지면 안 되는 경기야.’

    쾰른 07의 중앙 미드필더, 스테판 프리드먼은 이를 악물고 경기를 뛰고 있었다. 평소 다른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오늘 경기는 그에게 있어서 절대 지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경기에서 지는 순간 쾰른 07은 1승 4패로 16강 진출은커녕, 꼴지를 면하는 것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그들이 지는 순간 같은 시간 벌어지고 있는 FC 마드리드와 AC 로마와의 경기 결과와는 관계없이 16강 진출이 좌절되는 것이다.

    또한 오늘 경기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기로 유명한 미하엘 라인하르트가 그가 바라는 축구를 포기한 경기이기도 했다. 강팀을 만나든, 약팀을 만나든 미하엘 라인하르트의 쾰른 07은 자신들의 플레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이 쾰른 07이라는 팀의 정체성이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미하엘 라인하르트는 스스로가 바라는 아름다운 축구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경기에서만큼은 자신이 고집하는 짧은 패스의 빠른 공격 전술조차 포기하며 승리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릭한테 쓸데없는 부담감을 주고 싶지 않으니까.’

    스테판 프리드먼은 이를 악물고 상대의 돌파를 슬라이딩 태클로 저지했다. 본래 그는 쾰른 07에서 이런 중요 경기에 반드시 선택될 만큼 붙박이 주전이라고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스스로도 이제는 자신이 그렇게 출전하기 힘든 나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만큼 잦은 출장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에릭 바이어의 급작스러운 결장은 결국 그가 이 경기에 출전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그 머저리 같은 녀석 주장이 중요한 때에 빠져서 미안하네 뭐네 하면서 눈물까지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는 경기 전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팀원들에게 사과를 거듭하던 에릭 바이어의 표정을 떠올렸다. 16강 진출의 실낱같은 희망이 끊어질지 모르는 경기에 나설 수 없다는 상황에 팀원들에 대한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머릿속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는 녀석은 오늘 경기에서 지게 되면 순전히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 테니까. 대신 경기에 나선 이상 그 녀석이 경기에 나올 수 있을 때까지 희망을 이어가야만 해.’

    그 대신 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선 만큼, 그가 돌아오는 FC 마드리드와의 경기까지 16강 진출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남겨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면 안 돼. 반드시 이겨야만 해.”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되뇌며 우측면에서 질주하는 동료에게 길게 공을 차 보냈다.

    평소의 짧고 정확한 패스로 빠르게 상대 수비진을 구멍 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플레이 스타일이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롱패스라도 정확하게 전달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세웠고, 열정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쾰른 07의 홈팬들이 그의 등을 밀어주고 있었다.

    그 탓일까, 오늘 그의 패스는 본래 롱패스를 장기로 삼는 선수라고 여겨질 만큼 정확하게 동료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분위기도 상대가 아주 밀리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우리 쪽에 가까워. 선제골 단 한 골만 터지면 경기를 확실하게 주도할 수 있다.’

    스테판 프리드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더욱 발을 재촉했다.

    그는 수비 시에는 센터백의 바로 위에서 양 사이드라인까지 수비 가담을 하며 상대의 맥을 끊었고, 공격 시엔 측면의 동료에게 공을 전달하고 빠르게 오버래핑을 하면서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려 애썼다.

    그리고 전반 19분, 쾰른 07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베이포트 FC의 해리 맥스웰과 크리스 러셀이 측면으로 공을 주고받다가 결정적인 패스 미스가 나온 것이다.

    경기장의 크기에 아직 확실히 적응하지 못한 탓에 패스가 너무 길어졌고, 그 패스는 쾰른 07에게 인터셉트당하며 순식간에 베이포트 FC의 위기가 찾아왔다.

    공을 잡은 쾰른 07은 빠르게 측면으로 달려 들어가면서 아직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베이포트 FC의 수비 블록을 부쉈고,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고 빠르게 크로스를 올렸다. 실수에서 이어진 상황에 경험 많은 조나단 케인과 올리비에 나스리, 두 센터백들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 크로스는 쾰른 07의 간판 공격수인 이안 카민스키의 머리에 정확하게 맞았다. 아무도 제대로 막지 못한 채 노마크 상태로 날린 그의 헤더는 빠르게 골문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고, 그 모습을 보는 쾰른 07의 홈팬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안 카민스키의 헤딩슛은 골 망을 출렁이게 하는 대신, 헤딩슛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소리를 내면서 크로스바를 강타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온 실수와 수비가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크로스, 그리고 완벽한 헤더였지만 골이 되었어야 할 그의 슈팅은 마치 누군가 저주라도 건 것처럼 몇 센티미터 차이로 골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그 이후로도 쾰른 07은 분위기를 이어나가면서 강하게 베이포트 FC를 압박했지만, 어느덧 전반전도 반 이상 흐르는 상황이 되자 분위기는 점차 균형을 잡아갔다. 선수들이 드리스너 아레나의 좁은 경기장에 적응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동민은 곧바로 중앙에 집중하던 수비를 양 측면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베이포트 FC의 전술 변화로 쾰른 07의 측면 공격은 그 힘을 잃었고, 오히려 선제골을 만들어 낸 것은 베이포트 FC였다.

    세르히오 로드리게스 대신 우측 윙으로 나선 잭 하워드가 올린 얼리 크로스가 에딘 페트로비치의 머리를 스치고 골문을 향했다. 달리는 도중에 억지로 몸을 비트는 듯한 동작 때문에 강하게 힘이 실리지도, 골문 한쪽 구석을 정확하게 노리지도 않는 슈팅으로 공은 골키퍼에게 쉽게 막히는 듯했다.

    그러나 에딘 페트로비치의 머리를 떠난 공은 쾰른 07의 수비수 발끝에 걸리며 본래의 궤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말았다.

    본래 슛의 궤도로 몸을 던지려던 골키퍼는 역동작에 걸려 공을 막지 못했고, 공은 가볍게 골문 안쪽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전반 31분, 쾰른 07은 그렇게 너무나도 허망하게 선제골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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