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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패배의 그늘을 벗어나는 방법(1) (226/270)
  • 그들이 패배의 그늘을 벗어나는 방법(1)

    “조금 의외여서 놀랐어요.”

    “뭐가요?”

    런던에서는 드문 맑은 날, 동민과 샐리는 카페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어제 대화 흐름에서 갑자기 이런 권유를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요.”

    샐리는 그렇게 말하며 살풋 웃었다.

    지난밤, 완전히 낙담해 버린 동민을 걱정해서 이야기했던 그녀지만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좀 더 믿어달라며 말하는 것은, 예전에 동민이 그녀에게 어째서 레이미 볼든의 조카인 것을 말해주지 않았냐며 불만을 가졌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탓에 말을 꺼낸 직후 자신의 말을 후회하던 그녀였지만 동민의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잖아요. 더군다나 저를 위해서 해준 말인데 제가 그 말에 화를 낼 리가 없죠.”

    그렇게 대답하는 동민의 표정에서는 어제 보였던 절망감이나 초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샐리는 어제 경기가 끝난 직후 동민의 표정에서 패배에 대한 낙담밖에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털어버린 듯했다.

    “…고마워요.”

    샐리는 그의 말에 조용하게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엉망진창 같았던 자신의 말속에서 그 뜻을 찾아내 준 것과 결과적으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했지만 고맙다고 말해준 것,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담은 말이었다.

    “그 말은 제가 할 말이에요. 어제 당신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오늘까지 틀어박혀 있었을 테니까요. 티를 내지 않으려 지쳐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로 전술을 짜고, 결국 다음 경기나 그 이후까지 영향을 끼쳤겠죠.”

    그렇게 말하는 동민의 얼굴에는 쓴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만일 어제 샐리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그는 스스로 말한 것처럼 주위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려고 혼자만 끙끙 앓으면서도 패배의 그늘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민의 행동은 팀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그의 목적과는 반대로 오랫동안 베이포트 FC를 연패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동민은 또다시 실수할 뻔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며 반성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추고 있던 동민은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가 좀 빠진 느낌이에요. 저만큼 선수들도 머리를 식힐 시간이 좀 필요할 테고요. 그래서 내일도 훈련 취소시키고 일단 하루 더 쉬자고 해뒀어요.”

    “네? 내일도요?”

    가만히 동민의 말을 듣고 있던 샐리는 놀라서 되물었다.

    오늘은 원래 경기가 끝나고 휴식하는 날이긴 하지만 내일은 분명히 팀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민은 그 훈련을 취소시켰다고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해서 가장 엄격하다고 할 정도로 워커홀릭에 가까운 동민이지만 훈련에 대해서는 선수들에게도 요구하는 수준이 높았다. 그가 추구하는 상대에 따라 변화하는 플레이를 위해서는 선수들 또한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다른 움직임을 소화해야 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연습량의 증가로 이어졌다.

    동민이 스테이터스와 컨디션을 꼼꼼히 체크하는 덕분에 과도한 연습으로 인한 선수들의 컨디션 불량이나 부상은 거의 없었지만 선수들의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아슬아슬한 수준의 훈련은 그가 감독이 된 이후 거의 쉬는 법이 없었다. 그 끊임없는 훈련이 지금의 베이포트 FC를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다.

    그런 훈련을 동민이 하루 취소했다는 말은 샐리에게 충격과도 같았다.

    “내가 이번 패배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듯, 선수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당장 내일 훈련을 시작해 봐야 아직 같은 상대에게 연속으로 두 번이나 졌다는 드문 상황에 아직까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생길 뿐이니까요.”

    감독인 동민이 낙담해 있는 것이 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처럼,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명의 선수라도 훈련이나 경기 준비에 집중하지 못하고 헛돌게 된다면 선수들 전체에게 그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 악영향을 최대한 막는 것이 감독의 할 일이지만, 흔들리는 선수단의 분위기를 언제나 완벽히 커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동민은 어제 샐리와의 통화가 끝난 후 선수들 또한 역전패의 충격에서 벗어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 훈련을 예정했던 대로 진행할 경우 아직 패배의 후유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선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괜찮아요?”

    샐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 훈련을 취소한다는 것은 다음 경기의 준비에 하루가 더 줄어든다는 말이며, 동시에 다음 경기인 하트풀 FC와의 경기 준비가 더 느슨해질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즉, 지금까지 매 경기마다 최대한의 준비를 하던 베이포트 FC의 방식과는 조금 달라지게 된다. 만에 하나, 내일 훈련을 취소한 탓에 하트풀 FC와의 경기에서 평소보다 뒤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면 오히려 역효과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말은 그런 상황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만에 하나 다음 경기에서 평소보다 떨어진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당장 다음 경기를 잡으려고 하다가 패배 후유증에서 못 벗어나 이후 몇 경기 동안 팀 분위기가 바닥을 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동민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고요. 어제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FC 마드리드라는 철옹성 같은 팀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도저히 생각이 나질 않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동민 본인도 보기와는 다르게 아직 어제의 낙담과 혼란이 모두 씻은 듯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지금껏 팀을 이끄는 대전제가 사라진 상황은 샐리의 전화 한 번으로 말끔하게 평소처럼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자존감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는 해도 앞으로 FC 마드리드와 같은 팀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상황에서 선수들과 팀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아직도 백지와도 같았다.

    ‘그 부분은 계속 생각해 봐야겠지. 중요한 건 이미 지난 경기에 얽매여 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는 거니까.’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일단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이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하트풀 FC와의 결전을 앞둔 베이포트 FC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승리에 대한 믿음과 우려가 반반 정도였다.

    베이포트 FC가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고 있는 만큼 지난 시즌처럼 압도적이라고 할 만한 초반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이번 경기를 이길 수 없을지 모른다는 시선이 있었다. 지난 챔피언스 리그에서 FC 마드리드를 상대로 3 대 1의 역전패를 당한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거라 예상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그들의 다양한 시선들 사이에서 베이포트 FC와 하트풀 FC의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뭐야, 긴장하기라도 했어?”

    경기를 위해서 라커 룸을 나서는 세르히오 로드리게스의 등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팀 동료인 주현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어느샌가 휙 다가와서 말을 걸고는 했지만 오늘의 태도는 평소와는 어딘가 달랐다.

    “긴장은 무슨, 헛다리 짚지 마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그런 주현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경기를 앞두고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는 이유는 이 경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주현은 그의 명백한 거절 의사에도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게 아니면, 설마 얼마 전에 졌던 것 때문에 아직도 신경이 쓰인다거나 그런 거야? 혀, 아니, 감독님도 그랬잖아. 지난 경기는 아예 깨끗하게 잊으라고.”

    정곡을 찌른 주현의 말에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아주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같은 상대에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 보여주고도 두 번이나 패배한 것은 심리적으로 예민한 그에게는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팀으로서 진다는 경험은 지난 시즌 모리스톤 타운 AFC 소속일 때, 베이포트 FC를 상대로 겪어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뛰어도 팀 전체가 확실하게 준비해서 철저히 그를 방해하는 전술에 패배했었다. 그때를 제외하고도 패배는 적지 않았지만 지난 FC 마드리드와의 2연전은 달랐다. 그 경기들은 팀으로서 진 것이 아닌, 개인 능력에서부터 완벽하게 밀린 경기였다.

    ‘예전의 천재 소리를 듣던 때는 아니어도, 개인 능력에서는 졌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완전히 져버렸어.’

    지난 경기에서 베이포트 FC의 유일한 골이자 선제골을 기록했던 그였지만 상대의 실수에서 만들어진 찬스였고, 그가 직접 수비수들을 상대로 개인 능력에서 승리해 찬스를 만들어낸 적은 거의 없었다.

    예전에 월드 클래스가 될 재목이라며 주목받던 시절만큼은 아니어도 개인 능력에서 밀린 적은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FC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말 안 해도 알아.”

    세르히오 로드리게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에서 아픈 곳을 찔러오는 주현에게 목소리를 낮추고 으르렁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마음만 같아서는 깨끗하게 잊고 싶지. 그게 마음처럼 안 되니까 문제인 거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주현과 이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경기에 집중하도록 노력하는 편이 나았다. 그의 무시에 뒤에서 주현은 한국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여간 어디나 귀찮은 놈들은 있다니까.”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고 싶은 생각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던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그저 무시하고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등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놀라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짓이야!”

    갑자기 손바닥으로 등짝을 두들긴 주현을 노려보며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경악과 짜증을 담아 외쳤다.

    “예전에 내가 경기가 안 풀려서 얼어 있을 때 누가 이렇게 해줬거든. 근데 나름 효과가 좋아서 너한테도 좀 흉내 내본 거지.”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세르히오 로드리게스는 말도 안 되는 그의 변명에 으르렁거렸지만 주현은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를 앞질러 먼저 그라운드 쪽으로 향했다.

    “…하아, 대체 뭘 하는 거람.”

    그는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주현의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우울했던 기분도 방금 화를 낸 탓에 날아가 버린 듯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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